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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51: 주인이 세 번 바뀐 여종 영애

137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5-18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1) 주인이 세 번 바뀐 여종 영애


노비 매매 증서가 신원 보증서 역할… 비선 조직 연결하는 연락책

 

 

- 「사학징의」에 나오는 정약종의 여종 영애 관련 기사.

 

 

미심쩍은 여종

 

사학 죄인이 대역부도죄로 사형되면 그 집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국고로 귀속되어야 할 몰수 재산 중 돈이 될만한 것은 중간에 다 털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다. 크게 한몫 잡는 일이어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혈안들이 되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썼다. “정약종의 재산은 정부의 특별한 명령으로 모두 몰수되었다. 그의 적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집안이 복권되는 것을 영구히 막아, 복수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이 와중에 정약종의 여종이었던 영애(永愛)에 대한 처분 문제가 불거졌다. 「사학징의」를 보면 1801년 4월 22일 호조에서 형조로 공문을 보내왔다. 서부에서 여종 영애를 붙잡아 들였으니, 그녀에 대한 매매 내력을 조사해 알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를 관적(官籍)에 몰수해 관노로 삼기 위한 예비 조사였다.

 

얼마 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의 첩보가 올라왔다. “삼가 공문의 내용에 따라 여러모로 탐문해 알아보니, 정약종의 여종 영애는 본래 전라도 정읍현의 여자아이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거두어 기른 어미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다. 정미년(1787)에 서울 도동(桃洞) 오선전(吳宣傳)의 집에 자매(自賣)하였고, 또 선혜청 서리인 조가(趙哥)에게 전매(轉賣)되었다. 을묘년(1795)에는 죄인 정약종이 돈 10냥을 조가에게 지급하고 사환으로 매득하였는데, 작년 8월에 영애가 7냥의 돈을 마련하여 지급하고는 속량(贖良) 되어 물러나기를 자원하므로 값을 감하여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 것이 확실하다.”

 

주인 정약종이 한 해 전인 1800년 8월에 이미 그녀를 속량하여 양인이 되게 했으므로, 그녀를 관적에 몰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단이었다. 영애는 1787년에 정읍에서 고아 상태로 양어미를 따라 상경했다. 그녀는 도저동(桃渚洞) 오선전의 집에 자신을 스스로 팔아 그 집의 여종이 되었다. 이후 선혜청 서리 조가의 집에 다시 팔렸고, 1795년에 정약종이 다시 그녀를 10냥에 샀다. 그러고는 5년 뒤에 정약종은 산 값도 못 되는 고작 7냥에 그녀를 노비의 굴레에서 벗겨 주었다.

 

 

세 주인의 실체

 

여종 영애는 불과 1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인이 세 번이나 뒤바뀌었고, 막판에는 원래 상태의 양민으로 돌아왔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형조에서는 “다만 그 여자가 세 차례나 전매되었고, 그 주인이 모두 사학에 관련된 자인 것은 내력이 수상하므로, 급하게 놓아 보내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이에 공문을 보냈으니, 공문이 가거든 즉시 위 영애를 관가 마당에 잡아다 놓고, 앞뒤의 내력과 사환으로 지낸 햇수, 속량을 허락받은 곡절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처분을 남겼다.

 

그녀를 샀던 세 사람이 모두 사학과 관련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녀를 샀던 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이제 이들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먼저 영애의 첫 주인인 오선전이다. 선전관(宣傳官)은 무직승지(武職承旨)로 일컬어지는 무관직으로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직책이었다. 오선전은 「사학징의」에 실린 이재신(李在新)의 공초에 따르면 도저동에 사는 천주교인 정재록(丁載祿, 1734∼1819)의 사위였다. 나주 정씨 족보에서 정재록을 찾아보니, 사위의 이름은 동복 오씨로 오대진(吳大晋, 1762∼?)이었다. 다시 동복 오씨 족보로 확인하니 그는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을 지냈다고 분명하게 나온다. 내외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정재록은 나주 정씨로 정약종과는 먼 일족이다. 정재록은 50세 되던 1783년 식년시에 진사 3등 22위로 급제했다.

 

두 번째 주인은 선혜청 서리 조가(趙哥)다. 그는 또 누구인가? 「사학징의」 속 여러 죄인의 공초 기록을 교차 검토해 볼 때, 그 역시 도저동에 살고 있었다. 이합규의 외숙모인 정분이(鄭分伊)의 공초에 강완숙의 여종 소명(小明)이 “서소문 안 선혜청 서리 조가의 이모 집”으로 가겠다고 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혜청 서리 조가의 집이 서소문 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선혜청은 오늘날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7번 출구 옆에 있었고, 그가 살았던 도저동은 바로 근처 남대문로 5가 법정동 인근이었다.

 

조가의 이름은 조신행(趙愼行)이다. 이경도의 공초에 “도저동에 사는 조신행이 자주 찾아와 어지러이 강론하였다”는 자백이 있고,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도 공초에서 “도저동에 사는 조신행과 이재신 또한 모두 사학을 믿는 사람”이라 한 언급이 나온다. 정광수는 “자를 이수(而秀)라 하는 이름을 모르는 조가(趙哥)”를 언급했는데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제관득은 공초에서 간혹 황사영의 집에 가서 잘 때 한밤중에 왕래한 사람으로 “한쪽 눈이 먼 조신행, 우수현(牛首峴)의 조가(趙哥)”를 거명했다. 이로 보아 조신행은 도저동에 살았고,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자를 이수(而秀)라 하고 선혜청 서리 직분을 맡았던 인물임이 확인된다. 그 또한 부부뿐 아니라 이모까지 온 집안이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국청에 끌려가서 매를 맞다 죽어서 「사학징의」 「장폐죄인질(杖斃罪人秩)」에 명단이 올랐다.

 

영애의 세 번째 주인은 1795년에 갑자기 정약종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약종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 분원에 살고 있었다. 정약종은 1799년에 약 2개월간 서울에서 지낸 일이 있었고, 가족과 함께 상경한 것은 1800년 5월의 일이었다. 어째서 서울 도저동에 살던 영애가 갑자기 광주 분원으로 팔려가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일상적인 노비 매매로 볼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겹쳐 있었다.

 

 

문서화된 신분 증명

 

그녀의 세 주인은 모두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부거나 핵심에 근접해 있던 열성 신자들이었다. 특히 앞쪽 두 사람과 연결된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신유박해 당시 서소문 안팎의 신자 조직 계보가 훤히 드러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궁금한 점은 영애를 두고 천주교 교인들 간에 반복적인 전매 행위가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교회 조직과 관련된 활동의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노비 매매 증서는 일종의 신원 보증서 역할을 겸했던 듯하다. 정읍에서 근거도 없이 상경한 그녀가 누구 집 여종이라는 문서화된 소속을 갖게 된 셈이다.

 

영애는 애초부터 천주교인이었기에 오대진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테고, 이후 다른 필요에 따라 다시 주인이 조신행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교중의 심부름이나 연락책 등에 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은 어째서 자주 바뀌었을까? 일종의 신분 세탁이 계속 있었다는 얘긴데, 이 또한 교회 지휘부의 판단에 따른 것일 듯하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는 오대진과 조신행을 거쳐서 정약종의 노비가 되었고, 세 사람 모두 소유권의 이전을 확실하게 문서화 해두었다. 정약종은 조신행에게 10냥을 주고 영애를 사환, 즉 심부름하는 종으로 사들였다. 그러다가 1800년 8월 영애는 7냥을 지급한 뒤 속량 되어 양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10냥에 산 여종을 7냥에 속량해준 셈이니, 정약종으로서는 상당히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돈이 실제로 오간 것이 아닌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영애가 광주에 사는 정약종의 사환이 되어 간 것은 당시 서울 교회와의 원활한 소통에 있어 그녀에게 모종의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영애는 어째서 이때 와서 스스로 양민으로 속량해줄 것을 청했을까? 정약종이 노비를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고, 본인의 요청이었다고 했다. 1800년 6월 임금 정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떴고, 8월은 4월 명도회의 설립 이후 교회 조직이 힘차게 되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교회 조직을 위해 그녀를 정약종의 울타리 밖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정약종은 명도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인 중에 노비의 신분으로 천주교인을 따라 주인이 바뀐 예는 영애 말고도 더 있다. 강완숙의 여종 소명(小明)은 당시 활동 범위가 넓어, 수많은 사람의 공초 속에 이름이 등장한다. 그녀는 원래 조시종의 처인 한신애의 여종이었으나, 강완숙에게로 보내졌다. 황일광 시몬도 처음에 홍주 땅에 살다가 1798년 홍산의 이존창를 통해 입교했다. 이후 경상도로 내려갔고, 1800년 2월에는 난데없이 광주 분원 정약종의 이웃으로 이사했다. 그러고는 다시 정약종을 따라 상경하여 정약종이 부쳐 살던 궁녀 문영인의 청석동 집에서 멀지 않은 정동의 주막집에 터전을 잡고 각종 연락책과 심부름을 하고 비선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것도 다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당시 천주교회는 각 지역 거점을 연결하는 중간 매개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각종 성물과 교리서의 유통과 보급뿐 아니라, 신자 조직 간의 모임 정보와 행사 정보를 공유하는 일도 이들의 발품을 통해야만 했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 또한 이 같은 비선 조직의 연결책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스러운 연결을 통해서만 만남이 이루어진 당시 천주교 조직의 특성상 이 같은 연락책의 존재와 역할은 교회에 불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여종 영애의 이야기는 그같은 정황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16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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