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부]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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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0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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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동방교부와 서방교부의 특성
그리스도인들의 최고 관심사는 '구원'이다.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구원은 공통된 관심사였지만, 동방교부들과 서방교부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동방교부들은 직관적이고 사변적이며 서정적이고 신비적이었던 반면, 서방교부들은 법적이고 실용적이며 윤리적이고 명료했다. 그 결과, 동방교부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누구인가?"(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라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서방교부들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교회론, 성사론)라는 문제에 주로 매달렸다.
사실, 동방교회의 중심이던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서 시작된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아리우스의 대답은 "예수는 초월적인 분이지만,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하느님과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자라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구원하시는 분'이 문제가 되었고, 제국의 동쪽 전체가 이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 최초의 보편 공의회를 니케아에 소집했고(니케아 공의회, 325년), 알렉산드리아의 부제였던 아타나시우스가 맹활약하여,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호모우시오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아리우스 논쟁은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서방교회에서는 심지어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해만 쌓여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사고방식과 언어(동방은 그리스어, 서방은 라틴어)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출신으로서 동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을 명쾌하게 정리해낸 교부가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프랑스 출신 힐라리우스이다.
동서방 교회의 다리 힐라리우스
힐라리우스(?~367년)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프와티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이 철학 저 철학에 기웃거렸다. 그러나 거기서는 참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성서를 얻어 만난 그는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알아 뵙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 늦깎이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350년에 프와티에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교회는 동서방을 막론하고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었지만, 힐라리우스는 니케아 공의회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니케아 정통 신앙보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힘을 더 실어주고 있었다. 황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학 논쟁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니케아 정통 신앙파의 버팀목이었던 아타나시우스를 이집트 사막으로 유배 보냈다(밀라노 교회회의의 결정, 355년).
힐라리우스도 이 결정에 반대하는 바람에 동방의 프리기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356~360년). 그러나 4년 동안의 유배생활은 힐라리우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서방교회의 주교로서 동방교회에 머물면서, 동방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던 신학 논쟁, 특히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다.
비록 귀양살이하는 몸이었지만, 갈리아 지방의 주교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학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동방 교회에서 열린 크고 작은 교회 회의에도 참석하면서 동서방 신학의 균형을 잡아나갔다. 힐라리우스의 과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조화시킬 수 있는 신학 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힐라리우스는 359년에 서방(리미니)과 동방(셀레우치아)에서 동시에 열린 교회회의를 통하여 신학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기 주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성자는 성부와 "성서 말씀에 따라 비슷하다"(유사파)는 모호한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힐라리우스의 꿈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 이듬해인 360년, '배교자'라는 별명을 지닌 율리아누스 황제의 종교무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고향에 돌아온 힐라리우스는 식지 않는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367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힐라리우스의 대표작 "삼위일체론"은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20년에 걸쳐 저술한 "삼위일체론"에 튼튼한 기초를 놓아주었다.
온건한 평화주의자 힐라리우스
정통신앙도 너무 극단적으로 몰고 나가면 이단이 된다.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면, 그저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라고만 앵무새처럼 노래하게 된다. 똑같은 하느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강생하셔서는 성자로, 성령 강림 때부터 성령으로 활동하신다는 주장(사벨리우스주의)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다른 한편, 아리우스주의자처럼 "성자는 성부와 다르다"는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을 놓쳐버리게 될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고 계시는 사랑의 일치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 힐라리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같음'과 '다름'을 다음과 같이 조화롭게 설명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unus)이지만, 홀로(solus) 계시지 않는다."
사려 깊은 힐라리우스는 정통 신앙 안에 머물면서도, 니케아 공의회의 '교의'(敎義, dogma)만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비슷하다'(호모이우스오스)라는 절충안을 제시함으로써, 소모적인 신학 논쟁으로 찢겨진 교회의 일치를 모색했다. 교의(敎義, dogma)의 말마디 자체를 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드는 자들을 두고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 dogmatista)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의는 자라나고 발전한다! 마치 어린아이의 몸이 어른의 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교의도 그렇게 자라나고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레렝의 빈첸티우스 교부가 남긴 말씀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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