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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36: 자책하는 인간, 최해두

133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1-25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6) 자책하는 인간, 최해두


“만일 이 모양으로 죽게 되면 어찌 한심하고 가련하지 않겠는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한 후 경상도 흥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최해두는 자신의 배교를 크게 뉘우치고 통회하며 참회록이자 교리학습서인 「자책」을 남겼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벽동의 천주교 조직과 최해두

 

최해두(崔海斗)는 정광수의 벽동 집과 담장을 잇대고 살았다. 반대쪽에는 조섭(趙燮)이 살았다. 최해두는 윤유일을 통해 입교했던 여주 출신 양반의 후예였다. 명도회원으로 활동했던 윤유일의 숙부 윤현(尹鉉)은 아내 임조이(任召史)와 함께 안국동에 살았다. 최해두는 그 윤현의 사위였다. 윤현의 집에 같이 살다 검거된 심낙훈(沈樂薰)은 윤현의 셋째 딸을 며느리로 삼았던 사돈 간이었다. 심낙훈의 여동생 심아기는 동정녀로 포도청에서 맞아 죽었다.

 

여주 사람 정광수는 윤현의 동생 윤선(尹)의 딸 윤운혜 루치아와 결혼했다. 동정녀 윤점혜는 윤운혜의 언니였다. 정광수의 여동생은 동정녀인 복자 정순매 바르바라이다. 여주 일원의 천주교 핵심 그룹이 통째로 똘똘 뭉쳐 서울의 한복판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여러모로 특기할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최해두의 숙부이자 원경도 요한의 장인 최창주(崔昌周)는 여주에 있다가 붙들려 가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아비의 이름까지 잊었다”고 한 패륜으로 지목되고도, 끝내 전향을 거부하다가 박해 초기인 1801년 3월에 처형되었던 인물이다. 최창주의 딸 최조이는 신태보의 며느리였다.

 

최해두는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자신이 사학에 입교한 것이 16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1785년에 입교한 초기 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어울렸던 사람이 정광수, 조섭, 윤현, 정약종, 이현, 이희영, 이재화, 심낙훈, 홍시호, 황사영, 최창현, 홍문갑 등이었다고 진술했다. 이들 면면만 보더라도 최해두의 당시 교회 내부에서의 위상이 짐작된다.

 

「사학징의」에 따르면, 그는 1801년 2월 숙부 최창주가 경기 감영에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장인 윤현의 집으로 피신했다. 장인마저 잡혀가자, 이곳저곳을 떠돌며 숨어다니다가, 부친 최창은(崔昌殷)이 아들 대신 끌려갔다는 소식에 하는 수 없이 자수했다. 부친 최창은도 천주교 신자였다. 최해두가 자수했을 때 벽동의 천주교 조직은 중심인물들이 모조리 끌려가서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다. 최해두는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아 조직을 재건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첫 번째 공초에서 그는 맥없이 천주교가 이적금수(夷狄禽獸)의 법임을 알았으므로, 뉘우쳐 깨닫고 바른길로 돌아와 어진 백성으로 살겠다며 배교를 선언했다.

 

그는 당시 포도청이 파악한 조직 계보에서 중심인물이 아니었고, 반성의 태도도 진실해 보였으므로, 정광수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세 차례 모셔다 미사를 드리고 사학을 주변에 권면한 죄를 물어, 1801년 5월 10일에 경상도 흥해(興海) 땅으로 유배 가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어찌 한심하고 가련치 않으랴!

 

하지만 흥해로 유배 간 최해두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흥해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유배 간 지 5, 6년째 되던 1806년 무렵 아버지의 부고가 도착했다. 감옥의 죄수들과 시답잖은 음담패설로 노닥거리는 사이 신앙심이 흐려져 있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종이를 구해 신앙의 기억을 더듬어 한 자 한 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록이 저 유명한 「자책(自責)」이다.

 

글은 “두루 심난 답답하여 두어 줄 글을 기록하니, 슬프고 슬프도다”로 시작된다. “나는 이미 입교하여 근 20년을 죽기로 봉사하다가, 시절이 불행하여 성교(聖敎)의 간군(艱窘), 즉 박해가 크게 일어났다. 평일에 열심히 봉사하여 실공(實功)을 세운 이는 오주 예수를 본받아 치명대은(致命大恩)으로 다 돌아가시고, 나처럼 무공무덕(無功無德)하고 유죄유실(有罪有失)한 인생은 썩고 썩어 신유년 우리 동국의 신앙인에게 상으로 내리신 그리 흔한 치명대은에 참예치 못하고 나 혼자 빠져나와 이 흥해 옥중에 남은 목숨이 붙어살았으니 이 무슨 일인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책선(責善)을 권면하던 벗도 없고, 한마음으로 책려(策勵)하도록 일깨워 주던 책도 한 권 없었다. 그리하여 “만일 이 모양으로 죽게 되면 주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영원 무궁세에 비할 데 없는 참된 복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심하고 가련치 않겠는가?”라며 가슴을 치면서 아프게 통회했다.

 

 

초기 교회의 교리학습서

 

막상 최해두의 「자책」을 읽어보면, 스스로를 자책하는 내용은 서두의 잠깐뿐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각종 기도문과 전례서, 그리고 「십계」, 「경세금서(輕世金書)」와 「칠극」 같은 교리서의 내용에서 간추려, 천주교인들이 죄과에 빠지지 않고, 천주의 가르침을 지켜나가는 방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교리 교육용 책자에 더 가깝다. 글 한 줄 한 줄이 모두 근거가 있고, 그때그때 필요한 기도서나 교리서를 인용하며 논지를 펼치고 있어서, 최해두의 만만찮은 신앙 내공이 그대로 느껴진다.

 

「진복팔단(眞福八端)」, 「회죄경(晦罪經)」, 「조과경(早課經)」, 「경세금서(輕世金書)」, 「십계」, 「칠극」 등이 「자책」 속에 인용되거나 설명하고 있는 서목(書目) 들이다. 이밖에 「성교절요(聖敎切要)」에 보이는 하등통회(下等痛悔)와 상등통회(上等痛悔)의 개념을 끌어오고, 삼구(三仇)의 용어도 풀이했다. 「척죄정규(滌罪正規)」, 「회죄직지(悔罪直指)」에서도 통회의 방법과 태도에 대한 기술을 끌어왔다. 최해두는 본문 중에서 “나도 평생에 치명 성인전 보기를 좋아했다”고 적고 있고, ‘셩젼성ᄉᆞ (聖傳聖事)’의 한 대목을 인용하거나, 기도문의 한 대목 또는 성인전의 한 예화를 끌어오는 등 다양한 인용을 글 곳곳에 포진시켜 내용을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자책」의 중반 이후는 십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다만 제6계까지의 내용만 있고, 그마저도 쓰다가 중간에 끝이 났다. 현재 「자책」은 한국교회사연구소 본과 호남교회사연구소 본 등 2종이 있다. 이 2종 필사본의 모본이 된 원본의 제6계명 이후 부분이 낙장되었던 듯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칠극」의 예화를 여러 차례 인용한 점이다. 이는 앞서 말한 초기 교회에서 「십계」와 「칠극」을 연계하여 신자들의 교리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최해두는 「칠극」에서만 대여섯 곳 이상 예화를 끌어왔다.

 

예전 한 음란하고 방탕한 여인이 잘생긴 남자에게 음행을 청하자, 남자가 ‘그렇다면 시장 한가운데로 가서 하자’ 하였다. 이에 여인이 ‘남 보기에 부끄럽다’ 하니, 남자가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부끄럽고, 천주와 천사가 환히 봄은 부끄럽지 않은가?’ 하자, 여인이 크게 뉘우쳐 음란한 행실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칠극」 권6 「방음(坊淫)」편 제7화에서 그대로 따왔다. 부부가 언약하여 동정을 지킨 대목은 권6 제43에 나오는 성녀 체칠리아의 이야기이고, 한번 계집의 등을 만지고 돌로 가슴을 찧은 사람 이야기도 권6 제42의 삽화에 등장한다.

 

음탕한 남자가 회개한 뒤 길을 가다 전에 간음하던 여자를 만나 모른 체 지나가자, 여자가 ‘나를 모르느냐?’고 물었고, 남자가 ‘너는 옛날의 너 그대로이고, 나는 반성하여 고친 사람인데 내가 너를 어찌 알겠느냐?’ 했다는 예화도 권6 제24화에 그대로 보인다. 수도자가 제자 여럿을 데리고 길에서 미녀를 만나, 주고받는 마지막 쪽의 대화 또한 「칠극」 권6 제25화에 실린 현자 사바(撒拔)의 이야기에서 끌어온 것이다.

 

최해두가 옥중에서 책 한 권도 없다고 했으니, 「자책」에 실린 수많은 예화와 조목별 설명 또한 최해두의 평소 기억 속에서 호출해낸 것이다. 이로 보아 최해두의 교리 지식은 여전히 녹슬지 않은 상태였다. 책에서 설명하고 훈계하는 방식은 초기 교회에서 일반 신자들을 가르치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최해두의 「자책」은 신유박해 이전 교회 지도층 인사의 신자 교리 이해 수준과 전교 방식을 살펴보게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인 셈이다.

 

 

하느님의 종 최영수 필립보

 

최해두는 글에서 남은 가족에 대해 얘기하며, 칠십 노친과 청춘 약처(弱妻), 담발(髮) 치자(稚子), 즉 70세의 노모와 젊고 여린 아내, 그리고 더벅머리 어린 아들을 걱정했다. 그 더벅머리 어린 아들이 바로 하느님의 종 최영수(崔榮受, 1791∼1841) 필립보이다. 최해두가 흥해로 귀양갈 때, 아들은 11살이었다. 그는 10세 때 부친에게서 십계명을 배웠다고 했다. 더벅머리라 한 것으로 보아 최해두가 「자책」을 쓸 당시 최영수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던 듯하다. 몇 해 뒤 최해두가 흥해 옥중에서 사망했을 때, 최영수가 어린 나이에 그곳까지 찾아가서 부친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최영수가 10살 때라고 썼지만 사실과 다르고, 1807년 언저리가 아닐까 추정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신앙의 씨앗은 고난 중에서 싹이 꺾이지 않고 자라나, 최영수는 38세 때부터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해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에게서 양조 기술을 배워 익혀, 직접 미사주를 빚기까지 했다. 1841년 4월 초에 체포되어 아버지를 이어, 혹독한 고문과 오랜 옥살이 끝에 1841년 9월 10일에 무려 100대의 곤장을 맞고 순교하였다. 그는 죽기 전 “어찌 집안 대대로 믿어오던 천주를 배반하고, 부친의 가르침을 어길 수 있느냐(矣家傳來之敎, 則何可背天主, 而棄父訓乎?)”라 하며 배교를 거부하고 죽었다. 아버지의 ‘자책’을 답습하지 않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24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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