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 세계의 성모 성지: 아르헨티나 루한(성모상 성지)
-
257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11:44
-
[세계의 성모 성지] 아르헨티나 루한(성모상 성지)
루한의 성모
- 루한 성모 대성당의 내부
- 루한의 성모상1) 성모상의 역사
포르투갈 출신의 ‘안토니오 파리아스 데 사’는 자신의 영지인 수맘파(Sumampa)에 성모님을 기리는 경당을 세우기 위해 브라질에 사는 친구에게 성모상 제작을 의뢰하였다. 친구는 안토니오가 선택할 수 있도록 테라코타로 성모상 두 점을 제작하였다. 하나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님 단독의 무염시태 성모상이었다.
두 성모상은 각각 상자에 담겨 1630년 3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였고, 5월 초에 수레에 실려 수맘파로 사흘간 이동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65km 떨어진 루한 강가에 있는 로센도의 목장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출발하려 했으나 수레를 끄는 소들이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소를 바꾸고 짐을 일부 내려놓아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염시태 성모상 상자를 내려놓자 그제야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반꾼들은 성모님께서 이곳에 머무르기를 원하신다는 표징으로 받아들여 로센도의 목장을 찾아가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 성모상을 맡겼다. 로센도 가족은 성모상을 집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모셨다. 이 소식은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퍼져 나갔고,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로센도는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에 작은 경당을 세웠고, 성모상은 1674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수레에 실려 있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성모상은 수맘파에 무사히 도착했고 ‘위로의 성모’로 공경받게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아프리카 출신 노예인 엘 네그로 마누엘은 브라질에서 팔려 운송꾼들과 함께 오게 되면서 성모상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주인의 허락을 받아 성모상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성모상을 정성껏 돌보았으며 순례자들에게 성모상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로센도가 사망한 후 경당은 관리가 되지 않아 버려졌으나 마누엘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성모상을 보호하였다.
이 무렵 루한 강 인근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 장교의 미망인 도냐 아나 부인이 방치된 성모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로센도 영지의 관리인에게 성모상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고, 허락을 받아 새로운 경당을 마련하여 성모상을 옮겼다.
- 수맘파의 성모상(좌) 수맘파의 성모 성당(우)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제단에 모셔 두었던 성모상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놀란 도냐 아나는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성모상이 원래의 경당에 되돌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난을 의심한 그녀는 경당 바닥에 울타리까지 설치하였으나 성모상은 계속해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실은 교회에 보고되었고 교회 당국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모상은 엄숙한 행렬을 통해, 마누엘과 함께 새로운 경당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성모상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교회 당국은 이 내용을 교구장과 주지사에게 보고했으며, 이후 교회 당국은 성모상에 대한 공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도냐 아나 부인은 1677년 루한 강가에 넓은 부지를 기증하였고, 1685년 그곳에 또 하나의 경당이 세워졌다. 신자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1763년 12월 8일, 무염시태 대축일에 새로이 ‘루한 성모 성당’이 봉헌되었고, 이때부터 루한은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성모 순례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성모상을 실었던 마차(좌),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에 세워진 경당(복원)(우)
1810년, 5월 혁명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스페인 충성 세력인 왕당파와 독립 세력 사이에 독립전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 독립군과 민병대 사이에서는 루한의 성모님께 승리를 청하고 조국의 자유를 맡기는 신심이 널리 확산되었다. 전쟁에 출정하는 장군과 병사들은 루한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보호와 인도를 청하였다. 이러한 신심을 통해 루한의 성모님은 ‘아르헨티나의 자유를 지켜주시는 성모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누엘 벨그라노 역시 루한 성지에 머물며 미사에 참여하고, 성모상을 여러 차례 방문해 기도하였다. 그는 독립전쟁 중 자신의 지휘봉을 루한의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성모님께 자신을 맡긴 독립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1816년 7월 9일, 각 주의 대표들은 투쿠만에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날은 아르헨티나 국가의 공식적인 탄생일이 되었다.
2) 루한 성모 성지
성지는 오늘날 성모 대성당을 중심으로 박물관, 순례자를 위한 안내소와 고해실, 성물방, 그리고 대규모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887년 5월 15일, 호르헤 마리아 살베르 신부의 주도로 프랑스 건축가 울데릭 쿠르투아가 대성당의 설계를 시작하였다. 1890년 5월 6일 현재의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성당은 철거되었다. 신고딕양식으로 설계된 대성당은 길이 104m, 폭 68.5m, 정면 너비 42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1910년 12월 대성당이 봉헌되었으며, 성모상은 중앙제단에 모셔졌다. 중앙제단의 뒤쪽에는 성모 경당이 마련되어 있다. 1935년에는 정면에 각각 높이 106m에 달하는 두 개의 탑이 완공되면서 대성당 전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 루한 성모 대성당(좌) 중앙제단 뒤쪽의 성모 경당(우)
대성당 앞의 광장은 수십만 명이 모일 수 있는 규모로, 국가적 순례와 주요 행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특히 매년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발하는 대규모 도보 순례는 이 광장을 종착지로 삼고 있다. 2010년 5월 25일, 5월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엄숙한 미사가 루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미사는 훗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된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3) 교황과 루한의 성모
1886년 교황 레오 13세는 루한의 성모상에 대한 대관식을 승인하였고, 이듬해인 1887년 5월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1930년 성모상의 아르헨티아 도착 300주년을 맞아, 교황 비오 11세는 9월 8일 교서를 통해 루한의 성모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12월 8일 루한 대성당에 바실리카 칭호가 부여되었고, 후안 치멘토 몬시놀이 새로 설립된 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 6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루한의 성모 대성당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 되어 대성당 광장에서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야외 미사를 집전하고, 성모님께 황금 장미를 봉헌하였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이 되기 이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서 여러 차례 루한 성모 대성당을 순례하였다. 그는 루한 성지를 민중과 함께 걷는 순례의 자리로 이해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교황직에서 강조된 ‘민중 신앙’과 ‘가난한 교회’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성모님의 군단, 2026년 7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
추천 0
-

-
- [성지] 세계의 성모 성지: 아르헨티나 루한(성모상 성지)
-
2575
주호식
11:44
-
-
- [성인] 상징 속 성인 읽기: 성인의 삶과 상징 (7) 성 베네딕토 베네젯과 디종의 성 베니뇨
-
2574
주호식
11:34
-
-
- [순교자] 수원교구 하느님의 종 47위: 지금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
2573
주호식
11: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