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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가정 안에서의 환대: 부모자녀 갈들 - 의무가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

121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11:56

[가정 안에서의 환대] 부모자녀 갈들 01 – 의무가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

 

 

한 내담자는 자신이 원하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전공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고, 지도교수와 공동연구를 하며 학부생을 가르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짜인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전혀 달랐다. 모든 일이 버겁고,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막상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놓이면 하기 싫다는 감정이 먼저 치밀었고, 그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잘할 수 있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공부뿐이라 여겼고, 자연스럽게 공부는 그의 진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길 위에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상담을 통해 삶의 궤적을 찬찬히 따라가 보니 이유는 분명했다. 영재 코스를 밟으며 겪은 과도한 경쟁과 훈련 속에서 공부는 어느새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고, 점차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총명한 자녀를 두었다는 부모의 자부심 역시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부모의 개입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시와 재촉, 꾸중으로 이어졌고, 그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강점과 적성에 맞는 길을 걷고 있음에도 늘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렸다. 상담이 시작될 무렵에는 학업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그의 자동적인 자책에서 찾기 시작했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사실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부모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건넸던 언어가 내면에 새겨져 반복 재생되고 있는 것이었다. 망가진 녹음기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그 목소리를 스스로 인식하고 멈추는 일이 치유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낮은 자존감 위에서 선택된 진로였다. 그는 공부를 자신의 목을 조르는 괴물처럼 느끼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의무로만 인식된 공부는 하루하루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었다. 상담을 통해 그가 받아온 상처를 충분히 다루고 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남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이 공부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진로는 크게 어긋난 적이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작지 않은 것들을 이뤄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견뎌냈고, 잃어버린 시간도 없었다. 자책 대신 자신을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던 부모의 목소리로부터도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때 비로소 ‘공부’는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던 소망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의무로 짓눌렸던 지난날은 안타까웠지만, 이제 그는 같은 일을 전혀 다른 마음으로 하고 있었다. 의무가 소망으로 한 번 번역되었을 뿐인데,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에너지가 달라졌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종종 삶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이야기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의무로만 살아온 삶을 소망의 언어로 다시 번역할 수 있을 때, 변화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 이레지나 : 심리학박사, 부부가족치료전문가,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 소장,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2026년 6월 28일(가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인천주보 2면, 이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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