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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감사기도로 하늘에 닿는 사람들, 삼청공소 베타니아원

136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1-04-16

[앞서 걸어간 길] 감사기도로 하늘에 닿는 사람들, 삼청공소 베타니아원

 

 

삼청공소 신자들은 기도로 세상의 일을 이루어냄을 뼛속까지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2015년 10월 11일 삼청공소에서 임인덕(林仁德) 세바스티안 로틀러(Sebastian Rothler, 1935~2013) 신부 추모비를 세우는 날, 미사 중에 신자들이 은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였다. 우리를 기억해 준 은인들께 갚아달라는 기도 소리가 떨렸고, 그 순간 하나가 되어 훌쩍였다. “주님, 들으셨지요?”

 

 

영웅들의 사랑으로 채워진 삶의 터전

 

한센병이 발병한 자녀를 동네 모르게 내보낸 어머니가 저녁 후에 부뚜막에 밥 한 그릇 올려놓으면, 자식이 밤에 몰래 와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집안에서 살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거두어 주지 않는 이들, 본인들조차 이를 인정했고, 그렇게 방치된 사람들이 한센인이었다.

 

삼청공소의 회장 안토니오씨는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놀다가 무릎이 크게 벗겨졌는데, 피를 멈추게 하려고 운동장의 흙으로 벅벅 문질렀다. 시간이 흘러 피부 병변이 보이려 하자, 집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들어온 걸인 두 사람이 자기 병세를 알아채고 주소를 주면서 가보라고 했다. 14살 소년은 혼자 여기를 찾았고, 평생 마을지기가 되었다.

 

삼청마을은 왜관 수도원에서 약 4km 떨어진 마을로, 터널을 지나 산을 안고 안으로 들어간 자리에 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는 마치 하늘에서 선물로 내린 듯한 성당이 서 있다. 이 성당은 안 알빈(Alwin Schmid, 1904-1978) 신부가 설계하고 벽화를 그렸다. 알빈 신부가 직접 벽화까지 그런 곳은 많지 않다. 환자를 들것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치유 장면을 통해 벽화는 고통받는 이와 구원하는 이가 완결된 상승작용 속에서 결합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 안에서 신자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기쁨, 고통, 희망 등을 쏟아냈다. 신자 수는 약 140여 명, 50여 세대가 한마음으로 사는 동네다.

 

 

아픈 이들의 등댈 언덕, 호노라도 신부의 베타니아원 설립

 

1950년대 중반, 왜관 수도원의 남도광 호노라도(Honorat Millemann, 1903-1988) 신부가 이곳 땅을 사들여, 당시 ‘힘겹게’ 살고 있던 한센병 환우들의 정착촌을 시작했다. 남 신부는 북한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마지막 독일인 선교 사제이며, 왜관 수도원으로 재파견된 첫 번째 덕원 선교사다. 덕원 신학교 교수였던 그는 1949년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5년을 옥사덕 강제수용소에서 보내고, 독일로 송환되었다가 1955년 5월에 입국했다.

 

 

 

대구 베타니아 회장 김달호 교수가 갓 도착한 남 신부에게 삼청동 한센인들의 실태를 전했다. 남 신부는 이 티모테오 원장 신부의 허락을 얻어 현장을 방문했다. 약 30명이 모여 사는데 신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본국의 친지와 은인들에게 서신으로 딱한 사정을 호소하는 한편, 원장신부와 상의하여 이듬해 강당과 진료소를 세우기로 했다. 땅을 매입할 때는 이곳 관할인 왜관 본당 주임 김영근 베다 신부가 처리했다. 본당의 서금구 회장과 정행돈 교장이 도왔다.

 

남 신부는 당시 서독 신자들로부터 기금을 얻어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고, 차츰 농토 5만 평을 사들여 한 가구당 2백여 평씩 나눠주었다. 집도 20여 동이나 지어 주었다. 공소에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당, 간호사와 전교회장을 위한 사택(후일 사제관)과 진료실도 증축했다.

 

남 신부는 치료에도 관심을 기울여 매주 1회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고, 도와줄 조력자도 초청했다. 처음에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 두 명이 1955년 한국에 진출하여 7월부터 왜관에 자리 잡았다. 예수의 안나 막달레나 원장수녀는 삼청동에 자리 잡고, 부원장 예수의 안나 안토니아 수녀는 왜관읍에서 바느질로 생활비를 조달했다. 이들은 2년 후 떠났다. 그 뒤 오스트리아의 ‘인도적 경제발전 협조회’에서 5명의 회원이 내원했다. 이 무렵, 왜관 수도원에서는 삼청공소인들을 위한 전문의료 인력을 구했다. 이에 1959년 오스트리아 ‘그리스도 왕 시녀회’에서 간호사 수녀 세 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1961년까지 머물렀고, 이 수도공동체가 선물한 성모상이 이 성당에 있다. 이들 중 한 명인 마가렛(한국명 백수선)은 후일 소록도에서 “작은 할매”라 불리며 친구 마리안느와 평생을 보냈다.

 

삼청공소에서는 이후 유급 간호사 한 명을 초빙해서 주민들이 서로 투약 진료할 수 있게 된 1973년까지 고용했다. 진료는 격주로 피부과 의사가 왔고, 1968년 이후에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원의 디오메데스 의사 수녀가 담당했다. 주민들은 음성 환자로 바뀌었고, 치료와 병에 대한 상식도 늘었다. 1966년부터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감염된 적이 없다. 물론 어린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초기에는 김 데레사라는 초빙 전교회장이 어린이 교육까지 담당했다가 1970년부터 따로 초등교육 과정을 공부했다. 나중에는 모두 매원 국민학교를 거치 순심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71년부터 양계, 농사 등으로 베타니아원 전체가 자활이 가능해졌고, 같은 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1977년에는 드디어 당시 215명 자활의 터전인 ‘삼청동 농장’을 건설했는데, 그때 주민 54세대 224명 중 교우 수는 51세대 201명이었다. 역대 공소회장은 1대 조규식(1956-1959), 2대 박진희(1959-1968), 3대 김점이(1968-1971), 4대 박진희(1971- )로 이어졌다. 이들은 왜관 본당 신자이기 때문에 큰 행사에는 왜관 본당에 가서 참여했으나, 미사는 남 신부가 매주 도보로 와서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임인덕 신부, 스크린 속으로 세상 여행 이끌고

 

남 신부를 이은 사람은 임인덕 신부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이 공소를 사목했다. 임 신부가 삼청공소에 나가기 시작할 즈음 마을 주민 대부분은 병의 진행이 멈춘 음성 환자들이었다. 임 신부는 공소를 맡게 되면서 제대로 된 도랑을 만들고 도로를 포장했으며, 우물도 따로 파서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미국 구호단체에서 원조금을 받게 되자, 신자들의 의견대로 가장 어려운 가구부터 300만 원씩 무이자 3년 기한으로 빌려주었다. 주민들은 이 돈으로 닭과 돼지를 더 사서 축사와 양계장을 늘렸고, 모두 3년만에 돈을 상환했다. 자금은 다시 어려운 가구에 힘이 되었다.

 

 

 

임 신부는 특별히 삼청동 사람들에게 세상으로 향한 창이 되어 주었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주 건강한 정상아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임 신부는 이들이 놀이나 연극 등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의견을 나누도록 했다. 그가 마오로 기숙사 사감일 때는 학생들이 기숙사를 방문하여 도서관이나 오락실에서 놀기도 했다. 또 ‘산간학교’를 열어 아이들과 바다나 산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1987년 여름산간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 이때부터 그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었지만, 어느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삼청공소 젊은이들은 여름밤이면 성당 뒤 회관에 모여 신부가 들고 온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 속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실제, 임 신부는 삼청의 젊은이에게처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이 새로운 매체로 초대했다. 그는 「나자렛 예수」 등의 종교 영화뿐 아니라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등 명작들을 소개했고, 분도출판사에서 400여 권의 책을 펴내며, 전쟁 이후 시달리는 한국인의 품격을 개발하고 나아갈 세계를 제시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최초로 한센인 사업을 착수한 성 베네딕도회

 

2011년 임 신부는 건강이 나빠져 독일로 치료받으러 갔다가 2년 뒤 그곳에서 선종했다. 그리고 1년 후 임 신부를 따라 산간학교에 참여했던 꼬마들, 이제는 성숙한 사회인들이 된 그들이 추모비를 마련했다. 그들은, “가끔은 한센인 부모님을 외면하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삼청공소 정착 1세대 신자들은 남 신부의 금경축에 그를 어버이로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그 옆에 신자들 자녀들이 임 신부 추모비를 세웠다. 게다가 삼청공소는 성당과 벽화를 갓 짓고 그린 듯이 안 알빈 신부의 작품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삼청공소는 생활하면서 치료하고, 자녀와 헤어지지 않고 교육할 수 있는 정착촌의 모델이었다. 북한으로 파견되었던 남 신부, 만주로 파견되었던 안 알빈 신부와 남한의 선교사 임 신부는 시공간을 이어갔다. 그들은 삼청공소에서 가난했지만 당당하고 개인과 사회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영혼을 발견했고 자신들의 맑은 사랑을 그대로 펼쳤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를 향한 ‘감사의 샘’이 되었다. 수십 년간 연마된, 전원이 합송하는 힘차고 빠른 속도의 마을 저녁 공동기도는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피어남을 확신시킨다. 어쩌면 삼청공소는 사라져가는 전국 정착촌의 역사를 말하는 박물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부들이 수도원에서 삼청공소로 미시를 드리러 걷던 길은 좋은 묵상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대구대교구에서 최초로 한센인에게 주의를 기울인 이들은 성 베네딕도회다. 당시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센인들에게 삶의 무대를 만들어 함께 주님의 사랑을 찾아간 성 베네딕도회는 이 사업을 시작할 때, 회원이 다 들어갈 숙소조차 없어 여러 장소로 나뉘어 사는 때였다. 북한에서 인적 물적 토대를 모두 잃고 내려와, 대구대교구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에서 피난살이를 거쳐 왜관에 정착, 새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이 일이 왜관 수도 공동체의 특별한 소명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곳에 계속 기적을 쌓아갔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에세이작가연대와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역사서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외 다수의 공저와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등이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봄(Vol. 53), 김정숙 소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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