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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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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30: 동정의 시선에서 일치와 형제적 관계성을 일깨우다

154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2-23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동정의 시선에서 일치와 형제적 관계성을 일깨우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서로를 향한 동정의 시선에서 일치와 형제적 관계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림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러시아의 이콘 작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에 묘사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미지를 보게 되면 이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 감지할 수 있다. 연약하고 겸허한 모습으로 묘사된 세 위의 모습과 서로를 향한 동정(compassion)의 시선, 세 위가 들고 있는 가냘픈 지팡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유학 시절에 소 논문을 지도해주었던 밥 스튜어트 신부(Fr. Robert Stewart, OFM)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당시 그 형제는 근육암 진단을 받고 두 번에 걸친 수술 후 항암 치료를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필자의 귀국 2년 후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 형제로부터 소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제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뜬금없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나도 너와 같이 아시아 사람 얼굴을 했다고 생각해!”라는 말이었다.

 

당시 필자는 그 형제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경험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냥 미소만 지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가 받고 있던 고통이 그로 하여금 그런 동정의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은 했었지만, 그가 필자에게 보내 준 투병 체험기 「생존을 넘어서-Beyond Surviving」; 「암이라 불리는 형제-A Brother called Cancer」를 읽고 번역하면서 그의 그 동정의 마음을 좀 더 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글의 일부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몹시 괴로워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어느 밤, 나는 부드러운 달빛이 그림자를 드리워 어슴푸레 보이는 십자가를 응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게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 친숙한 구절, 즉 칼 라너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상 위에 걸어 놓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의 죽음에 나 자신을 놓고는(그렇게 희망한다) 이렇게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축복이라는 신비의 여명이길 바란다.’

 

내 체험의 수준에선 처음으로, 천천히 나는 프란치스코가 사랑하는 분과의 친교를 나누었던 방법인 고통의 신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도를 바치면서 나는 주님을 알고, 그분의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이 아픔으로 느껴졌는데 동시에 뭔가가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내적 삶에 있어 뭔가가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모든 활동과 관심과 계획이 덜 긴급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암세포가 나의 영혼을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절대로 ‘생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체험은 살아남는다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체험을 더듬어 보면서, 나는 ‘그 단어는 아니야!’라고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최근 어느 날 아침, 하나의 표상이 떠올랐고, 나는 그것이 ‘암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체험을 명명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아마도 내가 프란치스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암이라는 이 형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부정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 그제야 나는 나의 암 진단에 대해 개방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면서도 침착할 수 있었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몸에 악성 종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도 했고, 또 그 진단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해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주 전에야 비로소 나는 이 암이 ‘형제’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나의 이 형제는 내게 올 때 내게 분노를 느끼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까지도 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내 혈육의 친동생과는 같지 않았다. 이 형제와 사랑의 관계는 고투와 고통을 함께 겪게 했기에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이 형제는 때로는 두려움과 의혹 때문에 나에게 배척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삶에 정확하게 들어와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기에 내 세상에 의미를 만들어 준 나의 ‘형제’가 된 것이다.

 

수술 한 달 후 나는 방사선 치료사를 만났다. 그 첫 번째 만남에서 그는 나에게 이 특별한 타입의 심각한 근육암은 대개는 재발하거나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몸 전체에 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처럼, 종양 주변의 살이 깨끗이 아물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재발과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단히 공격적인 방사선 치료를 계획하였다. 암 형제의 현존이란 초대하지도 않았지만 내 몸에 침투해 분노를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다음 몇 주 동안 이 형제는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으며 그는 프란치스코가 말하듯이 ‘내게 있어 아주 쓴’ 것을 볼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2월 21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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