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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66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2-23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상)


헛간 빌려 시작한 공동체

 

 

-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창설자 성 카르멘 살례스.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제공.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서 자신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로 밝혔다. 이 사건들은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창설자 성 카르멘 살례스(1848~1911)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어린이들의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심고 싶다는 열망의 토대이기도 했다.

 

당시 19세기 유럽은 다양한 변화 속에 혼란한 모습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영향으로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세속적인 것에 중심을 뒀다. 사회 계급에도 변화가 생겨 교회와 귀족은 힘을 잃고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가 형성됐다. 사회주의의 선동과 무정부주의자들 활동으로 노동자들의 조직이 발전했다. 내란과 테러로 불안감이 감돌았고 콜레라도 창궐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 교육 체제는 붕괴됐고 이로써 어린이와 젊은이, 특히 여성들은 교육 혜택을 받기가 어려웠다.

 

교회의 어려움도 컸다. 정부는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런 억압 가운데서도 시대 요구에 따라 사회복지나 교육에 투신하는 많은 수도회가 창립됐다.

 

184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카르멘 살례스는 수도 성소를 원해 성체 흠숭 수녀회에 입회했으나 카리스마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서원 전 수도회를 나왔다.

 

그러나 매춘 범죄에 빠진 탈선 여성들의 선도에 힘썼던 이 수도회에서 성인은 탈선 여성들의 삶에서 어릴 적부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여기서 ‘습관이 두 번째 본성을 형성한다’는 기본적인 직관을 얻었다. 이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예방 교육이라는 새로운 사명으로 연결됐다.

 

이후 성인은 영적 지도신부의 인도에 따라 영보 도미니코 수녀회에 입회해 20여 년간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무지한 아이들과 청소년을 교육하는 사도직을 실천했던 이 수녀회는 시국의 혼란으로 문서상으로 인준받지 못한 상태였고 도미니코회 제3회 형태로 운영됐다.

 

그런 가운데 교사와 원장으로 일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던 그는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사건 속에서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892년 3명의 다른 수녀와 함께 수녀회를 떠났다.

 

그해 10월 15일 스페인 부르고스에 도착한 성인은 12월 7일 부르고스대교구 도움으로 학교 개교를 허락받았다. 수녀들은 다음날 12월 8일 원죄 없으신 마리아 색상인 푸른색과 흰색 수도복을 입었다. 빌린 헛간에서 의자도 없이 탁자 한 개를 두고 감자 몇 개로 저녁 식사를 했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첫 공동체의 시작이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2월 21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중)


여성과 어린이 교육 위해 헌신

 

 

- 어린이들의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과 성모님 사랑을 심고 싶다는 카르멘 살례스의 열망은 현재 전 세계 16개국 400여 명 회원들을 통해 이어진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제공.

 

 

공동체 시작 후 어려운 상황임에도 카르멘 살례스는 곧바로 동네의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 영혼 안에 하느님을 심어주는 교육을 시도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화사한 꽃 같은 어린이가 우리 담장 안에 있습니다. 부지런한 정원사처럼 밤낮으로 그들을 보살핍시다. 좋은 교훈이나 유익한 충고로 그들을 교육하고 모든 덕과 성실의 향기를 스며들게 합시다.”(1909년 5월 30일 편지)

그는 부지런한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참된 보살핌이라고 여겼다. 이런 표양을 성모 마리아에게서 찾았고, 또 성모 마리아가 그들을 돌보기 위해 필요한 힘과 덕행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정원사가 정원에 핀 작은 꽃도 허술하게 다루지 않고 그 고유한 향기를 맡듯이, 또 화려한 조화에서 결코 볼 수 없는 화사한 아름다움을 자신이 가꾼 꽃에서 찾듯이 카르멘 살례스는 자신의 정원 안에 핀 영혼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는 또 “청소년들은 하늘의 한 조각이며, 하느님 자비하심의 피뢰침”이라며 “학생들의 심한 장난과 귀찮게 함은 우리에게 영광을 얻게 해 준다”고 했다.

 

1893년 4월 16일 교구의 회헌인가와 함께 네 명의 수녀가 처음 서원했고 카르멘 살례스는 총장에 임명됐다. 이후 1908년 9월 19일 성 비오 10세 교황으로부터 교황청 인가를 받았다.

 

카르멘 살례스는 1911년 마드리드에서 선종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6년 그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1998년 복자품에 올렸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2년 그를 시성했다.

 

‘교육은 사랑이다’는 창립자 유산을 이어받은 회원들은 삶의 매 순간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신 원죄 없으신 마리아를 이상과 원형으로 바라본다. 이로써 항상 삼위일체적 친교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자 한다. 아울러 하느님 섭리에 대한 깊은 신뢰 안에서 용기와 희망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며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산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세상 구원에 협력하기 위해 장래 희망이며 사회 개척자들인 어린이, 청소년들을 악에서 해방시킨다. 또 교육사도직을 통해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데 힘을 쏟는다.

 

카르멘 살례스가 삶을 마친 뒤 수도회는 교회의 선교 정신에 입각해 전 세계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19세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통찰하고 어린이들의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과 성모님 사랑을 심고 싶다는 카르멘 살례스의 열망은 현재 전 세계 16개국 400여 명 회원들을 통해 이어진다.

 

2000년에는 수도회 카리스마를 나누고 영성을 살아가는 평신도 모임이 스페인에서 출범돼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2월 28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하)


교육 통해 하느님 사랑 심어

 

 

- 2019년 8월 아시아 관구 평생양성모임 관계자들이 서울 정릉 본원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제공.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는 1892년 스페인 부르고스에 학교를 세운 후 1912년 브라질, 1953년 일본 등에 선교사를 파견해 이미 선교 정신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교회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1954년 12월 비오 12세 교황 승인을 받고 이름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수녀회’에서 지금의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로 변경했다.

 

일본 진출 후 30년이 흐른 1983년, 일본 공동체를 방문한 총장 카르멘 베르날 수녀 및 총 참사회 관계자들은 마침 일본 분원을 찾았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총장 수녀를 만났고 이때 한국에서의 활동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후 1983년 12월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공식 초대장을 받아 1984년 4월 12일 3명 수녀가 한국 땅을 밟았다.

 

노틀담 수녀회 기숙사에서 지내며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한 수녀회는 서울 불광동성당 옆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하고 1985년 2월 한국의 첫 공동체를 시작했다. 1986년 한국인 세 명이 입회하고 스페인에서 세 명 선교사가 합류하는 등 공동체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으나, 인력 재정적인 면에서 교육 사도직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불광동본당 주임 정의채 몬시뇰 도움으로 유치원 교육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성소자가 생기며 수녀회는 양성소 설립의 시급함을 느끼고 1989년 서울 정릉에 수련소를 마련해 회원 양성과 여대생 기숙사로 활용했으며 1995년 첫 한국인 수녀의 종신서원식을 거행했다.

 

사도직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서울 불광동본당 유치원 졸업생 대상으로 토요학교를 개설하는가 하면 방과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도 시선을 돌려 정릉 수녀원 인근에서 공부방을 시작했다. 또 지방에서 온 여대생 기숙사로 쓰던 수녀원의 공간을 일부 개조해 어린이집을 열었다. 2000년 의정부교구에 첫 공동체를 마련했으며 2012년 수원교구에도 진출했다.

 

수녀회 선교 정신에 따라 1990년대 말부터 일본과 필리핀에 회원을 파견한 한국공동체는 일본, 필리핀, 한국이 아시아 관구를 형성하고 한국인 회원 수가 늘어나자 더 많은 한국 회원들을 외국으로 보냈다. 2021년 현재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페인에서 11명 수녀가 선교 중이다.

 

25년간 운영한 서울 정릉 여대생 기숙사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2014년 청소녀 양육 미혼모와 학교 밖 위기 청소녀들을 위한 자오나(자캐오가 오른 나무) 학교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수녀회는 ‘자오나 청소년센터’를 등록해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회가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싹을 틔운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는 각 시대 환경 안에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교육을 통해 돕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3월 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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