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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계산본당 명도회의 조직과 그 운영: 명도회 회록을 중심으로

140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6-20

계산본당 명도회의 조직과 그 운영

- 명도회 「회록」을 중심으로 -

 

 

국문초록

 

본 연구는 계산본당의 청년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실체를 추적했다. 1910년대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은 명도회 회의록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첫 작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드망즈 주교 일기』 등 관련 사료들을 참고하여 이 단체의 조직과 목적, 회원구성과 회원 명단, 그 실제 운영, 구성원의 교회 내의 활동을 보았다.

 

명도회는 로베르 신부가 결성한 청년단체인데, 단체 결성 이듬해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나서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이 단체를 확대 전문화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엘리트 청년’들을 뽑아서 훈련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익히고, 능력을 계발하고 서로 힘을 모아 공동활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첫째, 명도회는 대구대목구에서 교회가 인정한 최초의 청년단체이다. 그들은 상세한 『규칙서』를 지녔고, 회합 때마다 이를 공부하면서 『규칙서』에 준해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도회관이란 전용 모임 장소와 사무실을 갖추고 자치적으로 활동했다. 또 명도회는 기본 자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이식(利息) 사업이나 사회복지 사업을 했다.

 

둘째, 명도회는 총회와 평의회로 구별되고, 총회 밑에 전교부, 음악부, 교풍회 등 여러 개의 부서가 있었다. 임원들 임기는 1년인데 회장, 부회장, 총무와 부총무, 회계, 서기, 도리강사, 지도강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 간사 3명, 평의원이 15명 정도 있었고, 사무실을 지키는 상비원이 있었다. 임원들은 전부 회원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셋째, 명도회는 명예회원과 일반회원이 있었으며, 청년회라 불리면서도 15세부터 60세 넘는 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명도회 인원은 90명 정도인데, 10년 동안 「회록」에 나오는 이름을 통해 약 120여 명의 회원을 파악할 수 있다. 5회 이상 결석한 회원은 제명되며, 입회 지원자는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입회할 수 있다. 회원은 입회금을 내고, 매월 월회비를 냈다.

 

넷째, 명도회 회원들은 서로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 형성된 인맥, 또 이들이 세운 협성학교나 해성학교와 서로 인연이 닿아 있었다. 특히 회원들은 혼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대구의 첫 신자인 김현상 집안과의 혼맥으로 서상돈, 김찬수, 김종구 등이 한 계열이고, 서상돈의 동생인 서상정의 집안과 최정복, 정준수 등이 또 한 계열이다. 개화 인사인 이일우와 이근우가 육촌간이며 이근우는 김현상 집안으로 다시 서상돈과 연결된다. 유흥민은 서상돈의 데릴사위이다. 이외에 이들은 대모, 대자 등의 신척(神戚)으로도 엮여있었을 것이다.

 

다섯째, 명도회원들은 신심함양과 선교를 목적으로 부단히 훈련했다. 그들은 평균 2주일에 한번 정도 회합을 가지며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회원 간 상호부조 등으로 신앙을 키웠다. 교풍회를 통해 회원들은 상호 좋은 생활규범을 지키도록 서로 권고했다. 모임에서는 주교 강론 등을 듣고, 성경을 읽고, 신앙적으로 민감한 주제들을 토론하며 직면한 사건들에 대해 회의를 했다. 회원들은 이렇게 훈련하며 선교에 주력했다. 전교회장의 설치는 그 대표적 예이다.

 

한편, 우리는 명도회 운영을 통해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침이 평신도를 적극 등용하고 그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명도회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단체였으며 단체의 자주권도 주교가 지향하는 방향에서만 허여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Ⅰ. 이끄는 말

 

최근 대구 경북지역의 3·1운동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 청년단체가 부각되었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대구의 3·1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8일과 10일에 개신교 측에서 시작되었고, 이 여파가 경북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실제 대구 천주교회 측에서는 3월 5일 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으며, 3·8시위에는 이남숙과 해성학교 학생들, 3·10시위에는 이덕주를 비롯한 계산본당 신자들이 함께 했다. 나아가 천주교회 쪽에서 따로 3월 9일 거사(擧事)를 계획했었다. 즉 천주교회는 3·1운동 당시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또 지속적으로 행동했다.1)

 

그런데 이 과정에서 드러난 거사 참여자 11명 중, 신학생 2명과 해성학교 졸업생 1명을 제외한 8명 전원이 계산본당 명도회(明道會) 회원이었다.2) 게다가 그들은 모두 명도회 내에서 주도적인 인사들이었다.3) 계산본당 명도회는 1910년 결성되어 1920년까지 존속한 대구대교구 최초의 교회 공인 청년단체이다.4)

 

대구에서 천주교회는 박해시대에는 큰 세력이 없었지만, 개화기를 맞으면서 서상돈을 비롯한 천주교회 인사들이 독립협회 대구지회 결성, 사립학교 창설,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해 나가면서 큰 영향력을 끼치며 사회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결국 애국계몽 단체와 연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인맥이 집결되어 명도회로 모였다. 그리고 계산본당 청년들은 1910년대 명도회를 바탕으로 외부활동을 펴나갔다.5)

 

그러나 본 명도회에 대해서는 교구 통사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왔을 뿐, 그 실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된 적이 없다.6) 명도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952년 발간된 최정복의 『대구천주교회사』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문고판 230쪽으로, 주로 교회 초기 인물과 제 단체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청년단체에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1986년 출간된 『대구본당 100년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책의 편찬위원 중 윤광선이 월간 『빛』에 교회사의 주제별 해석을 시도하면서 명도회의 관련 부분을 취급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2012년 대구대교구 100년사인 『사랑과 은총의 자취』에 그대로 반복되었다.7)

 

지금까지 명도회에 대해 소개된 내용은 명도회 조직 초기의 모습일 뿐이거나 초기 자료에 대한 부분적 해석이다. 더욱이 드망즈(Demange, 1875-1938, 安世華) 주교가 공문으로 밝힌 명도회에 대한 계획과 실제 운영상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도 주로 첫 계획 공문의 내용에 기초하여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명도회는 드망즈 주교를 총재로 추대하고 회장 서병조, 총무 이근우, 평의장 김찬수 등이라고 하면서 10년 임원진을 소개해 왔다.8) 심지어는 “총재 안주교, 회장 서병조(해방시까지 재임 13년), 총무 겸 지도강사 이근우 재임 5년”9)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명도회의 초기 회장은 서병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서상돈이었다. 명도회 10년 동안 총회 회장은 서상돈, 김상진, 서호경, 서병조로 이어져 왔다.(<표1> 참조) 결론적으로 명도회는 초기 상황에 대한 사료적 소개 외에는 10여년 존속하는 동안의 구체적 활동이나 그 실체적 모습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구대교구 사료실에는 명도회의 회의록이 보존되어 있다. ‘會錄 二号, 1912년 7월 14일’이라는 표지 하에 1912년 7월 14일부터 1920년 10월 16일까지의 회의가 기록되어 있다.(이하 이 자료를 「회록」이라 칭한다)10) 이는 양면 괘지 세로줄 양식에 페이지 당 10줄씩 230면 분량의 국한문 필사본이다. 실제로, 한국교회에서 100여년 전의 청년단체 기록이 이처럼 체계적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처음이다.11) 또한 이 회의록은 아직 정식으로 분석된 바가 없다.12)

 

한편, 명도회 「회록」은 같은 시기 자료인 드망즈 주교의 일기와 상호보완된다. 드망즈 주교는 때로 명도회에서 회의를 하고 메모를 남겼다.13) 반면에 명도회에서는 다른 행사를 하면 회합을 하지 않고 이로써 회의를 대신했는지 그날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회의 일정이 잡혀있다가 행사로 대신 한 날의 활동은 주교의 일기나 그의 사목보고서를 통해야 알 수 있다. 나바위에 명도회 지부를 설치하는 일14) 영친왕이 역을 지나므로 명도회원들이 역에 나가거나15) 주교의 강연으로 회의가 대치된 때16) 등이 그런 사례이다.

 

본고에서는 이 「회록」을 철저히 분석하고, 『드망즈 주교 일기』 등과 대조하며 명도회 역사를 추적하겠다. 명도회의 결성 과정과 목적, 조직, 임원과 회의 운영, 회원구성 등 실제 운용의 제반 상황을 조명하고 이어 명도회의 특성과 변화 등을 보겠다. 다만, 이 단체의 프로그램 운영격인 청년들이 자신을 연마하고, 사회에 펼쳤던 활동은 원고를 달리하여 다룬다. 이는 본고의 분량이 넘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명도회원들의 활동이 3·1운동이나 항일운동으로 집중되는 과정과 사회에 끼친 영향 등 보다 일반사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명도회는 대구대목구 차원의 첫 공식 단체이며 또 당대 지역 핵심 가톨릭 인사들이 모두 집합되었던 단체이다.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에 큰 기대를 걸고 적극 운영에 나섰으며, 나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17) 또한 명도회의 활동에는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의 사목 방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명도회의 운영실태와 그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대구대목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연구는 이후에 형성되는 많은 청년단체들을 연구하는데 유익한 정보가 될 것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청년들이 추구한 이상과 역량, 추진해 온 사업들, 이후에 일어나는 청년연합 운동의 성격과 상호 영향 등을 파악하는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Ⅱ. 명도회 결성과 목적

 

교회 내에서 민족의식의 태동을 주동한 사람과 이에 연계되어 깨어난 사람들이 명도회로 모였다. 우선, 명도회 결성의 이유와 목적, 그 구성 등 체계적인 부분을 살피겠다.18)

 

 

1. 명도회 조직과 목적

 

명도회는 1910년 로베르(Robert, 1863-1922, 金保錄) 신부의 지도하에 시작된 청년단체이며 명칭은 처음부터 ‘명도회’였다.19) 이때는 계산성당 신자들이 선봉에 서서 전국적 호응을 얻었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한 직후였다. 대구에는 일본 상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단체의 결성이 나름 어떤 결단의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로베르 신부는 단체의 설립 취지나 지향하는 바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이들이 단체를 만들어 매 주일 모여서 교리를 공부하고, 서로 협심하여 외교인들이나 이단자들에게 성교회를 전하기 위해 활동한다고 했다.20)

 

이듬해 대구교구가 설정되자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를 직접 운영했다.21) 6월 26일 대구에 도착한 드망즈 주교는 약 두달 뒤, 교구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한 첫번째 사목방문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알리는 공문의 부록에 새로운 단체에 대한 설립 의도와 계획이 실려 있다.22)

 

37세의 젊은 주교는 대구대목구 신자들이 신앙면에서 수동적이며 자기 구원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자들의 교리 지식이 얕음도 염려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외적 공동활동을 하지 않으며 공동 연대감도 희박하고,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23) 주교는 이러한 염려스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골라, 그들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달성하기 쉬운 목표를 제시해주자고 제의했다. 주교는 평신도에게 조직을 만들어주어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며 그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따라서 드망즈 주교의 명도회 설정 목표는 분명했다. (1) 회원 자신과 회원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을 증진시킨다. (2) 자선사업과 회원 각자의 활동을 통해 미신자와 개신교 신자에게 사도직을 수행한다.24) 즉, 명도회관 개관일 벽에 써 붙였던 ‘연구와 전교’가25) 그들의 목표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2. 명도회의 대상

 

명도회는 청년단체이다. 로베르 신부나 당시 이를 보고받았던 뮈텔(Mutel, 1854-1933, 閔德孝) 주교는 명도회를 가톨릭 청년단체라고 불렀다.26)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 설립 공문에서 그 전 해에 ‘청년’들로 조직된 회가 있다고 했다. 주교는 일기에도 “한 가톨릭 청년회가 지난해 부활절부터 ‘명도회’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름만을 존속시키기로 하고 그 회의 지도를 맡았다.”27)라고 적었다. 또 주교는 명도회관을 가톨릭청년회를 위해서 짓는다고 했다.28) 그는 1917년 성모동굴을 조성하면서 성모께 드리는 감사에 가톨릭청년회관을 지은 것도 꼽았다.29) 주교는 명도회 행사를 가톨릭 청년의 축제, 청년들의 연극30) 등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이때의 청년이란 개념이 오늘날과 다름을 볼 수 있다. 1912년에 명도회원 피정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1>을 보면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회에서는 이들을 청년회로 인식했다. 실제로 주교가 공문에 구상한 준비분과, 활동분과, 노년분과를 통털어 보면 15세 이상부터 50세가 넘는 거의 전 연령이 포함되는 단체였다. 활동분과만 떼어낸다 하더라도 20세에서 50세까지에 해당한다.31) 한말 식민시기의 청년은 오늘날과 같은 연령적 개념이 아니라, 그 시대를 담당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고 근대의 주체로서의 ‘청년’과 ‘청년운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음은 논의된 바 있다.32) 이에 부합하는 구체적 사례가 된다.

 

물론, 명도회가 전 연령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실제 주도적으로 활약한 사람들의 나이는 젊다. 서상돈(1849-1913)은 1910년 명도회가 조직될 때 이미 60쯤 되는 나이였지만, 이근우(1872-1932)는 38세였다. 참고로 드망즈 주교는 1875년생으로 이근우와 비슷한 연배였다. 그 이하는 젊은이라 할만한 사람들인데, 김찬수(1882-1952)33)는 1910년 당시 28세, 김하정(1890~1951)은 약 20세, 정준수(1888~1957)는 22세였다. 이덕주는 1919년 시국사범으로 체포되었을 때 23세라 하였으니34), 그는 1896년생이 아니면 그 1년 전후 출생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이덕주는 1910년에 약 15살, 혹은 14살이었을 것이다. 한편, 유흥민은 대구대목구 유흥모 신부의 동생이었다.35) 유흥모 신부는 1894년생으로36) 1910년에는 16살, 혹은 17살이다. 그러므로 동생 유흥민은 1910년에 14-15살 정도로 이덕주와 거의 또래였을 것이다. 정준수의 사촌인 정문수(1895-1964)도37) 또래이다.

 

유흥민과 이덕주와 같은 젊은이들이 명도회가 출발할 때부터 입회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1912년 5차 회의에서 15세부터 18세까지의 청년 입회안이 의결된 것을 보면,38) 거의 초기부터 이들 연배들이 명도회에서 활동했다고 하겠다. 더욱이 위의 예로 든 사람들이 젊은 나이임에도 명도회 내에서 맹활약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김하정은 총무로 여러 해 활동했고, 토론 패널이나 성경을 설명하거나 토론주제를 만들어내던 이였다. 유흥민과 이덕주, 정준수 등은 사찰, 평의원 등으로 선출되었다. 정준수는 회장 유고시에 회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39)

 

따라서 당대 교회사에서의 청년이란 일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해방 후 대구대목구에서 가톨릭청년연합회를 조직했을 때 회장은 당시 55세인 김하정이었다. 청년을 수십년이 지난 오늘의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청년들의 활동과 역량을 보다 넓게 평가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청년회는 자신들의 회보로 「천주교회보(현재의 가톨릭신문)」를 발간할 정도의 힘과 역량을 가진 이들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청년’이라 불리운 사람들의 역할과 그 역량에 대해 보다 광범위하게 보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한편, 명도회 구상 공문에서 드망즈 주교는 개신교의 그리스도 청년회처럼 출중한 남성 신자들을 뽑아 회(會)를 구성하자고 했다. 즉 ‘일할만한 능력있는 사람’들을 뽑아 기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신교의 그리스도교 청년회’란 표현에 의거하여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는 이유를 ‘개신교 청년회를 의식한 것’이라거나40) 개신교의 청년단체를 본떠서 명도회를 조직했다거나 혹은 개신교 청년회의 활동이 왕성한 것처럼 그런 단체를 원했다고41) 이해해 왔다.

 

한편, 필자는 드망즈 주교의 ‘개신교 그리스도교 청년회’라는 표현은 개신교처럼 ‘출중한 남성신자’들을 뽑자는 의도였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때는 이미 명도회가 출발하여 그 조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교는 바로 뒤이어 새 단체의 조직은 철저히 하나여야 하며 총재는 주교가 담당하고, 각 본당 신부들이 지부를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개신교에는 전 교파를 넘어서거나, 전체 교회를 아우르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

 

Une Société composée de l’élite de la Chretienté masculine, quelquechose comme la “Yeung Men Christian Assoication” protestante, ayant son centre au centre de la mission, sous la direction immédiate de l’évêque, et ramifiée dans tout le Vicariat, sous la direction de chaque missionnaire, avec une unité extérieure assez active pourrait tendreà la réalisation de ce but.42)

 

위의 자료에서 방점 가운데 넣은 줄친 부분(‘개신교의 그리스도 청년회가 그런 것처럼)’은 앞의 말인 ‘출중한 가톨릭 남성신자(l’élite de la Chretienté masculine)‘를 꾸미는 말이다. 즉, 드망즈 주교는 ’개신교의 그리스도교 청년회’와 같이 ‘뛰어난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를 목표로 했다. 그는 가톨릭 청년층의 모든 엘리트를 규합하기 위해서, 이 사업이 전 교구에 퍼져나가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청년층의 모든 엘리트’가 주된 대상이었다.43)

 

이 표현에 주목을 요하는 이유가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의 활용이 적은 편인데, 드망즈 주교는 평신도를 크게 활용하는, 평신도가 활발히 움직이는 단체를 원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실제로 드망즈 주교는 공소회장, 전교회장 제도를 중시하고 그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44) 이와 함께 주교는 명도회를 통해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이끌어 내고자 기획했음을 보인다. 본고 Ⅴ장에서 다시 보겠다.

 

 

3. 명도회의 기본 사항

 

명도회 주보 첨례일은 베드로 바오로 축일인 6월 29일이었다.45) 로베르 신부의 본명이 바오로이지만, 축일 설정은 로베르 신부 때가 아니고, 드망즈 주교 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드망즈 주교는 주보 축일에 매년 총회를 개최하며, 주보 축일 전 3일간 모든 성당 지부 대표들도 참가하는 행사를 계획했다.46) 실제로 명도회에서는 주보 축일에는 미사를 드리고, 체육대회, 영화상영이나 연극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47) 그런데 계획했던 바와는 달리 하루 행사였던 것 같다.

 

그리고 명도회원들은 전용 회합 장소와 운용 자금이 있었다. 우선, 명도회에는 명도회관(明道會館)이란 전용 회합 장소가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을 비롯한 교구 건물을 짓기 전에 젊은이들이 모일 장소부터 마련했다.48) 1912년 3월 6일 계산성당의 북쪽 편에 ‘명도회관’이란 명칭으로 21m×9m 규모의 건물이 완공되었다.49) 개관식에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날 주교는 청년회관을 축성하는 의미를 설명하고 강당에 전시된 그림을 통해 청년회의 목적을 설명했다. 저녁에는 환등, 성가, 연설 등이 있었다.50) 젊은이들은 긍지에 불탔고 주교께 감사했다.

 

당시 명도회관 건물은 서상돈이 남산부지를 기부하는 일이 늦어져서 계산성당 곁에 세웠는데, 문제가 해결되면 주교관 지역 내로 벽토(壁土)를 벽돌로 바꾸어 건물을 그대로 이전하고, 건물 전체를 청년회 전용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이 첫 건물에는 당가실, 피정용 공동실, 손님 방 2개, 그리고 평상시를 위한 작은 식당이 포함되어 있었다.51) 실제로 명도회관은 1914년 남산동 교구청 옆으로 이전되어,52) 회관 내에는 음악실과 오락실이 있고, 외부에는 정구장이 마련되었다.53) 또 명도회 사무실이 따로 있어 상비원이 거주했다.54) 계산성당 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신자들이 의자를 설비했다.55) 즉 당시로서는 상당히 서구적 환경을 갖추었다.

 

나아가 명도회에는 ‘기본자산’이 있었다. 그들이 기금을 마련한 방법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명예회원들이 도움을 준 것이 아닐까 한다.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에는 현역회원과 명예회원이 있는데 명예회원은 기부금으로 활동을 돕는다고 했다.56) 한편, 로베르 신부는 명도회원들이 회비를 내어 전교사업에 사용한다고 했다.57) 또 드망즈 주교가 이 단체를 맡은 1912년 일반회원에게 매월 5전(戔)을 받기로 했다.58) 입회금은 1912년 당시 1원인데, 10년 동안 고정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59) 일제 강점기에는 인플레이션이 심했기 때문에 액수가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회비로는 자산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반면에 월례회의 때 실시하는 환등 행사(영사) 입장권이 수익을 낸 사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외교인까지도 많이 참가하여 배포된 입장권은 필요한 숫자의 3분의 1에 불과했다.60) 그런데, 1920년 120차 회의에서 모든 성인의 날 축일에 연극을 잘해서 입장료 수입을 얻자고 의결한61) 사례가 있다.

 

또한 명도회원들은 이 기본재산을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증인을 세워서 빌려주었다. 그런데, 명도회에서는 1913년 7월부터 방채(放債) 놓은 돈을 수금하기 시작하여, 1915년 1월까지 지속했다.62) 이렇게 돈을 걷는 데는 사용 용도가 있었을 것이다. 확실치는 않으나,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 때가 이때일 수도 있다. 명도회에서는 남산동에 의지가지없는 노인들이 기숙할 가옥을 운영했다. 그런데 자금을 수금하는 때가 남산동으로 회관이 이전된 직후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상정해 본다.63) 물론 명도회에서는 성탄, 부활, 성령강림 등 교회행사를 할 때마다 회비에서 보조하기도 하고, 따로 모금을 하기도 하는데, 보통 20원 정도는 회비에서 감당하고 있다. 당연히 명도회에서는 월간, 연간 회계보고를 했다.(<표3> 참조)

 

한마디로 요약하면, 명도회는 로베르 신부 때 조직되었는데, 드망즈 주교가 맡으면서 목적과 활동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음악실, 오락실, 체육장 등이 딸린 서구적 시설의 전용 회합장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일반인들 대상의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명도회는 기금을 운영하며 교회 행사 보조 및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명도회에는 입회비와 월회비가 있었으나, 기금은 명예회원들의 협조로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Ⅲ. 명도회의 조직 현황

 

「회록」을 분석하면 명도회의 조직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임원, 회원, 활동부서 등을 통해 그 실체를 보겠다.

 

 

1. 명도회 조직과 임원 구성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를 교구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단체로서 그 본부를 교구 본부에 두고, 주교의 지휘 하에 전 교구 안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는 각 신부들이 지도하도록 구상했다.64) 그러나 초기에는 경제 여건이 허락치 않아 지부 설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65) 1917년에서야 화산천주당(나바위)에 지부를 결성하고66) 회관 낙성식을 거행했다.67) 이후에도 주교는 되재 등68)에 지부 설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에 준비분과, 활동분과, 노인분과 등 세 개의 분과를 두고 각 분과에는 회장, 부회장, 임원을 두려고 했다.69) 반면에 실제 상황은 주교의 구상과는 달리 초기에는 이런 구분없이 모두 함께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운영을 소개할 때는 드망즈 주교도 현역회원과 명예회원으로만 구분했다. 그러나 「회록」을 통해 보면 이와도 약간 다르다. 우선, 노인분과가 아니고 명예회원이 보이는데, 1912년 7차 회의에서 서상문, 진하섭, 이성서, 임해주, 정재호, 정규옥, 박준성, 김치 등 8명을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70) 같은 회의에서 명예회원으로 추대된 정규옥은 평의원으로도 선출되었는데, 이로 보면 명예회원도 회의에 참석하여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15세에서 20세까지로 구별했던 준비분과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12년 8차 회의에서 15세에서 18세까지 학생들을 입회시키기로 결정하여, 젊은이들이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때 형편이 어려운 젊은이에게는 입회금을 면제했다.71)

 

한편, 명도회는 총회와 평의원회의 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총회는 임시총회, 통상총회가 있는데, 내용면에서 임시회의와 통상회의가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1918년에 주교의 명령으로 규칙 제8장 1절 통상총회를 정기총회, 제9장 1절 임시총회를 통상총회로 개정키로 의결하는 것을 보면72) 6-7년을 그대로 혼용하여 사용할 정도로 구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때문에 일년을 쉬고 1920년 후반에 개최된 4번의 회의는 각기 임시총회, 임시임원회, 정기총회, 합병총회라고 명기했는데, 임시총회를 제외하고는 처음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명도회 총회의 임원은 회장, 부회장, 도리강사, 지도강사, 총무, 부총무, 서기, 회계 등으로 구성된다. 임원은 원칙적으로 매년 부활주일에 개선하는데, 주교가 원칙을 세운 것처럼 회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73) 그 방법은 평의회에서 구두로 후보 추천위원 5명을 선정하고, 이들이 각 임원에 대해 배수 혹은 삼배수씩 후보를 정해오면 이들에 대해 총회에서 투표한다.74) 그리고 평의회는 총회에서 선출되는 의장과 15명 가량의 평의원으로 조직된다. 평의회 의원은 일괄 선출하는 편이지만 결원되는 인원은 빠진 숫자만큼 다시 보충했다.75) 이밖에 3명의 간사가 선출된다. 평의회에서는 임원 후보들을 추천하는데, 이 역할을 하는 평의회에는 주교가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즉 임원 선출은 오로지 회원들의 의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회록」이 기록되던 1912년도 회장은 서상돈이었다. 즉, 당시 서상돈은 총회 회장이고 아들 서병조는 평의회 의장이었다. 그런데 서상돈은 병고로 내내 출석치 못하고 부회장 배석규가 대신했다. 서상돈은 결국 1913년 6월 30일 사망하여76), 1913년 7월 12일 토요일임에도 22차 임시평회의가 열렸다.77) 평의회 의장 서병조는 출석은 했지만 정준수가 대신 사회를 보고 회장 후보 세명을 뽑았다. 다음 총회에서 김상진이 회장이 되었다.78)

 

이와는 별도로, 임원들의 임기가 1년이라면 이때쯤 모두 경선할 때가 되었는데, 회장만 선출했고, 그 외 기록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총무 김규상이 사임하여 전용준을 선출하고,79) 평의장 서병조의 사면 요청으로 이기운으로 변경, 박제원을 지도강사로 선정하는 등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1915년 3월 21일에서야 임원 정기개선의 건이 올라온 것을 보면 임기가 3년이었던가 아니라면 잉임(仍任)을 해서 「회록」에는 없는 것일 수 있다.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임원선출은 드러난 기록들을 종합하면 1년 임기가 된다. 「회록」을 통해 드러난 임원은 아래와 같다. 

 

 

 

「회록」에 기록이 없는 임원은 연임된 것 같다. 임원 임기가 1년으로 짧다 보니 연임이 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예를 들어 1918년 3월 17일 106차 회의에서 만기 임원에 대한 추천위원 선정을 의논했음에도 1918년 6월 23일 108차 회의에서 도리강사 김상진만 선정했다. 같은 해 9월 15일 109차 회의에서도 궐원된 도리강사로 서호경을 선출할 뿐이었다. 다른 임원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임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인 것 같다. 초기 3년만에 임원개선을 하는 경우도 틀이 잡힐 때까지 임원들을 연임시켰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그밖에 간사와 평의원을 찾아보면, 1915년에는 간사에 허호연, 서정태, 이재동 등 3명, 평의원은 배석규, 서병조, 이태순, 유대유, 허경조, 서병문, 정직현, 이계찬, 김수봉, 서병규, 유흥민, 서병민, 임윤집, 이근소 등 14인이었다.80) 1916년의 경우 간사는 박상길, 최경욱, 유도석이고 평의원은 배석규, 전용준, 서병문, 손명조, 이기운, 최영순, 김규언, 서호경, 이계찬, 허경조, 이종신, 유흥민, 서병무, 김영은 등 14명이었다.81) 1917년에는 허호연, 박상길, 유학율이 간사이고, 평의원은 이기운, 최영순, 서병규, 이계찬, 김봉상, 김하정, 김상진, 허경조, 이규약, 김영은, 손명조, 서용수, 배석규 등 13명이다.82) 한편, 명도회에서는 회계위원, 편집위원, 성탄경축 준비위원, 회비 수금위원, 문서 보완 위원, 회계문부 조사위원 등의 행사 실무를 한시적으로 맡는 사람들은 회의에서 구두로 추천하여 결정했다.

 

요컨대, 명도회는 전체회원으로 된 총회와 약 15명 가량의 선출된 평의원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있다. 총회 임원은 총 10명 내외인데 매년 부활절 무렵에 투표로 선출했다. 평의회에서 후보 추천위원을 선정하고 이들이 배수나 삼배수의 후보들을 선정해 오면 총회에서 투표했다. 임원의 임기는 1년으로 연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2. 명도회의 회원구성

 

명도회 회원의 규모와 구성, 그들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로베르 신부는 명도회 회원들의 자격으로 신앙심이 강하고, 열성적인 청년으로서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4대 교리를 잘 알고, 조만과(早晩課)를 바치며, 로사리오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했다.83) 드망즈 주교는 회원으로 ‘출중한 사람(Elite)’을 뽑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명도회 회원은 한마디로 신앙적으로나 능력으로나 뛰어난 사람들이었다고 하겠다.

 

명도회 회원 수는 대략 90명에서 100명 선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회록」의 1차 회의에서 66인 참석, 58인 결석이라고 했다. 즉 총원이 124명인 셈이다. 그렇지만 회원 제명과 영입 등으로 그 숫자는 늘 변하는데, 평균적으로 90명 정도를 유지했던 것 같다. 1918년 11월과 12월 회의에는 각각 출석, 연고 결석, 무연고 결석 인원이 모두 기입되었는데 이를 합하면 90명씩으로 일정하다.84) 거의 1년 반만에 열린 1920년 첫 회의 총인원도 90명이다.85) 회의록에 나오는 이름을 뽑으면 아래와 같다.

 

 

 

명도회 10년간 <표2>와 같이 약 126명의 회원을 찾을 수 있다.87) 물론, 이 명단은 10년 동안 「회록」에 이름이 나타난 사람 전부이므로 이 가운데에는 사망자, 외지로 출타한 사람, 회의에 제명되어 활동을 멈춘 회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회의에는 참석했으나 발언을 하지 않거나 역할을 맡지 않은 회원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전체 명도회를 거친 회원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전체 회원 수는 제명자와 신입회원에 의해 크게 변한다. 우선, 신입회원은 지원이 있으면 주교의 허락을 얻어 회의 때 선포했다. 1916년 4월 30일 박노일(75차 회의)을 시작으로 차윤행, 이학래가 입회했고, 1917년에는 유진룡 · 김치수 · 김낙천 · 여윤룡 · 김현수 · 최문준 · 홍덕문 · 김금석 · 임명준 · 김영화 등이 입회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입회를 논의한 음악부나 인애회 회원 등은 신입회원 선포가 없어서 이들의 경우에는 특별절차가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명도회의 규칙 제4장 2조는 연 5차 결석한 임원은 개선하고 이에 해당하는 회원은 제명하기로 되어 있다.88) 이에 따라 1912년 10월 20일 7차 회의에서 회원정리를 단행했다. 제명된 인원은 17명인데, 이들 중 김응서와 김흥렬은 다시 활동하게 된다.89) 이때 제명된 임원에는 이규현, 이병근, 정규옥, 이중관, 최경서, 윤치옥, 오대숙, 전용준, 임윤집, 김영은으로 충원되었다. 이후에는 제명자 명단없이 제명 기록만 나온다. 그러면서도 제명되고 2개월 안에 출석 성적이 좋으면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인다거나, 공무 출장으로 결석하는 임원은 제명 규칙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등 세부 사항을 보완해갔다.90)

 

그리고 명도회에는 연령별 분과가 아니고, 여러 개의 활동 부서가 보인다. 10년간의 「회록」을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부가 설치된 시기를 구별할 수는 없는데, 회의록에 나오는 순서대로 살펴보면 전교부, 음악부, 교풍회, 문예부, 체육부 등이 드러난다.

 

전교부는 1913년 9월 21일 정준수가 전교회장을 양성하자고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전교가 명도회의 가장 큰 목적이니 전교회장을 양성하는 구체적 방법을 심도있게 연구하자고 결의했다.91) 그리고 10월에 들어 주일이 아닌 날에도 모여 일을 급속하게 진행했다.92) 결국, 전교부장에 서호경, 전교부 의원으로 이기운, 허경조, 서병주, 정준수 등 4명을 선출하고 활동에 들어갔다.93) 이후 한동안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주교, 전교회장, 의원들이 잇달아 전교부에 대해 발표했다. 실제 경주에서 이루어진 전교 성과가 보고되기도 했다.94)

 

전교회장 제도는 드망즈 주교가 사목하면서 크게 기대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며, 평신도의 활약을 인정하고 적극 활용한 제도이다. 주교는 매년 교세를 분석하면서 그 성과를 전교회장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그는 교세가 성장하고 약화되는 이유 중 중요한 요인을 전교회장에게서 찾고자 했다. 주교는 적어도 각 본당마다 한명의 전교회장을 두려고 했다. 전교회장은 유급제도였는데, 주교는 전교회장 운영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여러나라에 이를 크게 홍보했다.95) 물론 한국교회 내에서 전교회장 제도는 개화기 때부터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교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인물은 정준수이다.96) 즉, 대구대목구에서는 명도회가 전교회장 제도의 출발 계기를 제공했으며, 여기서 전교의 인적자원이 충원되었다.

 

둘째, 명도회에는 음악부가 있었다. 음악은 천주교 전례에 필수적이다. 명도회 취주악대는 명성도 높고 활동도 왕성했다. 바로 그 이유로 기존의 교구사에서 악대에 주목했으나97) 그 운영에 대하여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취주악대는 음악부로서 명도회 관할 하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서병조가 음악부의 발전방침을 제안하고 이에 대한 주교의 권면이 있었다.98) 회합 때에는 음악부장과 음악부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또 음악부원에 들도록 권하기도 한다.99)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수입한 서양악기를 다루는 데는 어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몇년 뒤인 1918년에는 음악부에 근면을 독려하고 있다.100) 또 악기가 고장이 나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주교가 여러번 도왔다.101)

 

그리고 명도회에서는 교풍회를 조직했다. 1917년 10월 김찬수가 이를 제안했는데, 서로 권하여 좋은 풍속을 지키자는 것이었다.102) 평의회에서 후보를 추천받아103) 김상진, 김봉상, 최상준, 이기운, 김수봉, 김하정, 김낙천, 이근소, 유흥민, 홍순일을 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교풍회 취지서를 인쇄하여 개인마다 배포했다.104) 주교는 이를 두고 명도회에 새로운 부가 조직되었다고 하며, “회원들은 잘못 행동하는 교우들을 찾아가 권고할 의무가 있다. 세 번의 훈계 후에도 성과가 없으면 명도회가 중재에 나서고, 이 중재도 성과가 없으면 그 사건을 주교에게 가지고 간다.”105)라고 설명했다. 교풍회의 구체적인 예로는 1918년 6월 의복의 사치를 금하는 것을 볼 수 있다.106)

 

이와는 달리 명도회의 부서는 아니지만 전 회원이 가입하도록 권유된 단체가 있다. 계산본당의 연령회 사업을 하는 인애회이다. 명도회원인 이기운이 인애회 회장을 한 적도 있다. 1916년 김상진의 제의로 명도회원 모두 인애회에 가입하여 적극 활동하기로 결정했다.107) 반면에, 인애회 회원을 모두 명도회에 입적(入籍)시키자는 안은 부결되었다. 이로써 명도회의 소속부와 계산본당의 부는 서로 다르게 운영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외에 문예부와 운동부도 있었다. 1920년도 문예부장과 체육부장을 선출하는데, 이 부서들이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108) 한편, 해성체육단과 명도회의 관계에 대하여는 좀더 고찰해 보아야겠다. 1917년 성탄경축 준비를 하면서 체육단에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오겠다는 결정을 하고 있는데109), 이후 병합 회의를 하는 것을 보면 상호 따로 존재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명도회에는 전도부, 음악부, 교풍회, 문예부와 체육부 등 여러 부서가 속해 있었다.

 

 

Ⅳ. 명도회의 운용

 

이제 명도회의 실제 운영되었던 상황을 살펴보겠다. 명도회의 지침인 규칙을 먼저 보고, 회의 진행 현황에 대해 검토한다.

 

 

1. 명도회의 규칙

 

명도회는 드망즈 주교가 맡은 후 규칙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1912년 규칙(회칙)을 확정해서 이에 준하여 활동했다. 그들은 1913년에 규칙서를 인쇄하여 회원들에게 배포하기로 하고110) 편집위원들이 두 달여 작업해서 각 회원들에게 1엔씩에 배포했다. 회원들은 규칙서를 회의 때마다 지참했다.111) 명도회에서는 회합 때 도리(道理) 강사가 규칙의 일정 부분을 설명하고 함께 공부했는데, 규칙서가 다 끝나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했다(<표3> 참조). 도리강사가 불참했을 때에는 타인이 대신하거나 순서를 생략했다.112)

 

드망즈 주교는 이 회칙에 설립목적을 분명히 밝혔고, 그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케 했다.113) 그러나 회칙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명도회 규칙서는 회원들이 각자 소지했던 책자이므로 향후 어디선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규칙서를 구할 수가 없다. 다만, 「회록」에서 언급된 내용을 통해 그 내용을 편린이나마 재구성할 수 있다.

 

규칙서는 적어도 14장 이상으로 구성되었고, 장과 조로 나뉘었다.114) 규칙 4장은 회원자격에 관한 것으로 4장 2조는 연달아 5차 결석하면, 임원의 경우는 개선하고, 같은 경우의 회원은 제명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이후 2개월간의 참석 상황을 보아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단서도 첨부되어 있다.115) 그리고 규칙 5장 3조에 의하여 학부형들에게 가정교육의 권무(勤務)를 청하는 것을 보면 5장은 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판단된다.116) 규칙 8장과 9장은 회의의 종류와 그 역할을 명기했다.117) 또 규정 중에는 회의 중에 교리 토론이 안된다는 조항이 있었던 듯하나,118) 1914년 11월에 회의를 거쳐119) 이후부터 토론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12장은 관람회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120) 여러 활동에 대한 조항들이었을 것이다. 1916년에는 청년들이 입회할 때 호주가 아닌 사람이나 형편이 어려운 이에게는 입회금을 면제한다는 조항도 첨가되었다.121) 이외 성모동굴을 세운 뒤부터 회합 끝에 회원들이 성모동굴(성모당)로 가서 성모덕서도문을 통경(通經)한다는 내용이 첨부된 것 같다.122) 요컨대, 규칙서는 회원, 회의 조직, 활동 등을 자세히 규정했으며, 실제상황에 따라 계속 필요한 내용을 첨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2. 회의 운영

 

명도회의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은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로베르 신부는 명도회원들이 매 주일 회합을 갖는데, 정오에서 2시까지 교리를 공부하고, 그날의 복음을 읽고, 해설을 들으며, 개신교 신자들의 질문에 대응할 가르침을 받는다고 했다. 드망즈 주교의 명도회 초기 계획 공문에서도 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주교는 명도회는 매주 일요일 밤 8시부터 10시 또는 11시까지 진행되는데 최소한 60명의 회원이 참가하며, 이 연구모임에서 젊은 토론자들은 도리강사와 지도강사의 지도를 받는다고 했다.123) 1912년 당해연도 보고서인 위의 내용을 보아도 매 주일 두 시간 정도 모여 교리공부하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니까 모임에서 도리강사와 지도강사가 지도하는 것과 매달 공개 회의와 청중 초빙 등이 드망즈 주교가 확대 실천한 활동이다.

 

명도회 회합에서 실제로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자. 「회록」에는 1912년 7월 14일부터 1920년 10월 16일 해성체육단을 인수 합병할 때까지 총 120회의 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회의는 1912년 15회, 1913년 16회, 1914년 9회, 1915년 24회, 1916년 20회, 1917년 20회, 1918년 12회, 1919년에는 한번도 열리지 않고, 1920년 4회 열렸다.

 

위의 통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명도회의 회합일도 당초 계획했던 것처럼 매주 열리지는 못했으며, 그 간격도 유동적이었다. 월 1회 회합으로 시작하여 차츰 월 2회, 매주 연속적으로 회합이 열리는 등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회의가 잦아지는 경향을 띤다. 모임은 주로 일요일에 가졌고, 한번 모임은 두시간 정도 열렸다. 회의 시각은 초기에는 저녁 8시에 시작했다. 그때는 회합이 끝나고 귀가하기가 어려울 터임에도 불구하고 밤늦은 시간에 모이고 있다. 이후 저녁 7시로 옮겼다가 한동안은 오후 2시로 옮겼다. 때로 오전 10시 모임도 있다.

 

명도회는 혹한(酷寒)과 혹서(酷暑)기에는 쉬었는데, 휴회 기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휴회는 회의에서 공고하거나 결정했는데, 일반적으로 성탄 때 회기를 끝내고 이듬해 2월이나 3월에 재개되었다. 명도회 회합에는 평균 50명 정도 참석하는데, 많을 때는 60여명, 적을 때는 30여인이 출석했다.

 

회의 진행은 매회마다 회장이 사회석에 앉고 나서 사찰(査察)을 구두 지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출석 점검, 회의록 낭독, 주교 말씀, 성경봉독, 회칙의 설명과 선포, 신앙적 의문풀이나 신앙강좌와 토론, 안건토의, 다음 회의 담당자 선정으로 진행되었다. 폐회도 꼭 동의와 가결을 거쳤다.

 

주교는 회의에 참여하여, 교회의 중요한 사안이나 사목방문 등의 소식을 전하고 강론도 하고 토론의 심판도 하면서 회의를 이끌었다. 회칙 설명은 도리강사가 담당한다. 성경은 매회 몇구절씩 봉독하는데, 10년 동안 마태오, 마르코와 루가복음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토론을 제외하고는 담당자 불참 시에 다른 사람이 대신하거나 그 순서를 생략했다. 주교가 회의에 참석하는 걸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주교가 사목방문 중이거나 유고 시에는 휴회하거나124) 다른 신부가 대신 참석하기도 하였다.125) 그런데, 명도회에서는 임원선출에 관한 평의회에는 주교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120회의 회의 중 평의회는 12번 열렸다.126) 따라서 이를 감안하면, 10년간 주교의 명도회의 참여율은 약 79%로 나타난다.

 

한편, 주교가 확대 실천한 매월 공개 회의와 청중 초청은127) 「회록」에서는 볼 수가 없다. 명도회원들은 공개토론이나 강연 등을 회합이라고 생각지 않고 행사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회록」에는 그 내용이 없고 주교의 메모나 보고에만 나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명도회원들의 회의는 10년 동안 거의 일정한 틀을 유지하여, 성경 공부와 토론, 회칙 선포, 안건 토의로 진행되었고, 80% 가량을 주교가 직접 참여하여 회의를 이끌었다. 회의는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쉬었다. 매월 1회씩 회의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강연도 했다.

 

 

 

 

Ⅴ. 명도회의 활동과 그 특성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교구 설정 이후 첫 건물로 명도회관을 지었고, 회관 개관식에는 특별히 작곡한 한국식 성가도 있었다.128) 주교는 회관을 주교관 구역으로 이전한 뒤 상당한 발전을 기대했다.129) 또 주교는 명도회 뱃지를 구상했으며130) 2년 뒤에는 각 회원들에게 휘장(徽章)을 주는 등131) 회원들에게 긍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1918년 교황이 각 주교 지방에 도리(道理) 연구 단체를 만들라고 하자, 드망즈 주교는 명도회를 교황청의 승인단체로 등록하기로 했다.132)

 

이러한 명도회에 대해서는 이미 높이 평가되어 왔다. 1980년대 펴낸 『대구본당 100년사』에서는 “초창기부터 명도회관을 중심으로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한일합방 이후 침체되어 가는 주민정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133)고 했다. 김진소도 명도회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고 보았다.134) 이종만은 명도회가 선교에 이익을 주었다고 했다.135) 또한 명도회는 지역사회에 근대음악의 보급, 근대교육에 공헌한 점도 인정되어 왔다.136) 이러한 명도회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살피고자 한다.

 

 

1. 회원들의 본당 내 역할

 

명도회의 활동을 보기 위해 회원들의 면모를 살필 필요가 있는데, 이를 사회활동과 본당 활동으로 나누어 보겠다.

 

우선, 천주교 신자와 사회활동면을 보자. 대구사회에서는 개화기부터 천주교회가 일정 역할을 담당하며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넓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이 시기 대구 천주교와 사회의 인맥 연결에 있어 중심인물은 서상돈이었다. 그는 독립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 대구광문사, 대동광문회 등의 단체 활동과 사범학교, 협성학교, 수창학교, 성립학교 설립 등을 통해 사회 주요 인사들과 관계를 형성했다. 더구나 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교회가 비신자들과 공감을 만들어내며 끈끈한 동지애를 얻는 기회가 되었다. 서상돈이 명도회 회장이 되었고, 애국계몽운동에 구축된 인적자원이 명도회로 뭉쳐졌다.

 

서상돈은 1859년 양친을 따라 상주에서 외가가 있는 대구로 이주했다. 그가 대구에 들어올 때는 재산이라곤 전혀 없는 9살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애 전반에 이미 거부가 되었다. 그가 이처럼 성장하는 데는 자신의 혼맥(婚脈), 보부상 조직과 천주교 조직, 개항 이후의 급변하는 사회환경 등이 작용했다.

 

게다가 대구대목구 초기에 성공한 신자들은 서상돈과 비슷한 경력을 지녔다. 가령, 계산성당 설립과 국채보상운동에 주축으로 일했던 정규옥도 서상돈과 같은 시기, 보부상으로 부를 쌓은 대표적 인물이다. 명도회 평의원이기도 했던 정규옥은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 정착할 때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거처를 제공했다. 그는 기와성당 건축과 화재 이후 새로 성당을 짓는데도 적극 헌신했다.137)

 

또한 서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이일우는 1905년 달성여학교 설립 등 학교 설립, 광문사와 대동광학회 등에서도 같이 활동했다. 이일우는 대구 계몽운동의 산실인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운영했는데, 우현서루는 1920년대 교남학원이 되었다. 3·1운동으로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퇴직당한 홍순일은 이 학교로 옮겼다. 교남학교는 후에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가 그 운영을 맡았다. 이처럼 천주교는 지역 인사들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또한 도리강사 이근우는 이일우와 6촌간으로서 서상돈과 함께 사립학교 설립 등 개화운동을 한 사람이다.

 

다음으로 계산성당에서 명도회원들이 활동한 내용을 참조해 볼 수 있다. 명도회의 지도강사였던 이근우는 성립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해성학교 장학회장, 학무위원을 역임했다. 1908년 해성재를 신학제에 의한 ‘사립성립학교’로 개편할 때에는 이근우, 박진문, 김상진, 김덕래, 김찬수 등이 주축이 되었다.138) 이 중 박진문을 제외하고 모두 <표2>의 명도회원 명단에 보이는 이름이다. 물론 박진문이 명도회원이 아니었다고 확정짓는 것은 아니다. 또한 초기 부회장으로서 서상돈을 대신했던 배석규는 해성재의 훈장이었다.139)

 

명도회 총무, 평의장 등으로 활동했던 김찬수는 1915년 성립학교를 인수하여 3·1만세 시위 이후에도 계속 학교를 운영했다.140) 그는 만세사건 직후 수재로 가산의 2/3를 잃었음에도 교육의 현장을 지켰고, 35년간 학교 경영비를 부담했다. 김찬수는 계산본당 내에서는 본당 전교회 회장, 천주공교전교회 이사, 교구 가톨릭 청년연합회 고문을 지냈다. 한편, 김찬수는 19세 때 당시 해성재의 훈장 배석규의 딸과 혼인했으나 상처하고 1904년 강정석과 재혼했다.141) 그런데 강정석은 성모회 2대 회장으로 헌신하며 부부가 교회 내에서 크게 봉사했다.

 

김하정은 명도회에서 총무, 편집위원, 문예부장 등을 역임하며 도리도 가르치고, 여러 프로그램에서 연사로 활동했다. 그는 1913년에 협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계산본당 내의 성립학교(뒤에 해성학교로 교명 변경) 선생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협성학교는 1906년 서상돈, 김찬수, 정규옥 등이 대구·경북 인사들과 함께 세운 사립학교이다.142) 그는 해성학교 선생으로 20여년 근무, 김찬수와 더불어 대구에서 독보적인 교육자로 평가받았다.143) 김하정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뛰어난 연설로 학교를 지탱케 한 일화가 있다.144)

 

정준수는 명도회의 초기, 주로 사찰이 되거나 임시 의장을 하는 등 무게있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본인이 낸 전교회 건이 채택되어 전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전교회장으로 크게 공헌했다.145) 불교가 강해서 전교가 어려운 경주에 1912년 가을부터 전교회장 정준수가 파견되었고, 이를 회합 때 보고했다. 또 명도회 평의원과 도리강사를 맡았던 이기운은 대구본당 초대 총회장이었으며, 인애회 회장도 역임했다.146)그리고 서병규는 베르모렐(Vermorel, 1860- 1937, 張若瑟) 신부가 계산본당에서 구역 분담제를 실시했을 때 남산지구 구역회장이 되었다.147) 박노일은 나중에 토크뵈프(Toqueboeuf, 1911-2008, 宋德進) 신부의 어학 선생이 되었다.148)

 

한편, 김영은은 1911년 7월부터 1945년 1월 31일까지 약 35년간 주교 복사였다. 당시 주교 복사는 평신도 신분인 주교 비서로서 교구청의 대내외 사무를 맡았고 주교의 사목 순방에도 수행했다. 특히 그는 새로 도착하는 선교사들의 한국식 이름을 짓기도 했다.149)

 

1911년 7월 2일 드망즈 주교는 루르드 성모께 새 교구를 봉헌하고 어려운 사정을 청원 서약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에는 신자 대표 30인도 서명했는데, 첫 번째부터 이어진 순서가 서상돈, 정규옥, 김종구였다.150) 이중 서상돈과 정규옥은 명도회원 명단에 보인다. 김종구가 명도회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대 명도회원들의 위치를 볼 수 있다.

 

또다른 특징은 명도회 회원들이 인맥, 특히 인척관계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상돈을 비롯한 주요 신자들은 혼인관계로 연결되었다. 서상돈은 서철순의 맏아들인데, 서상돈의 모친은 김현상(일명 김후상)의 장녀 김아가다이다.151) 김현상은 대구에 정착한 첫 신자였다. 한편, 김현상의 셋째 딸은 이유진(이근우 부친)에게 출가했다. 즉 김현상은 서상돈과 이근우의 외조부이고, 김찬수의 증조부이다. 서상돈과 이근우는 이종 사촌간이며 김찬수는 서상돈의 5촌 처조카가 된다. 어린 서상돈을 상인의 길로 나가게 지원했던 김종구(일명 김종학)는 김찬수의 백부이다.152) 또한 이근우는 대구에서 교육운동에 헌신하고, 국채보상운동을 함께 한 개화인사 이일우와 6촌간이다.

 

한편, 서상돈의 동생은 서상정이다. 그의 아들은 서병무이고 서병무의 손녀가 최씨네로 혼인하여 최정복, 최재복, 최계복을 낳았다.153) 서병무의 부인은 김종학의 딸로서 김찬수와 사촌간이다.154) 그리고 정준수의 부인은 서상돈의 동생인 서상정의 딸이다.155) 다시 말하면, 최정복의 최씨 집안, 정준수의 정씨 집안도 결국은 서상돈네와 연결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김하정은 서상돈과 정규옥 등이 세운 협성학교를 졸업했으며, 최정복은 계산본당 부설학교인 성립학교 출신이다.156) 이밖에도 명도회원들은 대자, 대녀 관계로도 얽혀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결국, 명도회 회원들은 계산본당 내에서도 학교의 교장과 교사, 주교 복사, 선교사의 어학 선생, 총회장, 구역장 등 크고 작은 일들을 맡은 명망있는 신자들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앞서의 명도회 계획 공문에서 각 분과의 회장 및 부회장은 교구에 근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명도회원들은 계산본당 내에서 일정 역할을 맡아 활동하는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상호간은 김현상 계(系)와 서상돈 계를 고리로 인적, 신앙적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2. 명도회의 성격과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향

 

명도회의 큰 특징은 평신도의 능력을 계발하고 평신도의 능동적인 활동력을 함양하는 제도라는 점이다. 드망즈 주교는 출중한 남자 신자를 뽑아서 ‘교리를 가르치고, 조직을 하도록 하고, 스스로 그 경험에서 얻은 힘을 사회에 발휘하도록 했다. 즉, 드망즈 주교는 이미 조직되어 있는 명도회를 엘리트 단체로, 그리고 구성원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방안을 세웠다. 그리하여 주교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자치권을 부여했다. 본고 III장에서 보았듯이 모든 임원은 회원들이 추천하여 투표로 선출했다. 그리고 임원후보를 선정하는 평의회에는 주교가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지도급에 있는 도리강사와 지도강사도 회원들이 선출했다. 또한 주교는 회의를 할 때 당시 생각나는 의견을 주저하지 않고 발표하도록 권장했다.157)

 

그리고 명도회는 선교와 대중 계몽에 노력을 기울였다. 명도회는 매월 회의를 공개하고, 신자들을 초청하여 명도회가 조직을 통해서 훈련한 성과를 나누고자 했다. 명도회의 주요 활동은 강연, 영화, 연극, 악대, 테니스 등의 다양한 문화활동이었다. 주교는 이런 방법으로 전 신자에게 활기를 불어넣고자 계획했다. 즉 주교의 구상대로 명도회가 각 본당마다 조직되어 역할을 한다면 전 교구 신자가 모두 같은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드망즈 주교가 명도회 회원의 긍지를 살리고 자치권을 부여하자, 그들의 독자성은 매우 확대되었다. 명도회원들의 독자성은 3·1운동 이후에 명도회가 해성체육단과 합병하여 해성청년단으로 새 출발했다가158) 다시 명도회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1919년 명도회의 평의장, 총무, 평의원, 부장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람들이 3·1만세 운동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그해 내내 단 한번도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9년 말 드망즈 주교가 로마에 회의 참여차 1년여 일정으로 출국했다. 주교 부재시에 명도회원들은 해성체육단과 통합을 논의하여, 주교 귀국 직전인 1920년 12월 20일 ‘대구해성청년회’라는 새 단체가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이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도회가 주교 부재시에 해성청년회로 새 출발했고 더욱이 주교가 이 변화를 인정치 않음에도 다시 명도회로 환원하는데 일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과정을 밟아서였다. 우선 주교는 명목상 명도회를 재건하려는 청년들이 이약슬 신부를 동반하고 주교를 찾아오는 형식을 취했다. 이에 주교는 명도회 규약 텍스트를 마련하고, 1922년 구회칙을 다시 통과시켰고 해성청년회는 다시 명도회로 환원되었다. 명도회 운영에서 주교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은, 역으로 명도회가 그만큼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159)

 

드망즈 주교는 이후 꾸준히 교회 청년회를 주교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갔다. 다시 복원된 명도회는 단체의 성격을 계속 수정해가다가 결국 1924년 남방천주공교 청년회로 출발하게 된다. 주교는 정치적인 저항운동은 지양하고, 교육·언론과 같은 온건한 문화 활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입장을 택했다. 이리하여 본당에는 교육 계몽운동 계열의 시위자가 남고, 그보다 활발한 투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으로 활동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160)

 

결론 삼아 대구감목구의 특징이 되었던 드망즈 주교의 사목 관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드망즈 주교는 처음 부임할 때부터 평신도와 협력하는 공동활동을 구상했다. 주교는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명도회와 그 지부를 통해 교구 전체의 평신도를 교육하고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을 세웠다.

 

이어 주교는 공소회장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곳곳에 정착하여 사는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조직을 다지고자 했다. 그는 『회장의 본분』을 『사목지침서』보다 먼저 1913년에 출간했다. 그리고 『회장의 본분』이 인쇄되는 동안에 명도회에서 전교회장에 대한 안이 제출되었다.(1913년 9월 21일 25차 회의) 이후부터 주교는 전교회장을 통하여 아직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곳을 개척하기를 기대했다.

 

다시 말하면 드망즈 주교는 평신도의 활동을 크게 기대하고, 공소회장을 통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의 조직을 단단히 하며 사목협조를 얻고, 전교회장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를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명도회를 통해 신자들의 신심과 실력을 함양하고 이들을 통해 전 교구민에게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물론, 드망즈 주교가 평신도에게 적극 기대한 것이 교구 출발 당시 인적자원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창설될 때, 신자 2만 6천여명에 선교사 15명, 한국인 신부 4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명도회가 존속한 1910년대에는 세계 제1차 대전의 여파로 5년간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파견되지 않았고, 게다가 한국에서 사목하고 있는 선교사들까지 징집되는 때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망즈 주교가 명도회, 공소회장, 전교회장에 대한 계획을 세운 때는 세계대전이 일기 이전이었다. 평신도에게 적극 기대한 그의 사목방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중에 한 획이 명도회였다.

 

끝으로, 현재까지 논의한 명도회가 계산성당 명도회인가 아니면 대구대목구 명도회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드망즈 주교의 초기구상에 의하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점은 계산본당 청년회 전체를 다루면서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본고에서 논의된 명도회 활동은 계산성당 내 명도회원들의 활동이었음을 밝혀둔다.

 

 

Ⅵ. 맺음말

 

본 연구는 1910년대 10년간의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은 명도회 회의록을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100여년 전에 결성되어 활동했던 청년단체의 조직과 운영, 활동했던 사람까지 자세히 보았다. 이로써 계산본당의 청년단체인 명도회의 역사와 그 실체가 일정 부분 밝혀졌다.

 

명도회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평신도들이 제대로 신앙을 익히고, 능력을 계발하고 서로 힘을 모아 능동적 활동을 하도록 조직하고 운영한 단체이다. 그 조직과 세부 운용, 회원들에 대하여는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했기에 간단히 요약한다.

 

첫째, 명도회는 청년단체이며, 상세한 『규칙서』를 지녔고, 회합 때마다 이를 공부하면서 『규칙서』에 준해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도회관이란 전용 모임 장소와 사무실을 갖추고 자치적으로 활동했다. 기본 자금이 있어 이를 이용하여 이식(利息) 사업이나 사회복지 사업을 했다.

 

둘째, 명도회는 총회와 평의회로 구별되고, 총회 밑에 전교부, 음악부, 교풍회 등 여러 개의 부서가 있었다. 임원들 임기는 1년인데 회장, 부회장, 총무와 부총무, 회계, 서기, 도리강사, 지도강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 간사 3명, 평의원이 15명 정도 있었고, 사무실을 지키는 상비원이 있었다. 임원들은 전부 회원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셋째, 명도회는 명예회원과 일반회원이 있었으며, 청년회라 불리면서도 15세부터 60세 넘는 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명도회 인원은 약 90명 정도인데, 10년 동안 「회록」에 나오는 이름으로 약 120여 명의 회원을 볼 수 있다. 5회 이상 결석한 회원은 제명되며, 입회 지원자는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입회할 수 있다. 회원은 입회금을 내고, 매월 월회비를 냈다.

 

넷째, 명도회 회원들은 서로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 형성된 인맥, 또 이들이 세운 협성학교나 해성학교와 서로 인연이 닿아 있었다. 특히 회원들은 혼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대구의 첫 신자인 김현상 집안과의 혼맥으로 서상돈, 김찬수, 김종구 등이 한 계열이고, 서상돈의 동생인 서상정의 집안과 최정복, 정준수 등이 또 한 계열이다. 개화 인사인 이일우와 이근우가 육촌간이며 이근우는 김현상 집안으로 다시 서상돈과 연결된다. 유흥민은 서상돈의 데릴 사위이다. 이외에 이들은 대모, 대자 등의 신척(神戚)으로도 엮여있었을 것이다.

 

다섯째, 명도회원들은 신심함양과 선교를 목적으로 부단히 훈련했다. 그들은 평균 2주일에 한번 정도 회합을 가지며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회원간 상호부조 등으로 신앙을 키웠다. 교풍회를 통해 회원들은 상호 좋은 생활규범을 지키도록 서로 권고했다. 모임에서는 주교 강론 등을 듣고, 성경을 읽고, 신앙적으로 민감한 주제들을 토론하며 직면한 사건들에 대해 회의를 했다. 이 힘으로 선교에 나선 그들 자신이 선교원이었다. 전교회장의 설치는 그 대표적 예이다.

 

명도회는 드망즈 주교가 공소회장, 전교회장과 더불어 평신도들의 협력을 얻어 선교에 주력하던 조직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도회에도 한계는 있다. 명도회는 당대 유능한 신자들이 모여 교회 발전 및 사회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한 청년단체이지만, 남성들만의 단체였다. 일제강점기 내내 가톨릭 청년단체라는 개념에는 여성이 포함되지 않았다. 또하나 명도회의 변화과정에서 보듯이 드망즈 주교는 신자들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격려했지만, 그 방향에서는 주교가 지향하는 방향으로만 허여하는 한계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본고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이 있음을 밝힌다. 명도회는 계산본당, 나아가 교구의 가장 중심 단체로서 민족혼을 일으킨 인적자원이었다. 그들은 교회 내외의 필요한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재정적 혹은 노동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협조자였다. 또 그들은 문화활동을 통해 선교와 사회개선을 도모했다. 명도회원들이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실천했던 훈련이나 그 내용, 또 그들이 사회적으로 펼쳤던 활동을 파악하는 일은 명도회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들이 계몽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본고에서 다루지 못한, 명도회원들이 행한 훈련과 대 사회활동, 애국 민족혼으로 뭉칠 수 있었던 과정 등은 곧 따로 원고로 작성하겠다.

 

본고는 1차 사료인 「회록」을 분석하여 사실을 찾아내는 첫 작업이므로 보완해야 할 사항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수정과 보완을 부탁드린다. 아울러, 명도회 회의록 자체가 귀한 자료일 뿐 아니라, 처음으로 그 내용이 소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회록」의 내용을 가능한한 정확히, 자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표를 이용했고, 각 내용의 관련된 자료를 모두 주에 달았음을 밝혀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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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일제강점기 대구대목구의 유급 전교회장(Catéchistes Ambulants) 운영」, 『교회사연구』 52, 2018 (이 논문은 순교 학술심포지엄 책자, 서종태 외, 『가족과 회장』, 도서출판 형제애, 2018, 재게재)

김정숙, 「영남지역의 천주교 유입과 그 지역사회화 과정」, 『19세기 이후 영남 지식인의 ‘신학문’과의 조우』(민족문화연구소 40주년 학술대회), 2018

김정숙, 「대구대교구 평신도의 항일운동」, 『3·1운동과 대구대교구』(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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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빛』, 「가톨릭 평화신문」, 「가톨릭신문」, 「大邱商議뉴스」, 「동아일보」, 「시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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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숙, 「계산본당 명도회 청년들의 3·1운동과 이후 항일 민족 운동」, 『3·1운동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0, 161-269쪽 참조

 

2) 3·1운동 거사자는 김구정, 김찬수, 김하정, 김흥렬, 서정도, 손명조, 이남숙, 이덕주, 유흥민, 정준수, 홍순일(이상 가나다 순) 등 11명이며 이중 김구정과 서정도는 신학생이었고, 이남숙이 해성학교 졸업생이었다.

 

3) 김정숙, 위의 논문, 2020, 212-218쪽

 

4) 대구대목구에는 명도회보다 앞섰다고 소개되는 청년단체가 있다. 1908년 계산성당 교회학교인 성립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1909년 성립학교 학생들이 성립학우회를 조직했다. 이는 학생들이 상호친목과 교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었는데, 1912년에 해체되었다.(윤광선, 「남방천주교 청년회가 「천주교회보」 창간」, 『빛』 3, 1983.07.) 성립학우회에 대하여는 이 학교 출신인 최정복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데, 교구 내 여러 청년단체들을 검토하다 보면 성립학우회의 존재가 모호해진다. 이는 별도의 작업으로 논하겠다. 한편, 대구대교구사에서는 명도회를 대구대목구 설정 이전의 유일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 한다.(『사랑과 은총의 자취』, 894쪽)

 

5) 교회 창설 초기에 주문모 신부에 의해 조직된 명도회가 있다. (초기 명도회에 대하여는 방상근, 「初期 敎會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1996 ; 「조선 천주교회의 명도회」, 『교회사연구』 46; 「명도회 II」, 『교회와 역사』 302호, 2000.07과 「立聖母始胎明道會牧訓」, 『교회사연구』 46 등이 있다). 이후로도 교회 내에서 시간을 두고 계속 명도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1910년대 대구 계산성당에서 활동했던 명도회만을 다룬다. 연속성의 문제, 활동 내용의 비교 등은 다른 원고로 미룬다.

 

6) 드망즈 주교의 사목활동을 논하거나 연관성 있는 주제를 다루면서 명도회가 부분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이종만, 「드망즈 주교의 조선 선교 활동」, 부산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2004 ; 김진소,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선교 방침과 민족 의식」, 『교회사연구』 11, 1996 ; 손숙경, 「1920년대 청년운동과 언양지역 가톨릭청년회 결성」, 『석당논총』 74, 2020, 김정숙의 앞의 논문, 2020 등

 

7) 최정복과 윤광선의 글에는 주가 없어 개별적 검토를 요한다. 최정복은 명도회와 이후 이어진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윤광선은 자신의 아버지 윤창두가 최정복과 함께 청년활동에 참여했다. 최정복과 윤광선은 시기는 다르지만 각각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와 「가톨릭시보」에서 일한 사람들이다.

 

8) 『大邱本堂百年史』, 1986, 229쪽

9) 최정복, 앞의 책, 137쪽

10) 자료를 제공하여 주신 이찬우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11) 2020년 손숙경이 『天主公敎彦陽靑年會書類綴』(1923년~1927년)을 이용하여 언양지방 천주공교 청년회에 대해 소개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몇 건의 산발적 기록의 모음이어서 해당 단체의 구체적 내용과 연속적 활동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손숙경, 앞의 논문, 2020). 원자료를 열람케 해주신 손숙경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12) 김정숙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대구의 3·1운동 지사들의 행적을 추적한 바 있다.(김정숙, 앞의 논문, 2020)

 

13) 『드망즈 주교 일기』와 「회록」 양쪽에 다 언급되어 있는 회합은 다음과 같다. 1915년 6월 13일-50차 회의; 1917년 10월 14일-95차 회의; 10월 21일-96차 회의 ; 10월 28일-97차 회의 ; 12월 23일-104차 회의 : 1918년 3월 17일-105차 회의 ; 9월 15일-109차 회의 ; 10월 20일-112차 회의. 상호 다른 관점을 볼 수 있다. 본고에서 표기하는 각 회의 앞의 차수는 자료를 구분하기 위해 필자가 순서대로 붙였음을 밝힌다. 한편, 김정숙, 위의 논문, 2020, 221쪽에 「회록」에 실린 회의가 총 118차라고 했는데, 통계 과정 중 2회차가 누락되었기에 이를 120차로 수정한다.

 

14) 『드망즈 주교 일기』, 1917년 6월 17일 일요일

15) 『드망즈 주교 일기』, 1918년 1월 13일 일요일

16) 『드망즈 주교 일기』, 1918년 6월 9일 일요일

17)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42쪽

 

18) 본고에서 다루는 「회록」에는 초기 약 1년여의 기록이 없다. 앞부분의 기록이 있었을텐데, 현재로서는 그 자료를 구할 수가 없다.

 

19) 구본식 편, 『김보록 신부 서한집』 2, 「1910-1911년도 경상도 대구구역 사목보고서」, 1996, 281쪽. 명도회를 남방천주공교 명도회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같은 명칭이다. 드망즈 주교의 1912년도 보고서에도 2년 전에 결성되었다고 했다.( 『敎區年報』, 30쪽)

 

20) 『김보록 신부 서한집』 2, 「1910-1911년도 경상도 대구구역 사목보고서」, 1996, 281쪽

21) 『敎區年報』 1912년 보고서, 30쪽 ; 『드망즈 주교 일기』 1911년 9월 3일 일요일

22)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안세화 주교 공문집』, 20-21쪽

23)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24)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25) 『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3월 19일 화요일 ; 『사랑과 은총의 자취』, 896쪽

26) 『敎區年報』 1911년도 보고서, 16쪽

27) 『드망즈 주교 일기』 1911년 9월 3일 일요일

28) 『드망즈 주교 일기』 1911년 12월 24일 일요일

29) 영남교회사연구소, 『이문희 대주교 공문 및 문서』 I, 2007, 8쪽

30) 『드망즈 주교 일기』 1915년 4월 4일 예수부활 부활 후 월요일

31) 언양공소 청년회도 50세까지였다.(손숙경, 앞의 논문, 2020, 119쪽)

32) 손숙경, 앞의 논문, 2020, 113쪽 주2 참조

33) 윤광선은 그가 1951년 1월 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윤광선, 「개화기 대구교육계의 은인」, 『빛』 1986.03)

34) 전규재, 앞의 책, 2003, 92쪽

35)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15일

36) 영남교회사연구소, 『대구교구 성직자와 본당 및 공소』, 2008, 51쪽

37) 「정하중 일기」 참고(정현재 선생님의 자료 제공에 감사드린다)

38) 「회록」 5차 1916.01.09. 회의 

39) 3·1운동 참여자들의 명도회 내의 활동은 김정숙의 앞의 논문(2020) 220-226쪽 참조

40) 손숙경, 앞의 논문, 2020, 124쪽

41) 『사랑과 은총의 자취』, 895쪽

42) Vicariat apostolique de Takou, Circulaire N°4. Taikou le 22, Août, 1911

43)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1쪽

 

44) 김정숙 「전교회장의 길」, 『빛』 354, 2012.10과 「일제강점기 대구대목구의 유급 전교회장(Catéchistes Ambulants) 운영」, 『교회사연구』 52, 2018 참조

 

45) 『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6월 29일 토요일

46)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47) 『드망즈 주교 일기』 1914년 6월 29일과 51차 1915.06.27.와 108차 1918.06.23. 회의 등

48) 『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3월 19일 화요일 ; 『大邱本堂百年史』, 228쪽 : 『사랑과 은총의 자취』, 896쪽

49) 『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3월 6일 수요일

50) 『大邱本堂百年史』, 228쪽 : 『사랑과 은총의 자취』, 896쪽

51) 『드망즈 주교 일기』 1911년 12월 24일 일요일과 1912년 3월 19일

 

52)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42쪽과 『드망즈 주교 일기』 1914년 3월 16일 월요일. 한편, 회관 이전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는데, 1913년 25차 회의(1913.09.21.)에서 회관 건물 이건을 언급하고, 그해 11월 30일 회의 이후 장소 이전 때문에 회의가 수개월 중단되었다.

 

53) 윤광선, 「천주교 청년회가 천주교회보 창간」, 『빛』, 1983.07

54) 「회록」 82차 1916.11.05. 이때 상비원은 서호경이었다. ; 119차 1920.09.04. 회의

55) 「회록」 11차 1912.11.17. 회의

56)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0쪽

57)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2, 281쪽

58) 「회록」 3차 1912.08.25. 회의

 

59) 「회록」 8차 1912.10.20. 회의; 한편, 1922년 결성된 언양청년회의 입회비는 1원, 회비는 매월 3전씩이었는데, 1926년부터 5전씩 내었다고 한다.(손숙경, 앞의 논문, 2020, 120쪽)

 

60)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42쪽

61) 「회록」 120차 1920.10.16. 회의

62) 「회록」 32차 1914.06.28. ; 33차 1914.07.12. ; 34차 1914.11.08. 37차 1914.12.06.; 41. 1915.01.03. 회의

63) 「회록」 117차 1920.04.11. ; 120차 1920.10.16. 남산동 가옥은 나중에서야 팔렸다.

64)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0-31쪽

65)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42쪽

66) 『드망즈 주교 일기』 1917년 6월 17일 일요일 ; 93차 1917.07.01. 회의

67)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74쪽

68) 『드망즈 주교 일기』 1917년 6월 17일 일요일

69)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70) 「회록」 7차 1912.10.20. 임시평의회

71) 「회록」 8차 1912.10.20. 임시총회

72) 「회록」 110차 1918.10.20. 회의

73) 대구대목구 공문 제4호 1911.8.22.

74) ex. 「회록」 17차 1913.03.09. 회의 등

75) 「회록」 7차 1912.10.20. 회의 그리고 84차 1916.12.17.에서는 평의원 궐원에 서병규로 구두 특천

76) 『드망즈 주교 일기』, 1913년 6월 30일 월요일

 

77) 명도회에서는 6월 들어서서 회장 서상돈이 매우 위독해지자, 6월 8일 19차 회의에서는 문병 갈 대표를 선출했다. 이어 다음 주 20차 회의에서는 일반회원이 서상돈의 건강을 위해 主母께 기구하기로 결정했었다.

 

78) 「회록」 23차 1913.07.13. 회의

79) 「회록」 24차 1913.09.18. 회의와 25차 1913.09.21. 회의

80) 「회록」 48차 1915.03.28. 회의

81) 「회록」 74차 1916.04.15. 회의

82) 「회록」 91차 1917.04.01. 회의

83)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2, 281쪽

 

84) 「회록」 114차 1918.11.03. 「출석인 44인이오 무고결석원이 32인이오 출타원이 7인이오 유고원이 4인이요, 병라원이 3인이라」 ; 이외 115차 1918.12.01. 회의 ; 116차 1918.12.08. 회의도 동일 형식

 

85) 「회록」 117차 1920.04.11. 「출석원이 32인이오 유고원이 19인이오 무고결석원이 39인이라」

86) 「회록」에 같은 사람인데 서로 다른 한자가 쓰여있는 경우, 이를 괄호 속에 명기했다.

 

87) 김정숙, 앞의 논문, 2020, 220쪽에 명도회 회원 102명의 명단이 게재되었는데, 당시는 제명된 위원이나 사망자들을 명단에 넣지 않아 숫자가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제명된 사람이나 사망자들도 10년 사이에 일정기간 활동했다고 보아 모두 회원 명단에 포함시켜 이를 수정한다.

 

88) 「회록」 4차 1912.09.15. 회의 ; 24차 1913.09.18. 회의 ; 87차 1917.03.04. 회의 ; 103차 1917.12.16. 회의

 

89) 제명된 회원 : 崔景瑞, 裵相順, 柳聖三, 徐相夏, 徐善五, 白應道, 金興烈, 安聖瑞, 秋賢瑞, 李乃衝, 金善龍, 孫基瑞, 鄭鳳鎭, 李重寬, 李致道, 張茂汝, 金應瑞 등 17명(이중 최경서와 이중관은 대선된 임원 명단에도 있는데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90) 「회록」 7차 1912.10.20. 회의; 9차 1912.10.27. 회의

91) 「회록」 25차 1913.09.21. 회의

92) 「회록」 27차 1913.10.09. 회의

93) 「회록」 28차 1913.10.12. 회의

 

94) 「회록」 26차 1913.10.05. ; 29차 1913.10.20. ; 30차 1913.11.23. ; 32차 1914.06.28. ; 45차 1915.01.24. ; 34차 1914.11.08. 회의

 

95) 「일제강점기 대구대목구의 유급 전교회장(Catéchistes Ambulants) 운영」, 『교회사연구』 52, 2018, 222-223쪽. 또 김정숙 「전교회장의 길」, 『빛』 354, 2012.10. 참조

 

96) 김정숙, 앞의 논문, 2018, 226-228쪽 ; 김정숙, 「일생을 바친 교회사 연구자」, 『불꽃의 향기』 2, 2017, 131-133쪽 ; 김정숙, 앞의 논문, 2020 참조

 

97) 윤광선, 「남방천주교 청년회가 「천주교회보」 창간>, 『빛』 3, 1983.07 ; 『大邱本堂百年史』, 229쪽

98) 「회록」 4차 1912.09.15. 주교가 音樂府의 발전에 관해 설명함

99) 「회록」 35차 1914.11.15. ; 39차 1914.12.19. ; 40차 1914.12.27. ; 41차 1915.01.03. ;45차 1915.01.24. 회의

100) 「회록」 105차 1918.03.17. 회의

101) 『드망즈 주교 일기』, 1915년 3월 20일 토요일

102) 「회록」 95차 1917.10.28. 회의

103) 「회록」 98차 1917.11.?. 회의(「회록」에 일자가 누락됨)

104) 「회록」 100차 1917.11.25. ; 101차 1917.12.?. 회의(「회록」에 일자가 누락됨)

105) 『드망즈 주교 일기』, 1917년 12월 23일 일요일

106) 「회록」 106차 1918.06.23. 회의

107) 「회록」 67차 1916.01.30. ; 69차 1916.03.12. 회의

108) 「회록」 119차 1920.09.04. 회의

109) 「회록」 101차 1917.12.?일 회의(일자가 누락됨)

110) 「회록」 18차 1913.05.18. ; 19차 1913.06.08. ; 20차 1913.06.15. ; 21차 1913.06.22. 회의

111) 「회록」 23차 1913.07.13. 회의

112) 「회록」 80차 1916.11.05 ; 85차 1917.03.04. 회의

113)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0쪽

114) 「회록」 8차 1912.10.27. 회의

115) 「회록」 7차 1912.10.20. 회의

116) 「회록」 105차 1918.03.17. 회의

117) 「회록」 112차 1918.10.20. 회의

118) 「회록」 8차 1912년 10월 27일 회의 「전 회에 가결된 토론은 규칙에 위반됨으로 철소되다」

119) 「회록」 34차 1914년 11월 18일 회의

120) 「회록」 3차 1912.08.25. 회의

121) 「회록」 65차 1916.01.09. 회의

 

122) 「회록」 111차 1918.09.29. 회의 ; 한편, 『드망즈 주교 일기』, 1918년 10월 20일에 명도회원들이 성모당에서 기도한 기록이 있는데, 성모당 기도는 회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서인지 같은 날인 「회록」 112차 회의록에서는 언급이 없다.

 

123)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0쪽

124) 「회록」 1차 1912.07.14. 회의

 

125) 「회록」 82차 1916.11.05. 회의에는 구신부, 77차 1916.06,04. 회의에는 문신부가 참석했다. 구신부는 Lacourts(具瑪瑟) 신부이며 문신부는 Mousset(文濟萬) 신부이다.

 

126) 7차, 17차, 22차, 24차, 27차, 44차, 47차, 73차, 90차, 99차, 106차, 118차 회의가 임시평의회 혹은 임시임원회였다.

127) 『敎區年報』 1912년도 보고서, 30쪽

128) 『大邱本堂百年史』, 228쪽과 『사랑과 은총의 자취』, 125쪽

129) 『敎區年報』 1913년도 보고서, 42쪽

130) 『드망즈 주교 일기』 1915년 6월 29일 화요일

131) 「회록」 49차 1915.05.16. 회의

132) 「회록」 105차 1918.06.16. 회의

133) 『大邱本堂百年史』, 229쪽

134) 김진소, 앞의 논문, 1996, 33쪽

135) 이종만, 앞의 논문, 2004, 72쪽

136) 『大邱本堂百年史』, 144-145쪽 ; 『사랑과 은총의 자취』, 896쪽

 

137) 『大邱本堂百年史』, 214쪽 ; 김정숙, 「성당스타일」, 『빛』 360, 2013.04.(『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경인문화사, 2015 재게재)

 

138) 윤광선, 「개화기 대구교육계의 은인」, 『빛』 ,1986.03

139) 『大邱本堂百年史』, 213쪽

 

140) 『드망즈 주교 일기』 1916년 3월 9일 목요일 ; 1924.09.14. ; 「시대일보」 1924.05.30., 「동아일보」 1920.09.23. ; 최정복, 앞의 책, 56쪽, 63-64쪽과 115-116쪽 ; 『大邱本堂百年史』, 241쪽 ; 『사랑과 은총의 자취』, 709-710쪽 등. 그는 1950년에 학교재산 전부와 경영권을 교회에 이양했다.

 

141) 윤광선, 「석년(石年)과 해성(海成)학교」, 『빛』 1997.10.

142) 정인열, 『대구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광역시 지부, 2018, 100쪽

143) 「동아일보」 1927.07.06.; 「동아일보」 1932.04.27.

144) 최정복, 앞의 책, 114쪽 ; 윤광선, 「개화기 대구교육계의 은인」, 『빛』 1986.03

 

145) 김정숙, 2018, 앞의 논문, 342-344쪽 ; 「일생을 바친 교회사 연구자」, 『불꽃의 향기』 2,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2017, 131-133쪽 참조

 

146) 『大邱本堂百年史』, 242쪽과 707쪽

147) 『大邱本堂百年史』, 248쪽

148) 『드망즈 주교 일기』 1935년 11월 12일 화요일

 

149) 윤광선, 「주교복사 김영은 선생』, 『빛』 1999.10. ; 「주교복사 김영은 선생(2)」, 『빛』 1999.11.,; 「주교 복사 송고 선생(3)」, 『빛』 1999.12.

 

150) 윤광선, 「서상돈의 외사촌 김종구 요셉」, 『빛』 1997.09.

151) ‘대구재계선각인들’, 「大邱商議뉴스」 1, 1979.4.15.

152) 최정복, 앞의 책, 30쪽과 77쪽

153) 최정복, 앞의 책, 33쪽, 서정섭의 외손서는 정행돈이다.

 

154) 윤광선, 「개화기 대구교육계의 은인」, 『빛』 1986.03. 또한 김종구는 서상돈의 외사촌이다(「김종구 회장과 해성학교」, 『빛』 1997.09.)

 

155) 정현재 증언(2021.1,11.) 『동래 정씨 창원공 파보』 3에 기록

156) 최정복, 앞의 책, 57쪽

157) 「회록」 113차 1918.10.27. 회의

158) 「회록」 120차 1920.10.16. 합병총회

 

159) 명도회가 해성청년회로 이행되는 과정은 김정숙, 앞의 논문, 2020, 226-231쪽 참조 : 『敎區年報』 1921년도 보고서, 99쪽 ; 『드망즈 주교 일기』 1921년 8월 3일 수요일 ; 1921년 8월 25일 목요일 ; 1922년 7월 2일 일요일 참조

 

160) 3·1운동 거사자들 중 김찬수, 김하정 등은 계속 해성학교에서 일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고, 유흥민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정준수는 만주 의민단에 들어가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며 활약했다. 유스티노신학교에서 퇴직당한 홍순일은 이덕주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계열 쪽으로 활동을 펴나갔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8,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숙(영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사학)]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92985&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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