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8일 (목)부활 제3주간 목요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가톨릭문화

sub_menu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순례: 노래하며 나아갑시다. 하느님은 우리 행군의 끝이십니다!

196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4-14

[초점_순례] 노래하며 나아갑시다. 하느님은 우리 행군의 끝이십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쩍 ‘웰빙’(well being) 또는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왔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필요와 요청에 따라 자주 회자(膾炙)되는 어휘가 소위 ‘문화’와 ‘영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웰빙’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및 정신적인 측면에서 ‘문화’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영성’이 아니겠는가 자문하면서, 여러 영성 가운데서 오늘 순례 영성의 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피투(被投)된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모험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철학에서부터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을 ‘나그넷길’로 묘사합니다. 또한 성경 역시 인생을 순례의 길에 비유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를 ‘순례하는 교회’(「교회헌장」 49-50항)로 자신의 신원을 정의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물론이고 우리의 체험과 현실을 종합해 볼 때, 인간은 ‘길손’(viator) 또는 ‘여행(여정)자’ 또는 ‘순례자’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경

 

“주님께 정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나그네며 순례자인 우리 인간이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내 영혼이!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시편 63,2) 하면서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주님의 집(성전)에 머물면서 그분의 얼굴을 늘 뵈며 일생동안 살고 싶다는 표현인데, 이 시편의 고백은 신앙생활과 성지순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줍니다.

 

사실 구약시대부터 성지순례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인 성소를 찾아가 그분을 뵙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종교 집회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찾아뵙는 것을 표현할 때 많이 등장하는 히브리말 단어 ‘빅케스’는1) 자주 하느님의 성전(성소)을 순례하는 것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아모 5,4-5 참조).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열세 살 이상의 성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파스카 · 오순절 · 초막절) 성전에 머무시는 주님을 뵙고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순례시편’(120-134편)이라는 제목 아래 시편집에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을 찾아가는 것은, 그곳에 현존하시는 주 하느님을 뵙기 위하여 순례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신약성경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루카 2,41-42)

 

위에서 살펴본 대로 ‘주님의 집(성전)에 한평생 산다는 것’은 충실한 이스라엘인들의 이상이었는데(시편 23,6; 26,8; 27,4; 84,5.11), 루카 복음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나가,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고 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다교에서는 열세 살 때부터 율법 준수의 의무도 있었는데, 구약 시대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전통이 이어졌습니다(탈출 23,14-17; 34,22-23; 신명 16,16). 하지만 그 이전과는 달리,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순례의 의무가 부인들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열두 살이던 예수님께는 아직 이 규정이 적용되지는 않지만, 소년 예수님께서도 열심하신 성모님과 요셉 성인과 함께, 고향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순례의 길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구세주께서도 소년 시절부터 성지순례를 하셨습니다.

 

 

인간, 영원을 찾아가는 ‘순례자’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옛 교부들의 정의 안에서 순례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상을 항해 지상을 여행하고 시간을 걸으면서 영원을 찾아가는 ‘순례자(παροικος)’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을 향해 시간을 걷는 순례자”라는 표현에서, 그리스말 순례자(παροικος)는 ‘~통하여’(παρα)와 ‘집’(οικος)의 합성어입니다. 곧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안락한 내 집처럼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야 하는 하숙생처럼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지상 나그네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 목적도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살다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인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천국의 행복을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순례자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은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뵙기 위한 이 인생 여정을 성경은 황량한 광야 또는 사막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실 한 번밖에 없는 유일회적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유혹과 갈등과 시련도 많이 겪게 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순례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것입니다.

 

노래하며 나아갑시다. 하느님은 우리 행군의 끝이십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주님에게서 떨어져 순례하며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직접 보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Sermo」 21)

 

1)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 장소인 성전(성소)을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잘 알려진 셈족어 어근인 ‘빅케스’는 그 의미도 확실하여 사람이나 물건,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을 찾는 것을 뜻하는데, 성서에서 이 낱말은 무엇인가를 갖는 경우에 찾는 사람과 찾는 대상의 강한 결합, 곧 찾는 행위 안에서 집요하게 찾는 사람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할지어다.”(시편 105,3)에서처럼, 이 표현은 조상(彫像)들로 표현된 자기들의 신들의 “얼굴을 보려고” 오는 순례자들의 행동을 언급하는 다른 셈족어 안에서도 알려져 있다. J.-P. 프레보스트, 「시편의 작은 사전」, 이기락 옮김, 가톨릭출판사 1997, 131-132쪽 참조.

 

* 이기락 타대오 신부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을 받고 89년 로마 성서 대학에서 성서학과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생처장,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학부 총장, 주교회의 사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봄(Vol. 53), 이기락 타대오 신부]


0 1,279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