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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7일 (수)부활 제3주간 수요일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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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66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4-09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상)


하느님 자비 체험한 성 프란치스코, 부유한 상인 아들이었지만 환시 체험 후 완전히 변화

 

 

- 프란치스코 성인이 호노리오 3세 교황으로부터 수도 규칙을 인준받는 장면. 작은 형제회 제공.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고 하느님 복음을 선포하라’.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창설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1208년 5월 14일 성 마티아 축일에 낭독된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을 들음으로써 자신이 걸어가야 할 성소의 길을 확신하게 된다. 성인은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고,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라고 외쳤다. 또 이 말씀처럼 애긍을 청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는 삶을 산다.

 

성인은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도시가 형성되고 상업이 발달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귀족처럼 자랐다. 당시 기사는 평민 신분을 벗어나 귀족 계급에 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기사의 꿈을 키우던 성인은 전쟁에 참여해 1205년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원정군에 합류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스폴레토 계곡에서 주님의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온다.

 

이후 평범한 생활을 하던 성인은 이전에 그렇게나 싫어하던 한센인을 만나 입을 맞추고 끌어안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심리적인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님께서는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그렇게 참회를 시작하게 하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한센인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떠날 때, 나에게 불쾌하게 보였던 것이 영혼과 육체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한센인을 만난 체험 후 성인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결정적인 회개 생활로 들어간다. 그리고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할 때,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는 주님 음성을 듣고 무너진 성당을 수리한다. ‘허물어져 가는 집’이 회개하지 않는 인간과 타락한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인간의 마음과 교회 재건을 위해 세속을 떠나 일생을 투신한다.

 

그의 삶에 감동받은 동료 형제들이 생겨나게 됐고 성인은 그들과 함께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희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또 동료들이 늘어나면서 간단한 생활양식을 기록해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구두로 인준받았다.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 불릴 수도회의 설립이었다. 호노리오 3세 교황은 1223년 11월 29일 칙서로 수도 규칙을 인준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4월 4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중)


‘보다 더 작음’을 끊임없이 추구

 

 

-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작은 형제회 제공.

 

 

수도회 인준 후 작은 형제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1219년 돗자리 총회에는 수천 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성인은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기도를 반복해 바침으로써 수도 생활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을 열어주었다.

 

이로써 작은 형제회는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인본주의 사상과 더불어 유럽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하나의 혁명처럼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서구 문명의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성인의 회개 생활은 1224년 라 베르나(La Verna)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해 십자가 현양 축일 즈음 프란치스코의 몸에 오상(五傷)이 신비적으로 새겨졌다. 신비 작가들은 이를 ‘프란치스코의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표현하고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묘사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동료 형제가 요한복음 수난기를 낭독하는 가운데 선종했다. 회개 이후 성인의 전 생애는 ‘알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갔던’ 생애로 정리된다. 성인은 1228년 7월 16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수도회 명칭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는 프란치스코가 지향한 영성의 주춧돌이 ‘작음’(minoritas)과 ‘형제성’ (fraternitas·하느님 앞에 모두가 동등한 형제라는 특성)에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작음’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단어 미노리타스는 ‘미노르’(minor)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됐다. 이 형용사는 ‘파르부스’(parvus, 작은)의 비교급으로 ‘더 작은’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성인의 글에도 여러 번 언급된다. 그의 영성 안에서 ‘보다 더 작음’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표시다. 그런 면에서 이 단어는 궁극적으로 ‘없음’과 ‘무’(無)를 지향하는 성인의 신비적인 언어 표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성인은 자기 자신, 세상,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작음’을 철저하게 추구했다. 이는 하느님의 신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신비다. 그는 작음의 신비를 놀랍도록 깊이 관상한 작음의 명수였다.

 

작음의 신비는 ‘벌레 영성’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성인은 죄악에 물든 인간의 처지를 벌레라고 규정한 뒤, 십자가의 그리스도도 수난을 겪으면서 벌레로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고 주장한다.

 

또 성인은 인간이든 피조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관계없이 우주 안에 숨어있는 신비를 관상하는 가운데, 모든 피조물과 삼위일체적으로 일치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형제성을 강조했다.

 

사랑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과 맺어지는 신비적 관계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그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사람과 우주가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우주적으로 하나 되는 삼위일체적이고 우주적인 형제성을 추구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4월 11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하)


다양한 사도직으로 복음적 삶 증거

 

 

- 2017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산청 성심원에서 열린 돗자리 총회 중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작은 형제회 제공.

 

 

프란치스코 성인의 선종과 시성 후 수도회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 많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수도회가 점차 커짐에 따라 순례자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탁발 영성으로의 복귀 문제도 대두됐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리와 통합을 거쳐 현재의 세 개 수도회 즉 ‘작은 형제회(OFM)’,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OFM Conv)’,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 Cap)’가 생겨났다. 작은 형제회는 현재 120여 개 나라에서 약 1만 3000여 명 회원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으로 사도직을 펼치고 있다.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14일 일본에 파견돼 있던 캐나다 성요셉 관구 소속 도요한(Jean-Joseph Deguire), 배쥐스탱(Justin-M.Bellerose) 선교사가 부산에 입국하면서 이뤄졌다.

 

대전에 첫 수도원을 설립하고 1938년 12월 15일 축복식을 거행한 이들은 대전 목동본당 사목을 하면서 성소자 발굴과 양성, 유치원과 주일학교 사목에 주력했다. 또 재속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해 지도했다. 추가로 회원들이 더 파견돼 활동을 벌였으나 1941년 일본과 캐나다의 전쟁으로 전쟁포로가 되기도 했고,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의 존립이 끊기는 사태도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배쥐스탱 수사는 다시 한국에 입국해 대전 수도원을 복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이탈리아 선교사들의 진출로 남쪽 지방에서 본당 사목과 사회사업이 시작됐다.

 

1963년 이 아폴리나리스 수사가 한국의 총장대리(Delegatus Generalis)로 임명돼 입국한 후 서울 정동에 수도원이 설립됐고, 이어서 스페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주문진본당 중심으로 사목을 벌였다. 멕시코 선교사들도 전주교구에서 활동을 준비했다.

 

한국 총장대리구는 1969년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회원들을 통합해 준관구가 됐으며 1987년 12월 10일 마침내 한국순교성인관구로 승격됐다.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인 회원들의 활동은 주로 본당과 사회복지 시설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점차 교육, 출판, 선교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2017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기념한 한국관구는 전국에 17개 수도원과 3개 분원을 두고 있다. 전국 5개 본당과 2개 준본당, 1개 공소에서 사목을 펼치고 있으며 노인복지시설, 노인요양원, 지적장애인 등을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외 탈북이주민 생활시설, 교육센터, 피정 시설 운영 등으로 복음적 삶을 증거하고 있다. 위원회들을 중심으로 한 탈북이주민 사목과 ‘정의·평화·창조질서 보전’ 활동, 프란치스칸 연구소를 통한 다양한 학문 연구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이주민 사목 등도 전개하고 있다. 회원 수는 초기 양성자를 포함해 167명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4월 18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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