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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행동하는 평신도: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교회 소공동체

17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10-28

[외침특강 - 행동하는 평신도]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교회 “소공동체”

 

 

2020년 외침특강은 참된 깨달음은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으로 성서, 교의, 영성, 실천신학 등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대담을 통해 평신도들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더욱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소명을 재발견하기 바랍니다.

 

6월에는 서울대교구 도봉산 본당 주임신부이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목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만나봅니다. 늘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는 소공동체. 구역·반 모임의 소중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신앙을 키우고 실천해갈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소공동체의 매력을 되새겨 봅니다.

 

 

삶의 자리로 내려온 말씀

 

*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사도 2,46)라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소공동체.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소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소공동체는 한국교회에서 1991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어요. 소공동체는 ‘작은 크리스천 공동체 Small Christian Community’ 또는 ‘기초 교회 공동체 Basic Ecclesial Community’를 의미하지요. 구역·반 중심으로 모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교회 공동체’가 더 맞는 의미입니다. 본당이나 교구 신자들의 기초 영성이 튼튼해지도록 도와주는 모임이지요.

 

본당에서 성가 연습을 열심히 하고 레지오나 빈첸시오 활동을 열심히 해도 기초 영성이 부족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단체 활동이 끝나고 나면 신앙생활마저 막연해지고 때로는 냉담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구역이나 반모임에서 하는 소공동체는 나의 신앙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고, 이웃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초 교회’가 됩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존적 회의를 느꼈고 세속화의 물결 앞에 선 인류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죠.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고 있는 정신을 삶의 현장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의회에서는 4개의 헌장을 선언했는데, 그 선언이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이 바로 소공동체이지요.

 

4개의 헌장은 전례, 교회, 계시, 사목 헌장인데 각각의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있죠. 전례 헌장은 미사 전례 안에서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의 일치예요. 교회 헌장은 친교의 공동체를, 계시 헌장은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사목 헌장은 세상 속에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소공동체 안에는 이 모든 키워드가 다 모여 있어요.

 

공의회에서 제시한 보편교회의 모습이 구체적 삶의 현실에 들어와 숨 쉬고 있는 거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웃과 나누는 친교는 초대교회의 모습이에요. 공의회가 추구했던 교회의 원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기에 삶 안에 들어온 보편 교회가 바로 소공동체이며, 소공동체는 가장 가까운 나의 교회입니다. 소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나면 소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게 되어요.

 

 

* 소공동체라는 작은 단어 속에 이렇게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줄 미처 몰랐네요. 우리가 잘 느끼지 못했더라도 소공동체 모임을 통해 이룬 성과들도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글을 읽지 못하는 시골의 할머니도 함께 모여서 복음을 듣고 묵상하고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죠. 아주 오랫동안 근대까지도 성경은 배운 사람,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당신의 말을 듣던 많은 사람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죠.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모두 행복해진 사람들이었죠.

 

소공동체 모임에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글을 아는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듣고 외칠 수가 있어요. 이런 복음 묵상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도 있지요. 프로그램을 만든 아프리카의 ‘룸코 사목연구소’의 오스왈드 히르머 주교는 공의회에서 큰 역할을 한 칼 라너라는 신학자의 제자예요. 주교는 가장 가난한 나라인 남아프리카로 가서 주민들과 함께 하며 스승과 공의회 정신을 잘 살리고자 만든 것이죠.

 

또 다른 성과는 소공동체 모임을 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신자가 성경을 안 읽었어요. 이것은 혁명적인 변화인데, 우리 어머니도 묵주기도만 열심히 하시다 돌아가셨지요. 교회에서도 성경을 읽어라, 펼쳐라 강조하지 않았어요. 소공동체 모임을 통해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성경을 읽게 했고 찾을 수 있게 했고 묵상하며 나눌 수 있게 했어요.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도하며 본당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게 한 것도 어마어마한 변화죠. 이러한 성과는 세계교회 어디에서도 쉽지 않다고 보아요. 소공동체는 신자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이 살아나게 하는 모임이에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자발성을 키워준 것도 큰 성과 중의 하나라고 보아요.

 

 

* 산업화로 인해 현대사회는 거주지의 이동도 잦고,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경제적인 차이 등으로 이웃 간의 괴리감도 큰 것 같아요. 세대 차이를 많이 느끼기도 하고요. 꼭 거주지에 따라 모임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가톨릭에는 속지법과 속인법이 있지요. 본당은 속지법에 속합니다. 본당이 속지법을 따르지 않고 예를 들어 어떤 신부의 능력대로 신자들을 모아서 본당을 만든다면 아마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해요. 언변이 좋거나 사교성이 좋은 신부는 많은 신자를 모을 수 있고 신자들도 자기 또래의 마음이 맞는 사람들로만 모임을 할 수 있지요. 속지법 안에서 저는 도봉산 본당의 주임신부이지요. 신자든 비신자든 도봉산 본당의 관할구역은 다 제 사목의 영역이 됩니다.

 

평신도들도 세례를 받으며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받지요. 특히 평신도들이 받은 사제직은 보편사제직이에요. 본당을 부여받은 사제처럼 자신의 구역과 반에서 사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소명이 있어요. 구역과 반이라는 소속이 없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신경 안 써도 되죠. 그러면 도와주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가난한 사람을 놓치기 쉬워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처럼 부자는 최고급 차에 명품 옷과 가방을 들고 성당 가서 전례하고 돌아오지만, 자기 옆에 사는 가난한 이는 못 보는 거죠. 이렇게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구렁이 놓이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거리라는 거죠(루카 16,19-31 참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가장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일상의 삶 안에서 함께 만나야 해요. 말씀을 나누고 묵상하며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달아 가는 거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잘난 사람들이랑 자꾸 만나고 싶지 가난한 이들이랑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시죠. 가난한 이들과의 친교가 사라지고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우리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같은 위선자가 되어가는 거죠(마태 23,27).

 

저는 30년 가까이 장애인 친구들과 매달 한 번씩 만나서 소공동체 모임을 하고 있어요. 아직도 자기들 본당에서 하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가면서 모이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그들도 다 사는 곳이 있는데, 말을 조금 불편하게 하지만 못하는 것도 아닌데 ….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모여야 하는 것이 마음 아파요.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데 우리는 외면하고 있는 거죠.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소공동체

 

* 본당 안에서도 소공동체 모임이 잘 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지역이 있지요. 레지오나 성가대, 사목회 등과 같은 활동과 겹치기에 현실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공동체들의 공동체 Community of Community 그리고 공동체들의 친교 Communion of Community 라는 말이 있어요. 공동체를 이루면서 함께 만나는 공동체이죠. 단체는 그 자체로 결속력이 있어요. 단체 활동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기쁘고 잘 운영될 수 있죠. 사실 소공동체는 결속력이 약하고 일상의 삶이기 때문에 평범하지요. 구역장이나 반장을 맡은 이의 개인적 역량에 따라 활성화의 차이가 나기도 하고요.

 

그러나 소공동체는 밭갈이하는 거랑 똑같다고 봅니다. 전체 밭이 다 잘되면 무엇을 심든 잘 자라게 되죠. 감나무도 잘 자라고 사과나무도 잘 자라고요. 한국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기초 영성 교육을 어디서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 소공동체에서 해야 할 몫이지요. 이웃들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기도한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난한 이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요.

 

소공동체가 잘 되는 지역을 살펴보면 그 지역의 연세 드신 분들이 굉장히 안정감을 느끼며 행복해하세요. 내가 기댈 곳이 있고 말을 할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깨어 있는 기초 영성이 튼튼해진다면, 단체 활동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 교회 안에서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요, 소공동체가 좀 더 활기 있게 운영되고 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요.

 

저는 사목 연구를 오래 해 왔기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공동체를 힘들어할까 고민해보았는데 세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첫째는 소공동체가 하나의 본당 하부 조직처럼 운영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본당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준비하고 노동하는 일을 자주 맡기죠. 노인대학 밥해주기, 영명축일 행사, 본당 청소 등. 그런데 소공동체는 이런 일보다는 지역 안에서 말씀을 통한 선교가 최우선이에요. 본당의 기초영성을 책임지는 곳인데 이렇게 본래의 소명과 다르게 행사의 노동력으로만 불려 다니니까 사람들이 기쁨도 없고 쉽게 지치는 것 같아요.

 

둘째는 복음 나누기 방법의 문제를 말하고 싶어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라고 자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요. 죄를 잘 성찰하고 통회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죄의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안타까워요.

 

예를 들어 복음나누기를 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물을 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마태 18,21-22). 그러면 신자들은 예수님께 빠지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바라보죠. 그러면 기쁨이 없어요. 죄의식을 안겨주거나 부정적인 대화가 오가는 공동체는 결국 깨지고 맙니다.

 

이것을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해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해요.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시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삶 그 자체입니다. 내가 이렇게 뻔뻔하게 살아가는 것도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이구나! 이렇게 느끼도록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윤리 교과서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잖아요. 그런 예수님을 복음 나누기에서 만나면 소공동체 모임이 행복합니다. 행복하니까 바쁘고 힘들어도 모여요.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 힘을 받지요.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지죠. 말씀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묵상도 해보면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요.

 

세 번째는 사제의 영성과 리더쉽이 필요합니다. 소공동체의 신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성숙해가려는 마음이죠. 사제의 영성은 혼자 기도하고 혼자 성숙하는 것이 아니에요. ‘직무를 통한 성화’라는 말이 있듯이 사제들도 사목 현장에서 신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함께 할 때 성숙해 갈 수 있어요. 이 세 가지가 잘 어우러질 때 소공동체는 그 빛을 환하게 밝힐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소공동체가 더욱 뿌리내리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체크체크] “소공동체”

 

성체성사로 일치를 이룬 이웃과 말씀 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소공동체. 주체적으로 본당 활동에 참여하는 소공동체. 내 이웃의 아픔을 살펴볼 수 있는 소공동체는 선택의 자리가 아니라 필수적인 자리다. 신자들은 소공동체를 통해 말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 인해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는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

 

*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 1995년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명동 보좌신부를 거쳐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레지스 칼리지에서 영성을 공부했다. 서울대교구 복음화 연구실과 통합사목연구소 대표로 활동했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한국가톨릭 사목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봉산 성당 주임신부이며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그래, 사는 거다!」 등의 저서가 있다.

 

[외침, 2020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대담 · 글 도희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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