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녹) 2026년 11월 3일 (화)연중 제31주간 화요일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영성ㅣ교육

sub_menu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 공동선

232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11-02

[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공동선>


- 공동선을 꿈꾸며 -

 

 

지난 겨울,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홍보하기 위해 네팔에 다녀왔습니다. 힌두교 문화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이 1%도 채 되지 않는 네팔에 한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곳의 청년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나 봅니다. 전국에서 모인 현지 청년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소수 종교인으로 살아가면서도 기쁘게 신앙을 지켜 가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6개월이 지났고, 뉴스를 통해 네팔 북부 지역에서 히말라야의 빙하가 붕괴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얼핏 보면 자연재해 같지만 기후변화와 빙하의 감소가 이러한 재난의 위험을 키웠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방문했던 지역은 피해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문득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시 먼 길을 떠나 우리를 만나러 왔던 청년들 가운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예전 같았다면 먼 나라의 재난 소식이기에 가벼운 기도와 함께 금방 잊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웃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저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이상 완전히 남의 세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그렇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 성찰 :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이 경험을 통해 ‘공동선’ 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경제적 성장과 풍요를 추구하는 동안 환경과 미래 세대, 그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들까지 충분히 생각해 왔는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많은 나라가 경제적 · 물질적 ‘선’을 이루었으니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선’은 과연 무엇이며 교회가 자주 이야기하는 ‘공동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간추린 사회교리』는 공동선이 단순히 여러 개인의 선을 합한 것이 아니며, “모든 이와 각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함께 해야만 달성하고 증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164항 참조). 즉 공동선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존중하면서 모든 사람이 더욱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단순히 자기 나라와 민족을 넘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미래 세대까지 포함합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함께 잘 살 수 있을까?”라고 물을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날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합니다. 네팔의 재난에서 볼 수 있듯 기후변화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자원, 소비 방식이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미래 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디지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동시에 거짓 정보와 혐오, 조작과 착취, 소외와 격차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만큼 중요한 질문은 “그 발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안에서 공동선은 지켜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2. 증거 : 공동선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공동선은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공동선은 거창한 사회적 구호나 제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라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형제들』 56-86항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이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한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이유로 멈추어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렇듯 공동선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특별히 2027 서울 WYD는 이러한 공동선의 실천을 디지털 세계에서도 드러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기술과 디지털 문화가 인간을 연결하기보다 갈라놓고, 누군가를 조작하고 착취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공동선에 봉사하는 발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디지털 공간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혐오와 폭력에 동참하지 않으며,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러한 실천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누리는 편리함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결국 공동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나의 선과 다른 사람의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열매 :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

 

2027년에는 세계 곳곳의 청년들이 서울에 모이게 됩니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경제적 환경이 서로 다르고, 그 가운데에는 전쟁과 가난, 차별과 종교적 어려움을 경험한 청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동선과 평화를 세상에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서 서울 WYD를 준비하는 지금부터 우리에게는 공동선을 향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계의 청년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WYD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만의 몫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난 겨울 네팔에서의 만남이 제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 것처럼, 서울에서 이루어질 만남 역시 우리와 세계 청년들의 시선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서울에서 함께 웃고 기도했던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저마다의 나라에서 재난이나 전쟁, 어려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을 모으며, 필요한 도움과 연대의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알고 서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순간, 세상의 문제는 조금씩 ‘남의 문제’에서 ‘나의 문제’,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문제’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라고 전합니다. 2027 서울 WYD가 남겨야 할 공동선의 열매도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우리’를 발견하고, 모두가 함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그 꿈을 실천하는 것. 바로 그때 서울 WYD에서 우리가 함께 외친 공동선은 하나의 구호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6년 11월호, 방종우 야고보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0 3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