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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5: 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

197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5-04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 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 (상)


모방 신부의 신학생 선발 소문이 돌자마자 “후보자 여기 있습니다”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중ㆍ하순 조선에 입국해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6일 최양업을 시작으로 3월 14일 최방제, 7월 11일 김대건을 데려와 함께 기거하면서 신학생 후보로 양성했다. 모방 신부가 이렇게 신속하게 조선 신학생 후보들을 선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추천한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회에 걸쳐 모방 신부가 신학생 후보를 선발하는 데 힘을 보탠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본다.

 


모방 신부 조선 입국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첫 번째로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서 “1월 12일 자정쯤 조선인 5명을 따라서 변문을 떠나 조선에 입국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 한양에 안착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한국천주교회사 2」는 “1836년 1월 12일 자정에 중국 측 국경 지대인 이른바 ‘변문’을 출발한 그는 사흘 뒤인 1월 15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285쪽)고 한다.

 

같은 편지에서 모방 신부는 의주 변두리에서 6명이 함께 떠나 12~16㎞ 정도 갔다가 말 2필을 끌고 온 교우 2명을 만난 다음, 한양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유방제(여항덕) 신부가 마중 보낸 5명의 교우를 만나 두 무리로 나누어 한양에 입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13명이 말 2필로 중국 땅 변문에서 한양까지 사흘 만에 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 기마대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16일 한양 도성을 통과하기까지 7일이 걸렸다.

 

아마도 ‘3일’은 ‘13일’의 오기가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조선 시대 동지사 일행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일정을 통상 13일에서 보름으로 잡았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입국한 1년 뒤 조선에 들어온 샤스탕 신부도 변문에서 한양까지 15일이 걸렸다. 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 세 소년의 일정도 마찬가지다. 모방 신부를 입국시킨 길 안내자는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이광렬(요한), 마부 조신철(가롤로), 이손빈(섬베, 베드로)이다. 이들은 세 신학생의 유학길을 안내하고, 샤스탕 신부를 입국시켰다. 단 현석문(가롤로)이 유진길을 대신했다. 이들이 군사 작전을 펼치듯 치밀하게 행동했을 것으로 볼 때 모방 신부를 3일 만에 한양까지 입국시켰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넌 모방 신부는 1월 25~27일께 한양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모방 신부는 한양으로 오는 길에 일행에게 조선 교회 사정을 물었다. 일행은 처음엔 “자신은 모른다. 정하상에게 물어보라”고 했고, 정하상은 “유방제 신부에게 물어보라”고 했으나 차츰 조선 교회 사정을 모방 신부에게 소상히 전했다.

 

모방 신부는 한양에 도착한 후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생 선발에 힘썼다. 모방 신부는 같은 편지에서 “제가 후보 신학생을 모집하려 한다는 말이 퍼져서 두 소년이 저에게 보내져 왔습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이 모방 신부가 한양에 도착한 지 10일여 만에 신학생 후보로 뽑혀 한양으로 올라온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신속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하상과 남이관

 

김대건은 1836년 4월 자기 집에서 사목 방문을 온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일성록」 1839년 8월 7일 ‘김제준 공초’, 「추안급국안」 ‘사학모반죄인 양한ㆍ진길등안’ 1839년 8월 13일 ‘김제준 공초’ 참조) 하지만 최양업과 최방제는 누가 신학생 후보로 추천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류한영 신부와 차기진 박사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에서 최양업과 최방제를 신학생 후보로 추천한 이가 “정하상과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방제 신부도 그 이전부터 이들을 신학생 감으로 눈여겨보아 오던 터였다”라고 적고 있다.(61쪽)

 

모방 신부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후동에 있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집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유방제 신부에게 선교 자금을 주어 마련한 집으로 선교사들의 ‘안전 가옥’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던 정하상은 이 집에서 남이관ㆍ조증이(바르바라) 부부와 함께 거주했다. 남이관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처조카이며 정하상과는 친척이었다. 그는 정하상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앞장서던 평신도 지도자였다. 모방 신부는 이 집에서 정하상, 남이관, 이광렬, 권득인, 현석문 등 평신도 회장들과 함께 조선 교회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정하상과 남이관이 신학생 후보 선발에 최고 관심을 보이던 모방 신부에게 신심 깊고 영특한 교회 지도자 자제를 추천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후동 곧 ‘뒷골’은 현재 서울 중구 산림동과 주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살리뭇골’로도 불렸다. 1837년 12월 31일 한양에 도착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이곳에 살았다. 따라서 후동 정하상의 집은 신학생 후보를 양성한 한국 교회 ‘첫 예비 신학교’ 자리일 뿐 아니라 ‘첫 주교관’ , ‘첫 서양 선교 사제들의 은신처 곧 사제관’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입국 이후부터 중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만 3년을 후동 정하상의 집에 살았던 유방제 신부는 1834년 11월 18일자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현재 제가 사는 곳은 그리 좋지는 않지만, 지붕이 있는 집인데 남이관과 정하상 바오로 가족들과 마치 한 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남이관은 그의 아내와, 정하상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고, 2~3명의 여 몸종과 2~3명의 과부가 그들의 부인인척하고 살고 있습니다.…남이관은 큰 형으로서, 정하상은 동생으로서 그리고 저는 내ㆍ외적으로 대리자로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14, 15, 17, 18명이 가끔은 20명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전수홍, ‘유방제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참조)

 

정하상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과 가까운 사이였다. 용인에 살던 김제준은 모방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서울 후동 정하상의 집을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정하상은 또한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김제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따라서 김제준은 자연스럽게 남이관과도 교분이 두터웠을 것이다. 1836년 주님 부활 대축일 이후 모방 신부가 지방으로 사목 방문을 떠났을 때 정하상이나 남이관이 분명 동행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방 신부가 회장으로 있던 김제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들 중 누군가가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을 것이고,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됨됨이를 살펴본 후 그 자리에서 신학생 후보로 낙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2일, 리길재 기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 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 (하)


평신도 지도자들, 세 신학생 후보의 신심과 총명함 알고 앞다퉈 천거

 

 

현석문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후보로 추천한 이들이 단지 정하상, 남이관뿐이었을까? 사실 정하상, 남이관도 모방 신부와 함께 한 집에서 거주했기에 그 이름이 나왔다. 좀더 사고의 폭을 넓혀 당시 기록들의 행간을 읽어보자. 모방 신부는 한양 후동 집에서 정하상, 남이관뿐 아니라 이광렬, 권득인, 현석문 등 평신도 회장들과 함께 조선 교회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이들 중 눈에 띄는 이가 바로 현석문(가롤로)이다.

 

현석문은 역관인 아버지 현계흠(플로로)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자 어머니와 누나 현경련(베네딕타)과 함께 강원도 김성(현 철원군 김화읍 일대)에 있는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은 최양업 신부 일가와 이웃해 2년을 함께 살았다. 또 현석문은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자, 최 신부의 동생들을 거두어 함께 살면서 자식처럼 보살폈다. 최 신부의 첫째 동생 최의정을 공주에서 결혼시킨 이도 바로 현석문이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0회차 최 베드로 증언 참조) 현석문은 최양업의 신심과 총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다.

 

현석문은 또 1834년 중국인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 입국 이후 해마다 가을이면 은이 교우촌을 찾아가 몇 달간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쳤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70회차, 오 바실리오 증언 참조) 이 시기에 현석문은 소년 김대건과 처음으로 대면했을 것이다.

 

현석문은 세 신학생 후보가 유학길에 오를 때 국경까지 배웅했고,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 왔을 때 함께 생활하면서 그를 도왔다. 또 현석문은 김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로 가서 그의 사제서품식에 참여했으며, 순교할 때까지 김대건 신부를 보필했다.

 

아마도 현석문이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하지 않았다면 그는 최양업 신부를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도왔을 것이다.

 

이처럼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가족과 누구보다 각별한 사이였던 현석문이 신학생 후보 선발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앞장서 최양업, 김대건을 추천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민극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바로 민극가(스테파노)이다. 민극가는 인천 출신으로 ‘갓등이’(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교우촌 회장이었다. 갓등이는 최방제가 살던 남양 지역과 인접한 교우촌이다. 그는 갓등이에서 강원도 김성까지 자주 가서 최양업 신부 형제들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다. 당연히 민극가는 최양업 신부 가족뿐 아니라 현석문 가족과도 교분이 깊었을 것이다. 민극가는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부평으로 이주해 살 때도 찾아가 최양업의 집에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0회차 최 베드로 증언 참조) 최양업은 부평에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민극가는 또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양지 은이 교우촌에도 자주 방문했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70회차 오 바실리오 증언 참조) 따라서 그 역시 김대건의 됨됨이를 모를 리 없다.

 

민극가는 신자들로부터 꽤 신망받던 인물이다. 1837년 12월 말 조선에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그의 됨됨이를 보고 교회 땅 관리를 맡길 정도였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마련할 때에도 민극가에게 의지할 만큼 신뢰가 깊었다. 기록은 없지만, 민극가는 세 명의 조선 신학생 선발 과정에 어떻게든 관여했을 것이다.

 

 

명도회

 

여기서 되짚어볼 단체가 하나 있다. 바로 ‘명도회’(明道會)이다. 갑자기 왜 명도회를 꺼내나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명도회를 주목하는 것은 현석문과 그의 아내 김 데레사가 명도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명도회는 1797년께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교리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직한 평신도 지도자 단체이다. 명도회는 회장과 하부 조직인 ‘6회’로 구성돼 있는데 초대 회장이 바로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다. 6회는 3~4명, 5~6명으로 구성된 6개 모임으로, 구성원 모두는 교회 핵심 인물들이었다.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평신도 지도자 대다수가 순교함으로써 침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명도회가 여전히 지속하며 회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또 현석문 부부가 명도회원이었다는 점은 적어도 명도회가 1849년 병오박해 때까지 유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신태보(베드로)와 그의 사촌 이여진(요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이다. 또 이들 외에도 최경환, 김제준, 권득인(베드로), 현석문, 민극가 등이 평신도 지도자로서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기해와 병오년 순교자 80여 명 가운데 권득인 베드로,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최경환 프란치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현석문 가롤로가 제 생각에는 제일 신덕이 굳세고 치명에 뛰어난 줄로 압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차 회기 이 베드로 증언 참조)

 

이들이 현석문처럼 명도회 회원은 아니었을까? 전국을 돌면서 신자들의 교리교육에 힘쓰고 전교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의 활동을 보면 명도회의 목적과 딱 들어맞는다.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인 방상근 박사는 “현석문이 살아 있었고 또 교회 재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유진길도 명도회원으로 추정되는 점, 그리고 1836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교회 재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상황 등은 당시 명도회의 존재와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고 주장했다.(「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156쪽, 한국교회사연구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다음의 글로 명도회의 존재에 힘을 실어준다. “1836년 모방 신부가, 1837년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신자들이 있는 조선의 방방곡곡이 이렇게 하여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회장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고, 어린이 대세와 혼인, 장례, 주일과 큰 축일의 집회,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 한마디로 가장 긴급한 모든 것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 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2<中>권 385쪽)

 

그렇다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은 명도회 회장들이 넓게는 전국의 신자 가정에서, 좁게는 서울 경기 지역 신자 가정에서 신학생 후보로 뽑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고 가정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1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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