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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1: 신학 공부 공동체를 꿈꾸며

59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1-06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 신학 공부 공동체를 꿈꾸며


신학 위기? 인간과 삶의 이야기 놓쳐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신학은 어렵고 지겹고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신학이 인간과 삶의 이야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가톨릭 문화와 신학 연구소’ 초대소장인 정희완 신부는 신학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그 삶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선 신학을 공부하는 방식에 새로운 전환이 요청된다. 신학하는 방식의 변화로서 제안하는 ‘신학서원’. 세상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성찰하며 하느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이 ‘신학하기’의 여정을 정희완 신부와 함께 새로 시작한다.

 

안동 도산서원. 자기 수양과 수련의 새로운 공부론을 실험하기 위한 대안적 교육 공간이었던 한국의 서원을 참고해, 신학을 공부하는 방식의 변화로서 ‘신학서원’을 제안한다.

 

 

신학의 현실

 

정직하게 말하면, 신학 공부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신학을 공부했고, 선생으로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신학 연구를 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정신과 육체가 허락하는 날까지 신학책을 읽고 신학적인 글을 쓸 것이다. 그런데, 즐겁지 않다니. 무슨 이율배반적인 느낌인가.

 

신학에 관심이 있고,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묻는다. 즐겁게 읽은 신학책이 있는지, 마음을 흔드는 신학적 성찰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신학이 추상적이고 어렵다고 한다. 흥미와 기대를 갖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방 기가 꺾인다고 말한다. 신학은 매력이 없는 공부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처럼, 신학도 위기에 처해있다고 고백한다. 교회와 세상 안에 신학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데 신학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사제들 역시 솔직하게 말한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은 사목의 현장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신학 공부는 사제가 되기 위한 양성 과정에서 의무적인 교육이었기 때문에, 그저 견뎌내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신학을 공부한 사제들마저도 왜 신학이 지겹고 사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신학교의 신학 공부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주입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신학 그 자체뿐만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환경과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신학 - 인간과 삶의 이야기, 온몸으로 하는 사유

 

오늘의 세상은 이성과 사유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강조하는 시대다. 사람들은 현란한 사유에서 나오는 어떤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는 감각과 체험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추상적이고 어려운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신학의 위기는 이 시대의 풍조와 세태 때문인가.

 

신학책을 펼치면 뭔가 어지러운 느낌이다. 난해하고 현란한 단어들이 춤을 춘다. 신학이 하느님과 신비와 초월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일까. 신학에서 인간과 삶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인간과 삶의 문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인가. 하지만, 성경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과 삶의 이야기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 함께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신약성경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하느님이라는 존재와 개념에 대한 사유가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알려주고 있지만, 인간과 삶을 통해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학이 길을 잃었다고, 신학은 변해야 한다고 신학자들이 말한다. 신앙과 사목에 도움이 되는 신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신학이 어렵고, 신학 공부가 지겨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학이 인간과 삶의 이야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는 현대 신학의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일까.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학자들은 이성을 통한 사유만큼 경험을 통한 사유를 강조한다. 인간은 단순히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온몸을 통해 생각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오감을 통해 감각하며 체험하고 사유한다. 생각과 성찰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머리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사용해야 한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기보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그 삶에 관한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신학이 머리로만 하는 이성적 사유에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하는 사유(full-bodied thought)여야 하지 않을까. 신학을 이해하는 방식, 신학을 공부하는 방식에 새로운 전환이 요청된다.

 

 

왜 ‘신학서원’인가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면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신학을 공부하는 방식과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변화와 사유 방식과 구조의 변화는 언제나 상호순환적이다. 산다는 것은 안다는 것(로고스)이고 느낀다는 것(파토스)이고 행한다는 것(에토스)이다. 앎과 체험과 행위는 상호순환적이다. 항상 앎이 먼저인 것은 아니다. 체험이 먼저일 수 있고, 행위가 먼저일 수 있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지만, 행동하다 보면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행하는 방식의 변화, 그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어떤 틀의 변화가 먼저 필요할 때가 있다. 신학하는 방식의 변화로서 ‘신학서원’을 제안한다.

 

도산서원이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 서원에 관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두 개의 모순적 이미지가 있다. 학문과 대안 교육의 공간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로서의 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원철폐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서원은 권력을 향한 패거리 문화가 형성되고 지역민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모색은 더 나아지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언제나 좋은 의도와 지향에서 시작한다. 한국의 서원은 학문의 토착화와 대안 교육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향교가 출세주의 공리주의라는 관학적 아카데미즘으로 전락하자, 이에 대항하여 성리학의 토착화와 자기 수양과 수련의 새로운 공부론을 실험하기 위한 대안적 교육 공간으로서 서원이 출발했다. 공부는 권력과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배움의 즐거움과 덕의 수련을 위한 것이다. 공부는 알아가는 그 자체의 즐거움과 앎을 통한 변화의 여정에 그 의미가 있다. 공부는 주체적으로 변화하는 노력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서원의 인문적 기능(제사, 강학, 교육)과 지역 네트워크적 특징을 신학 공부 공동체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서원’이라는 이름과 그 운영방식을 차용하고 변주하는 이유는 서원이 갖고 있는 평생교육이라는 지향점과 사회적 교육의 지혜를 참조하기 위해서다. 또한, 신학서원은 서양의 교양교육과 동양의 수신(修身)과 수양(修養)이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변주하고자 한다. 강의 중심의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공부의 형식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중요시하는 공부의 형식을 선호한다. 즉, 자신의 생각을 벼리고 자신의 말을 하고 자신의 글을 나누는 공부 공동체를 지향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1일, 정희완 신부(가톨릭 문화와 신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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