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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관한 성찰: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40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6

[죽음에 관한 성찰]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삶과 죽음에서 우리가 읽어 내는 의미는 단 하나의 빛깔일 수 없겠으나, 통상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죽음의 연관어에는 슬픔, 이별, 고통 그리고 두려움 같은 것들도 포함되겠지요. 이 글에서는 그중 죽음과 두려움의 관계를 ‘죽음의 확실성과 불확실성’이라는 동시적 역설을 키워드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죽음,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동시성

 

철학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죽음은 증명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진실입니다. 존재했던 생물체는 모두 그 공통의 운명을 겪었으며, 첨단 생명공학의 시대에도 그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의과학이 하늘을 찌르는 오늘날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서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동시성이라는 역설로 남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떨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증가했을까?

 

‘근대사회에서는 죽음이 터부시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두려움의 양이 증가했다고 봐야겠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는 좀 더 엄밀한 관찰과 진단이 필요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여기서는 두려움의 양적 변화보다는, 죽음이 두렵다 또는 두렵지 않다고 하는 이유들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 온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전통 사회에서 죽음은 전쟁, 기아, 전염병, 짧은 평균수명과 높은 영·유아 사망률 등으로 매우 ‘일상적’이었고 대단히 ‘폭력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 자연의 섭리나 신의 뜻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여겨졌으며, 인간은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실한 앎’은 죽음을 더욱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하나의 기제였음이 분명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또는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삶과 죽음에 대한 ‘앎과 믿음’은 근대 초기에 다시 한번 그 저력을 드러냅니다. 다만 이제 죽음은 자연의 섭리나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했습니다. 근대의 매우 성공적이었던 믿음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거의) 모든 리스크가 합리적으로 통제되고, 사회적으로 보장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이제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산업과 의과학 발전에 대한 신뢰, 각종 보험과 보장 제도,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결코 인간의 실존적 문제, 죽음과의 직면을 대체하지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도 않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왜, 무엇을 두려워하랴

 

한편 또 다른 근대적 사유의 경향이 더 자리한 힘을 발휘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어도 그렇다고 말하는 다수의 등장이 이를 말해 줍니다. 이들을 니체가 쓴 의미의 ‘위버멘쉬’(ubermensch, 초인)라고 보긴 어렵다는 생각입니다만, 아무든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울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확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시도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불확실성이란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하는 두려움의 원천이 아니라 사고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할 ‘어떤 것’입니다. 설명, 예측 가능한 세계는 죽음으로써 끝이 나므로 이들에게 죽음은 이해와 설명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의 사유는 인간적 성숙, 합리성 또는 종교성보다는 죽음이 무(無)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무로 인식된다면 말입니다. 근대인은 죽음을 의식적으로 성찰할 문제나 과제로서 떠올리지조차 않게 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었다. 죽음에서 임종으로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정말 사라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죽음이 무화되면서 임종 과정(dying)이 새로운 두려움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죽음은 ‘질환과 임종 과정’에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제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암이나 치매로 대표되는 만성 퇴행성 질환이며 그에 따르는 장기적 임종 과정입니다. 근대인은 죽음 그 자체보다 오랜 임종 과정에 수반되는 육체적, 정신적(고립감, 외로움, 상실감, 무기력 등) 고통에 훨씬 더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듯 보입니다.

 

임종 기간의 급속한 장기화와 친숙한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유리되어 병원이라는 관료제적 조직에서 홀로 죽어 가는 상황의 증가를 염두에 둔다면, ‘구가팔팔이삼사’라는 비교적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망은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임종의 문제로만 소통 가능한 죽음

 

그러나 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소망은 다른 한편 우리 사회의 한 구조적 특징으로도 이해됩니다. 곧 삶과 죽음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둘 사이의 상호 이해가 되지 않고 죽음이 의식의 지평으로 떠오르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죽음의 문제는 ‘연장 가능한 삶과 통제될 수 있는 임종 과정’으로 변용되어야만 소통 가능하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임종만이 현재적이고 경험될 수 있으며, 조정과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오릅니다. 의식 체계에 떠오르지도 않는 죽음을 사람들은 느낄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문제조차 되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은 더구나 아닙니다.

 

 

죽음 ‘그 너머’에 대한 소통의 가능성과 필요성

 

확실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의 동시적 원천이었던 죽음의 역설적 위치는, 이로써 그가 발휘해 왔던 힘과 능력은 이제 상당 부분 그 광채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죽음의 확실성은 논의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불확실성은 임종에 대한 고민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것이 ‘그 너머’(beyond)에 대한 사회적 소통 가능성을 잃어버린 근대사회가 ‘선택’한 죽음 소통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그 너머’의 문제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기에 우리가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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