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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16: 호밀밭의 파수꾼 - 순수와 경험

229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8-19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6) 「호밀밭의 파수꾼」: 순수와 경험


삶의 빛과 어둠 함께 품을 때 비로소 싹트는 구원의 희망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 「순수의 노래」(1789)가 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경험의 노래」(1794)는 아이가 자라서 순수성을 잃고 대면할 타락한 세상을 보여준다. 시인은 인간의 실존적 인식을 분석하면서 어느 쪽이 더 진리인가를 선택하기보다, 순수와 경험의 이중성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초대한다.

 

예수님도 가라지의 비유에서 선과 악의 공존에 대해 언급한다. 선한 주인은 세상이라는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와서 슬쩍 가라지를 심어 놓았다. 종들이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한다.(마태오 13,28-29 참조) 그러나 종말에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된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1951)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방황을 통하여 순수함과 죄스러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낸다. 16세 소년 주인공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 동안 뉴욕 호텔에 머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주인공은, 순수함과 타락한 세상 사이에서 성장통을 겪게 된다.

 

콜필드는 어른들의 세계를 ‘가짜(phony)’로 인식한다. 그는 전체 이야기에서 가짜라는 단어만 50번 이상 사용한다. 유사한 단어들도 자주 사용한다. 주인공은 어른들의 대화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사회적 규범 등은 위선적이고, 피상적이며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엘크턴 힐스 학교를 떠났던 이유는 “주변에 위선자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특히 교장 하스(Mr. Haas)가 학부모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른들의 속물근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교장은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과 일일이 악수한다.

 

그러나 “늙고 볼품없는 학부형들”, “엄마가 뚱뚱하거나 촌스럽게 보이거나, 아빠가 어깨가 널찍한 구식 양복을 입고 촌스러운 흑백 구두를 신었다고 치면 교장은 그런 사람들과는 악수만 하고 억지로 웃음을 던지며 그냥 지나쳐 버린다.” 콜필드는 이 “사기꾼” 같은 교장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고,” “너무 울적해서 미칠 지경”이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 피비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매우 넓은 호밀밭에서 몇천 명이나 되는 애들이 놀고 있는데, 자신이 “아주 가파른 벼랑 끝 옆에 서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벼랑 너머로 떨어지려고 하면 그 애를 붙잡아 주는 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고 싶다.

 

아이들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순수함을 잃고 가식적인 어른의 세계로 떨어짐을 함축한다. 어떤 비평가는 주인공의 이러한 희망이 “순수함과 타락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거의 세속화된 형태의 타락(원죄) 서사”라고 했다. 즉, 그가 추구하는 순수함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순수한 모습이 아니라,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서 바라본 순수함이다. 인간의 원죄 때 잃어버린 순수함과 관련이 있다.

 

비록 콜필드가 진정성 없는 어른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의 갈망은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일 뿐이다. 그의 문제는 인간의 죄스러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실하지만 불완전한 사랑이다. 아이들도 인간의 유한한 조건 속에 있으며, 결국엔 경험의 세계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박물관은 시간을 변화시키는 흐름으로부터 순수함을 보호하려는 그의 갈망을 상징한다. 박물관에서 “제일 좋은 것은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요.” 사람이 성장하고 나이 들며, “가짜”가 되는 현실과는 다르게, 언제 돌아와도 그곳에 있는 것들은 항상 그대로이다.

 

주인공이 순수함에 갇혀버린 이유 중 하나는 남동생 앨리의 죽음이다. 동생이 죽던 날 저녁,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맨손으로 차고의 모든 유리창을 박살 내고 병원에 입원하느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해결되지 않은 깊은 상처에 사로잡힌 그는 상실의 아픔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피비가 주인공에게 도대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첫 대답이, “난 앨리를 좋아해”이다. 즉시 동생이 “앨리는 죽었어…. 오빠는 항상 그 얘기만 한다고!”라고 하자, 자신도 알고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보다 몇천 배 더 좋은 사람”인 앨리를 좋아하는 걸 멈출 순 없다고 한다.

 

동생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상실에 대한 결정적 경험이다. 동시에 완전한 순수함의 화신이었던 앨리의 죽음은, 순수함이 단지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성스럽지만 쉽게 깨져버릴 수 있는, 삶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임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부서지지 않도록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려고 한다.

 

뉴욕에서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서 손을 내민다. 그러나 상실과 순수함에 멈춰버린 주인공의 자아는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며 방황한다. 마지막에 집을 떠나 서부로 도망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피비도 따라가겠다며 자신의 옷을 넣은 “무지막지하게 큰 가방”을 들고 따라온다.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 동물원에 가게 된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피비와 아이들이 말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황금색 고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말한다.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린애들이라는 게, 황금색 고리를 잡고 싶어 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겁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죠. 뭐, 그렇더라도 끼어들어 뭐라고 말하면 좋지 않거든요.”

 

마침내 주인공 콜필드는 변화와 상실과 어른이 되어가는 것의 필연성을 거부하면서 세상을 통제하려 했던 집착을 내려놓게 된다.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회전목마는 순수함이 멈추어진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그는 순수함을 그대로 멈춰 있게 하려는 보호자로서 역할을 버리고, “피비가 빙글빙글 돌고 또 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너무나 행복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세상은 순수와 경험, 선과 악의 공존이다. 동시에 우리 각자 개인의 내면 세계도 밀과 가라지라는 이중적 층을 이루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세상과 인간은 죄스러움이라는 현실적 조건을 피해 갈 수 없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관조할 수 있을 때, ‘가짜’가 아닌 ‘진정성’ 있는 어른이 된다.

 

주인공의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고, 순수에서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리려고 한 것이다. 어른의 세계로 성장해 간다는 것이, 순수함을 포기하고 위선과 가식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선한 주인이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두는 이유는, 혹시라도 밀의 선한 영향으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6년 8월 16일,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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