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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8일 (일)부활 제5주일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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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10-11: 하느님을 닮아감(神化)

105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3-22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0) 하느님을 닮아감(神化) (상)


너울 벗은 얼굴로 하느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 (작품1) 성 아타나시우스: 86.5 x 63cm, 템페라, 크레타 풍, 15세기, 테살로니카. 이단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 확립에 공헌함.

 

 

1. 너울을 벗은 얼굴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로 웃음보가 터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 이야기였습니다.

 

사슴이 거울을 보는 그림 밑에 ‘사슴이 ○○○ 봅니다’라는 문장을 써 놓고 “여기 빈칸에 알맞은 답을 써넣으세요”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짐작건대 ‘사슴이 (거울을) 봅니다’가 정답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빈칸에 ‘사슴이 (미쳤나) 봅니다’라고 쓴 것입니다. 아이고, 당연히 틀렸다고 할 수밖에. 아이의 순수함이 귀엽기만 합니다.

 

그 아이가 시험지에 쓴 답은 틀렸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맞는 답일 수도 있습니다. 사슴이 거울을 보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거울은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사람만이 보는 것인데….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라고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읽으면서, 거울에 비치는 나 자신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내 얼굴도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갈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와 동료들은 내적으로 불타는 열정적인 전교 활동과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을 한 분들입니다. 그들의 영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과 닮아 간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이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바오로 사도처럼 내가 나의 의지를 온전히 주님의 길로 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2. 왜 주님을 닮아야 하는가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은 본디 하느님께서 주신대로라면 자유로운 생명체인데, 본인의 행동으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본인의 양심과 의지로 모든 것을 구분해 생활할 책임이 부여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양심과 의지를 토대로 실생활에서 선악의 갈등 없이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을까? 결국 죽어서 그대로 먼지로 돌아가야 한다면, 생명을 유지할 방법은 없을까? 이제라도 남아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넣어주신 하느님의 영’을 깨달아 ‘하느님과 같은 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을 지향(指向)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막의 교부는 많은 숙고 끝에 모든 사람이 ‘단 하나의 얼굴’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모방할 수 없는 고유의 모습, 그 고유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단 하나의 얼굴’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닮다’ 사상은 동방 교부들이 실천하고자 하는 신학으로 신화(神化) 사상 또는 테오시스(θεοσιs)라 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이 되게 하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을 요약하였습니다. (작품1)

 

신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영, 즉 하느님과 비슷한 형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형상을 자신 속에 거룩히 보존하며, 그 거룩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겸손과 도덕적 윤리적 관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작품2) 고백자 막시무스: 수도원장, 신학자. 그는 닮음(신화, 테오시스)을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에서 비롯한 자비, 사랑, 겸손, 자기 절제 등을 나누어 받는 것으로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따라서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사람이 하느님과 닮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항상 죄의 덤불 속에 갇혀있는데 어찌 죄를 전혀 짓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돌아와 회개를 우선으로 하고, 이에 합당한 신앙생활과 사랑이 동반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1요한 4,7-21 참조)

 

이집트의 사막 한가운데 수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한 수도자가 잘못했는지 그 죄를 단죄한다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원로 수도자 모세는 초청받았지만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내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와주십시오’하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일어나 구멍 난 바구니에 모래를 담아 등에 걸머지고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를 기다리던 수도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사부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은 죄들이 등 뒤로 흘러 떨어지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형제의 죄를 재판하러 이렇게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자들은 죄지은 수도자를 단죄할 수 없었습니다. 죄의 판단과 단죄와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요한 8,3-11 참조)

 

인간은 본래 하느님 은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죄로 말미암아 인간 내면의 하느님 모습이 손상되어도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 원래의 성스러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백자 막시무스(580∼662)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가 대속1)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죄로부터 해방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신화론의 근거가 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즉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처럼 닮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과 감사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작품2)

 

그러나 그 부활은 거저가 아니고, 먼저 본인의 십자가를 통하여, 즉 밀알이 썩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요한 12,24-26) 마지막 날,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보여주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즉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그리스도의 부활이 왜 기쁠까요? 그분께서 산 위에서 미리 보여주신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처럼 나도 그 빛을 받아 부활하리라는 것은 정말로 환호할 일이 아닌가요!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닫힌 존재가 아니라, 항상 신과의 관계에서 상호 소통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각주 1) 남의 죄에 대해 대신 속죄함.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17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1) 하느님을 닮아감(神化) (하)


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하늘 향해 팔 벌리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 [작품1] 십자가 처형 : 템페라, 85 x 52cm, 1500년경,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디오니시 작품, 여기서 키를 크게 그린 것은 거룩함,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 즉, ‘하느님과 닮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콘 그림 중간에 천사가 붉은 옷을 입은 자를 십자가 쪽으로 밀어 신약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고, 다른 쪽의 천사는 이제 구약이 끝났으므로, 구약을 밀어냄을 표현하고 있다. (이사 43,18-19, 2코린 5,17)

 

 

3. 서 있는 모습을 왜 길게 그릴까

 

사람들은 큰 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키 크는 약을 먹거나 운동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크려고 노력합니다. 독일 유학 시절, 집 도배를 하려고 건축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카트가 식료품 마트 것보다 더 크고 무거웠으며, 바퀴가 잘못 돌려져 있으면 어느 한 방향으로 돌아가 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물건을 싣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카트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버려 빨리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힘을 주어 돌리려고 하는데, 계산대의 뚱뚱하고 키 큰 아줌마가 성큼성큼 와서는 카트를 돌려주면서 한마디 하였습니다.

 

“아유, 작은 동양 남자가 끌기에는 이 카트가 너무 무겁지”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 나도 남자인데 이 정도도 못 할까 하며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키가 크면 우선 높은 선반에 있는 음식을 몰래 꺼낼 수 있고, 건방진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내려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콘은 물론이고 일반 성화도 사람 눈높이보다는 약간 올려서 걸 필요가 있습니다. 성화는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을 내려다볼 수는 없으니.

 

사람은 서서 위를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또한, 기도를 노래로 부르면서 찬양도 하고, 둘이서 맞추어 이중창을 부르기도 합니다. 여럿이서 합창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악기로 화음을 넣어가며 더욱 아름답게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피조물의 본능으로 동물적인 면도 있지만, 지성으로는 원리를 깨닫고, 그 원리를 찾기도 하며, 거룩한 분을 향해 감사하기도 합니다. 사람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신이 존재함을 알고 내면적으로 그분과 대화도 하고, 그분을 향해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넓으면 웅장함을, 높으면 숭고함을 느낍니다. 이콘에서 키가 크다는 것은, 그 사람을 더 높인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특별히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서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웃으며 사물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노래도 합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기도하는 자세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국어사전에는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표현합니다. 성스럽다는 것은 ‘거룩하고, 고결하여 엄숙하다’고 해석합니다. 성스럽다, 위대하다, 고결하다, 엄숙하다는 표현은 하느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보이지 않는 전체적인 분위기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그 닮음은 인간의 의지(뜻)와 하느님의 의지가 서로 통해야만 가능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375?~444)에 의하면 의지가 통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비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께서 자기 비움과 낮춤으로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 사건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을 닮으려는 길로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지극히 거룩한 표본이 되었습니다. [작품1]

 

이콘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정면의 모습’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또한, 몸체를 길게 표현하여 등장인물들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아울러 그 모습은 하느님과 많이 닮아있는 성덕의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었지만, 신약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하느님의 선하신 사랑과 성스러움, 거룩함, 고결함, 엄숙함을 표현합니다.

 

 

4. 탈 물질화를 위한 구성

 

먹을 갈아 대나무를 그린다면 초록색이 없으니 잘못된 그림일까요? 초록빛이 없어도 그런 그림을 보면, 눈 내린 고향 초가집이 떠오릅니다. 댓잎으로 돛단배를 만들어 실개천에 띄웠던 추억에 잠깁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무언가 느끼게 합니다. 그 그림을 통해 내용과 그 어떤 무엇을 유추하게 됩니다. 이럴 때 사실적 표현보다는 어떤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림(형상 언어)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성스러운 표현을 위해서 이콘은 독특한 형상 언어를 사용합니다. 옷과 사물을 그릴 때 직선(直線)과 호(弧)와 평면(平面)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이나 자연 등 모든 물질을 탈 물질적으로 표현합니다. 탈 물질은 눈에 보이는 자연 상태 모습에서 직선이나 호·평면을 사용하여 명암을 표현하면서 앞서 말한 먹으로 그린 대나무처럼 물질에서 얼마간은 벗어나는 형태입니다.

 

한 예가 이전에 설명했던 ‘블라디미르 성모님’ 이콘의 한 부분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아기답게 한 손은 어머니의 목을 감고 어머니와 뺨을 맞대고 있습니다. 그분의 옷은 수난을 상징하는 갈색이며, 거룩하신 분을 상징하는 금사(金絲)로 짜여 있습니다.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레 접혀 구겨진 옷자락을 둥글게 표현하지 않고 모두 직선 또는 꺾인 직선으로 표현하였고, 반사하는 빛은 직선의 금선으로 찬란한 명암을 표시합니다.

 

 

[작품 2] 블라디미르 성모님 이콘 부분

 

 

성모님은 검은 자주색의 겉옷(마포리온)을 입고 있습니다. 자주색은 여왕을 상징합니다. 머리 부분에 자연스레 접힌 수건 모양의 옷자락 끝에 갈색의 끝동이 있습니다. 금사로 수놓인 부분은 둥글게가 아니라 직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어깨에서 팔뚝으로 내려진 마포리온에는 금사로 화려하게 장식한 끝동이 있고, 금으로 만든 장식 사슬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굽이치는 끝동 옷자락이 모두 직선으로 꺾여 연결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소매 부분에서 밑으로 내린 긴 옷자락은 직선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깨와 머리 부분의 별 무늬는 성모님의 동정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작품2]

 

 

[작품 3] 성 요한 세례자 이콘 부분

 

 

성 요한 세례자가 문서를 들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옷 주름을 보면 허리에서 하체까지 직선이나 호(弧)처럼 완만한 둥근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엉덩이와 고관절 부위, 하반신 부위의 넓은 부분의 명암을 네모 또는 세모진 평면으로 세 단계 즉, 밝음, 중간 밝음, 어두운 단계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속 옷은 낙타 털옷으로 검푸른 색이고 두 가닥의 흰빛으로 명암을 표시하였습니다.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의 입체감도 자연의 바위가 아닌, 평면으로 나뉘어 바위의 명암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작품3]

 

이러한 표현은 보기에 따라서 인간이 육체적·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표현에서 벗어나 좀 더 가볍고 약간은 반 투명한 느낌과, 보다 영적(靈的)이고 단순하면서도 정돈된 느낌이 들게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24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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