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50: 낙태법 폐지 100만 서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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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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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50) 낙태법 폐지 100만 서명운동
‘태아 생명 수호’ 100만 명의 목소리…교회 생명운동 꽃피우다
- 한국 천주교회는 1992년 낙태 허용 범위를 완화함에 따라 무제한적인 낙태 시술을 조장할 우려가 큰 형법 개정안 제135조에 반대해 100만 서명운동을 펼쳤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가 7월 13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낙태 반대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태아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정부의 낙태 합법화에 대한 일련의 법 개정 사안과 관련, 7월 13일 CCK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를 사실상 허용하고 있는 형법 제135조 개정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이 법안의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낙태법 반대 성명과 낙태법 폐지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 등 낙태 문제에 관한 일련의 주교단의 결단은 하루 평균 4100여 명의 태아가 살해되고 있는 현 사회 풍토와 이를 허용, 법적으로 묵인하고자 하는 정부 시책에 대해 인명 경시 사상을 척결하고 새 생명을 수호하려는 교회의 단호한 의지 표명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주교단은 ‘새로운 낙태법의 제정, 시행으로 인한 개개인의 인간성 황폐화는 물론 사회 전체의 윤리도덕성 추락을 묵과할 수 없다’며 ‘교회는 수태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됨을 믿고 태아의 생명이 어떠한 경우라도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함이 교회 공식 입장’이라고 공포했다.”(가톨릭신문 1992년 7월 19일자 1면 중에서)
1992년 한국 천주교회가 전개한 낙태법 폐지 100만 서명운동은 한국 현대 교회사와 사회 운동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종교적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교회 내부 운동이 아니라 국가의 인구 정책이라는 거대 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생명권’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론장에 끌어올린 최초의 대규모 시민운동이었습니다. 특히 주교단이 태아의 생명 수호를 위해 실정법 폐지를 요구하며 낙태 반대를 주장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한 것은 한국교회 200년 역사상 최초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수십 년간 지속된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정책으로 인해 낙태를 도덕적 죄악보다는 경제적 선택이나 피임의 보조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0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끌어낸 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에 대한 사회적 양심을 일깨운 사건이었습니다.
낙태 묵인으로 출산율 낮춰
1992년의 서명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과 그로 인해 조성된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은 경제 발전을 위해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 아래 강력한 가족계획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피임 기구 보급, 불임 수술 장려, 그리고 사실상의 낙태 묵인을 통해 출산율을 급격히 낮추려 했습니다.
이에 교회는 1961년 9월 「인구 문제와 산아 제한」이라는 주교단 사목교서를 통해 이러한 국가적 개입이 자연법과 하느님의 질서에 위배된다고 경고했으나, 경제 성장의 열망에 사로잡힌 사회적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낙태 논쟁의 법적 분수령은 1973년 유신 정권 아래에서 제정된 「모자보건법」이었습니다. 이 법은 제14조에 인공임신중절의 허용 한계를 명시함으로써, 형법상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낙태의 합법적 통로를 열어주었습니다. 당시 허용된 사유는 본인 또는 배우자의 우생학적·유전적 장애, 전염성 질환, 강간 및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그리고 보건학적 이유로 인한 임신부의 건강 위험 등이었습니다. 주교단은 이 법이 “생명 경시 풍조를 초래하고 모체 건강을 파괴”한다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유신 체제의 강력한 국가 권력 앞에서 제도의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형법 개정안 제135조
1980년대 이후 인구 정책은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둘도 많다’는 구호 아래 1자녀 갖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시기 한국의 낙태 건수는 연간 150만 건을 웃돌며 세계 1위 수준의 낙태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생아 출생 수보다 낙태되는 태아의 수가 두 배 가까이 많았으며, 이는 낙태가 일종의 사후 피임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지표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4월, 당시 법무부는 기존 형법의 낙태 처벌 조항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모자보건법」의 허용 범위를 완화하는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계가 가장 우려했던 점은 개정안이 배우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한 여성과 의사의 결정만으로 낙태를 가능하게 했고, 시술 의사와 심의 의사를 구분하지 않아 사실상 ‘낙태 자유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산부인과 병원 수입의 상당 부분이 낙태 시술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무제한적인 낙태가 조장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 가톨릭신문 1992년 7월 19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교회 전체 참여, 석 달 만에 100만 서명 달성
서명운동은 6월 12일 청주교구 사제단의 서명과 입법 반대 선언으로 시작됐고 전국 교구로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7월 13일, 주교단이 「형법 개정안 제135조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100만 서명운동의 개시를 선포했습니다. 각 본당은 주일 미사를 통해 서명운동의 취지를 설명해 신자들의 동참을 이끌었고, 신자들은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이며 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서명운동은 네 가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첫째, 영성 및 교육적 접근이었습니다. 태아의 발달 과정과 생명의 신비를 알리는 시각 자료를 배포하고 순회 강연회를 개최해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에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시켰습니다. 둘째는 시각적 실상 고발이었습니다. 낙태 현장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사진전을 열어, 낙태가 추상적인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살인 행위’임을 알렸습니다.
셋째, 범종교 및 사회적 연대입니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이웃 종교 지도자들이 서명에 동참함으로써 낙태 반대가 보편적 가치임을 입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압박입니다. 서명운동이 고조되던 1992년 말은 대통령 선거 국면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낙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고, 유력 후보들이 낙태 반대 의사를 공식 표명했습니다.
결국 서명운동 시작 단 3개월 만인 1992년 10월, 최종 집계 결과 105만9000명의 서명을 모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100만 서명운동의 성과
서명운동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는 독소 조항들의 일방적 통과를 저지한 것입니다. 비록 형법상 낙태죄가 크게 강화되거나 「모자보건법」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정부로 하여금 낙태 허용 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하는 정책이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성과는 한국 사회 전반의 ‘생명 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낙태를 심각한 윤리적·사회적 문제로 부각시킨 점입니다. 특히 서명운동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 내부에 강력한 생명 수호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2000년대 이후 더욱 전문화되고 조직화된 생명운동을 전개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5월 2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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