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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42: 집 나가는 아우들

135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3-16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2) 집 나가는 아우들


홍교만과 이기연, 제사 지내지 않으려고 형이 통곡해도 가출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자신의 집에 숨겨 두었다.(탁희성 화백 그림) 홍교만은 서울에서 지내다가도 부친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피해 포천 자기 집으로 슬며시 돌아가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제사를 지내느니 혈연을 끊겠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제사 문제였다. 특별히 1790년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가 조선 교회로 전해진 뒤로 더 했다. 윤지충의 막내아우 윤지헌(尹持憲)은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전라도 고산(高山)의 이존창의 집에 여러 날 머물 당시, 신부를 만나기 위해 고산으로 찾아갔다. 이후 전주 유관검의 집으로 내려와 머물자, 다시 신부를 찾아가서 만났다. 1800년 11월에는 내종 간인 정약종의 서울집에서 한 번 더 신부와 만났다. 그는 드물게 다른 세 장소에서 신부를 만날 수 있었던 특별한 위치에 있던 신자였다.

 

그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주문모 신부가 윤지헌에게 물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가?” 윤지헌이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 우리나라의 예절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신부는 바로, “제사는 지극히 허황하고, 또 우리 도에서 꺼리는 바이다”라고 하며 나무람을 이어갔다. 「사학징의」에 나온다.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 이후 주문모 신부까지 제사 금지의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조선에서 제사의 여부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징표로 굳어졌다.

 

집안 전체가 신앙생활을 할 경우는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제사 문제는 신앙생활에 심각한 장애요 걸림돌이었다. 정광수 윤운혜 부부가 여주 부곡면(浮谷面)의 터전을 버리고 서울로 상경한 것은 제사 문제로 인한 집안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었다.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윤운혜는, 조상 제사에 계속해서 참석을 거부하자 시어머니가 나무라며 꾸짖음이 너무 심해서 상경을 결심했다고 했다. 신앙을 지켜낼 수 없다면 혈연을 끊는 것이 맞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정약종 일가가 마재를 떠나 분원(分院) 쪽으로 세간을 난 것도 발단은 제사 때문이었다. 정약종이 제사 참석을 거부하자, 부친 정재원의 노여움은 극도에 달했다. 뜻을 꺾고 순종한 정약전, 정약용과 달리, 정약종은 꿈쩍도 하지 않고 차라리 부자의 연을 끊겠다며 자진해서 솔가하여 집을 나갔다.

 

「사학징의」에 실린 신유년(1801) 2월 12일 의금부의 공초에 당시 정약종이 작성했다가 압수된 일기장 이야기가 나온다. 심문관이 말했다. “네 일기 속에 또한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묘소에 참배하거나, 부모의 상을 치를 때 비단으로 신주를 만들고 제사상을 차리는 것 등의 일들은 모두 죄짓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네 부모에 대해 차마 할 수 없는 망측한 말을 했고, 나라에 대해서도 뻔뻔스럽게 도리에 어긋난 말을 했으니 매우 흉악하다.”

 

차마 망측한 말이란 일기 속에 적힌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요, 집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비이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란 문장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학죄인을 다스릴 때 입만 열면 나오는 말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란 소리였다. 하지만 천주를 믿는데 장애가 된다면, 임금도 아버지도 그에게는 원수요 마귀였다.

 

그의 아들 정철상(丁哲祥)은 「사학징의」 공초 중 형추문목(刑推問目)에서 심문관이 “어려서부터 사학에 물들어서 네 아비 정약종의 악행을 도왔고, 심지어 집에 있을 때는 네 조상의 제사에 참배하지 않았다”고 추궁하자, 정철상은 “저는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종대부(從大夫)께서 사학을 금지하며 신부에 대해 바른대로 고하라는 뜻으로 송곳으로 찔렀지만 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글 속의 종대부는 정약종의 숙부 정재운(丁載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재운은 정철상의 조부 정재원의 친동생이지만 정지열(丁志說)에게 출계(出系) 되었다. 종손(從孫)을 송곳으로 찔러가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대라고 추궁하는 모습에서, 정약종이 목이 잘려 죽은 뒤 갈 곳이 없어 마재로 돌아온 정약종의 가족들에게 집안의 무지막지한 폭력이 행사되었음을 보여준다.

 

 

개가 웃을 말

 

정인혁(鄭仁赫)의 공초에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집안과 지속적인 갈등을 빚는 모습이 보인다. 정인혁은 1791년 형조에 붙들려 갔을 때, 부친과 형이 같이 끌려갔다. 아버지와 형은 형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금지하여 끊게 하고, 친척들이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어도 오히려 더 깊이 믿어 어찌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정작 정인혁 본인은 천주교에서 제사를 크게 그르다고 가르치므로 영원히 폐기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정흠(韓正欽)은 최후진술에서 “사당을 헐고 제사를 폐하고도 오히려 천당과 지옥에 일찍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죽는 것을 사는 것과 같게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대중을 미혹시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재신(李在新)의 형추문목에는, 그가 주변 사람에게 사학을 권유할 때 제사 문제가 걸림돌이 되자, “사학하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만약 제사를 안 드리면 남이 지목하는 바가 되므로 어쩔 수 없이 사당에 절은 하는데, 이른바 허배(虛拜), 즉 헛절이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훈수하는 얘기가 나온다. 일부 눈가림용의 위장술을 슬쩍 권하기도 한 셈이다.

 

반면 남필용(南必容)은 형조에 올린 초사에서 “산 사람은 음식을 몹시 즐겨도 영혼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부모의 영혼이 분명히 흠향하실 것을 안다면, 비록 집을 팔고 몸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또한 풍성하게 차리고 넘치도록 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허사인 줄을 알기에 과연 정성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사학을 하지 않는 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진실로 죄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학을 하는 자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 또한 도리입니다”라고 하며 정면 돌파했다.

 

형조와 좌우포청에서 천주교인들을 잡아다가 문초할 때 첫마디는 늘 패륜멸상(悖倫蔑常)과 이적금수(夷狄禽獸)의 도리를 꼽았다. 그 주된 근거 또한 언제나 제사 거부였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나열(羅烈, 1731~1803)이 1790년에 지은 「서학(西學)」 시에서 “서학은 천주를 위주로 하여, 부모를 빈 병처럼 여기는구나. 자신을 병 속 물건처럼 보거니, 따른 뒤엔 병에 무슨 정이 있겠나(西學主天帝, 父母視空甁. 自同甁中物, 脫來甁何情)”라고 지적한 데서 보듯, 그들에게 육신을 준 아버지는 잠시 몸을 담고 있던 빈 병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가짜 아버지는 잠시 몸을 빌어 태어난 것일 뿐이고, 진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천주여야만 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에게 이런 모진 말과 행동을 하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겠다니,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었다. 개가 웃을 말이었다.

 

바깥 사람들은 점차 제사 여부를 그가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번은 궐내에 숙직 중이던 이가환에게 집에서 제삿밥을 보내왔다. 함께 숙직하던 승선(承宣) 임제원(林濟遠)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대 집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천주학을 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제사를 지내느냐고 비아냥거린 내용이다. 「눌암기략」에 나온다. 그전 이승훈과 권철신의 예에서도 보듯 진산 사건 이전에도 제사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지만, 진산 사건 이후로 이 문제는 더 이상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가출하는 동생과 통곡하는 형

 

강세정의 「송담유록」에는 제사 때만 되면 가출하는 아우들의 이야기가 두 차례 나온다. 먼저 홍교만(洪敎萬, 1737~1801)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정약종의 집안과 혼인을 맺었고, 권철신과는 내외종간이었다. 서종제(庶從弟) 홍익만(洪翼萬, ?~1801)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온 집안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천주교를 믿었다.

 

“성품이 몹시 편협한지라 미혹됨이 더욱 심하였다. 서울에 들어오면 그의 큰 형님 집에 여러 날씩 머물렀는데, 부친의 기일을 만나면 그때 임시해서 포천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학에서는 제사를 지내면 마귀가 와서 먹는다고 해서 제사의 예를 폐한다. 그 백씨가 힘껏 붙들어도 듣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이 사람의 심술을 빠뜨림이 이와 같았다.”

 

그의 큰 형은 한성판윤을 지낸 홍주만(洪周萬)이었다. 내둥 서울서 지내다가, 아버지의 기일만 되면 제사를 피해 포천 청량면(淸凉面)에 있던 제 집으로 슬며시 돌아가 자리를 피하곤 했다. 홍주만이 통곡을 하며 붙잡아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송담유록」에 거의 똑같은 기록이 하나 더 있다. “충주의 사족인 이최연(李最延)과 이기연(李箕延, 1737~1801) 형제가 권일신에게서 배워 오로지 사학(邪學)에 마음을 쏟았다. 그의 큰 형인 이세연(李世延, 1721~1797)은 근후하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다. 한번은 부친의 기일이 되었는데, 두 아우가 참석하지 않자 이세연이 통곡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앞서 홍교만의 기록과 짜 맞춘 듯 똑같다. 큰집 제사에 천주학을 믿는 동생들은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큰형이 통곡으로 만류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것까지 판박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14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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