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초대교회 사람들: 희미한 비선(秘線)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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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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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사람들] 희미한 비선(秘線)들
신유박해 당시 교회의 점과 점을 이으려면 반드시 이들을 연결시키는 비선의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점은 점으로 존재해야지, 이것이 선으로 연결되는 순간 자칫 전체 교회의 와해로 이어질 위험이 컸습니다. 비선의 존재는 상층 지도부만 알았고, 이들은 각각의 점 속에 흩어져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있었지요.
리베로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들은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평소에는 흔적도 없다가 이들이 슬쩍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사학징의》에 이따금 보입니다. 대묘동에 부쳐 살던 장덕유의 진술 속에 나오는 김국빈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포도청은 황사영의 체포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장덕유는 여주로 내려갔던 김국빈을 오랜만에 만나, 왜 이렇게 예정보다 늦게 상경했느냐고 묻습니다. 김국빈은 여주 읍내에 있을 때 충청도 내포에서 사학을 하다가 달아난 남녀를 많이 만났고, 그들을 가평 읍내에서 10리 남짓 되는 곳까지 데려가서 편히 지내게 해주고 오느라 그랬노라고 대답합니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썼지만, 멀리 충청도 내포에서 여주까지 어렵사리 피난 온 신자들이 도중에 어쩌다 만난 김국빈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내맡겼을 리는 없지요. 김국빈은 그러니까 서울과 여주 지역의 여러 거점들을 연결하는 중간 비선이었던 겁니다. 그는 처음 여주로 내려와서 감옥 안에서 이생원을 만나 투옥된 10여 명의 신자들을 만나 보았고, 이후 읍내 여관에 머물 때는 황사영을 데리고 달아나던 김한빈과도 조우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절대 우연일 수 없습니다. 이 지역 천주교 조직의 모든 점들이 다 그와 연결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김국빈은 내포 교우들을 가평 읍내 외곽의 다른 점 속으로 데려다주어 안착시켰는데, 이들은 이미 김국빈의 존재를 알고 그를 찾아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자신은 또 서울의 대묘동 및 아현동 조직과 긴밀한 연계를 맺어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 1800년 10월 경기도 광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그가 교중의 동정을 탐문하려고 상경하던 도중에 청파동을 지나다가 길에서 우연히 빈 가마니에 싸인 시신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홍낙민의 처형당한 시신임을 알게 된 그는 홍낙민을 조문한 뒤, 그의 아들 홍재영이 배교했단 말에 격분해 그 집까지 찾아가서 그를 준절하게 꾸짖습니다.
이 또한 길 가다 우연히 본 시신이 아니라 한덕운이 분명히 알고 찾아간 것입니다. 내친김에 홍재영의 집까지 갔고, 다시 서소문 밖으로 나가 최필제의 시신까지 직접 염습합니다. 그는 당시 명도회 중에서 부위과(扶危科)에 속한 일을 맡았던 중간 거점이었을 겁니다.
희미한 비선들, 좀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 숨통을 바짝 조여오던 박해의 서슬 속에서 끊어지거나 고립된 점들을 연결시키며 교회를 꿋꿋이 지켜냈던 것이지요. 이름이 드러날 길 없는 다른 비선들도 또 각처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해낸 일은 그다지 드러나지도 않고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스쳐 지나가듯 설핏한 뒷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힘으로 우리 교회는 그 험한 시절을 넘기고 또 버틸 수 있었습니다.
[2026년 7월 12일(가해) 연중 제15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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