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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8일 (일)부활 제5주일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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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98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2-20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가난’

 

 

예수님이 참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첫 번째로 든 덕목은 ‘가난’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가난의 의미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를 드시며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찬미받으소서 11항)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극대화된 것을 교황께서는 ‘추출주의’(extractivism)라고 꼬집으십니다.

 

인류가 역사 안에서 얻게 된 모든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자원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재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존과 번영의 바탕이 된 ‘추출’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인류가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특별히 산업혁명 이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화석연료의 사용)은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기후위기’라는 재앙은 우리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방식을 새롭게 되돌아 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2023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UAE 두바이에서 2주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제28차 당사국 총회(COP)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당사국 총회는 파리 협정(2015년) 목표 달성이 어려운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또한 화석연료로부터의 에너지 전환에 대해 더욱 활발히 논의할 것을 약속하는 자리였습니다.

 

파리협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온실가스 배출 절감에 대한 인류의 노력이 미흡했다는 평가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 인류는 온실가스 배출 절감 노력의 미흡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거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류는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하여 응분의 대가를 자연현상을 통해 치를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상황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둔감합니다. ‘성장’과 ‘번영’이라는 논리에 젖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은 그저 새롭고 신기한 ‘뉴스거리’처럼 느껴지는 듯합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73장에서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疏而不失)’-하늘의 법망은 넓고 커서 엉성한데도 놓치는 것이 없다- 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악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해석해 보자면, 인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0년 9월 16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스페인 속담을 인용하시며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우리는 가끔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성의 결핍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첫 번째로 요청되는 생태 영성은 ‘참된 가난’의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처럼 ‘참된 가난’은 사람과 자연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참된 가난’이라는 영성이 ‘성장과 번영’이라는 굴레가 가져올 확실한 미래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류의 빛일 것입니다.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2)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

 

 

인간과 세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늘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서 죽는 순간까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변화될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셨습니다(1코린 15,52-53).

 

세상도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난 시대를 거쳐서 자연에 순응해 살았던 원시적인 삶의 양식을 지나 이제는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우주를 탐사하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나름의 사회질서를 만들어 삶을 함께 영위했던 시대를 원시시대라고 한다면, 원시시대에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인간의 주변 환경인 자연이 너무나도 광대했기에 인간은 자연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인구와 더 많은 인간의 욕구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인간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2020년 12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지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물 총량이 자연물을 넘어섰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플라스틱, 콘크리트 건물, 금속, 도로 등 인공물 총량은 약 1조 1000억 톤으로, 총 질량이 1조 톤인 자연이 만들어 낸 모든 생물의 총질량을 넘어섰다고 평가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인공물은 자연물의 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사이 인류는 자연물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인공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2040년이 되면 인공물은 약 3조 톤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지칭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인류는 지구 전체 생명체들 입장에서 보면 0.01%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0.01%의 인류가 지구 전체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류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결국 인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심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아우성이자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엄정한 현실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특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를 해친 것을 회개할 필요를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생태적 피해를 일으키면” 우리가 “크든 작든 피조물의 변형과 파괴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총대주교님께서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이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며 우리가 피조물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찬미받으소서」 8항)

 

총대주교님께서는 우리가 소비 대신 희생을, 탐욕 대신 관용을, 낭비 대신 나눔의 정신을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금욕주의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방법, 점차로 내가 바라는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는 공포와 욕망과 충동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9항)

 

우리는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갖고 일치할 것을 자연현상을 통해 요구받고 있습니다. “동일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일치를 이루는 토대이자 영성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멸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성장이자 살아남을 길일 것입니다. 이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요청되는 기후 위기 시대의 영성일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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