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초대교회 사람들: 사학 죄인 유배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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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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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사람들] 사학 죄인 유배 지침
1801년 4월 23일 경상 감영에서 형조로 공문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정복혜의 아들 윤석춘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온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공문이었습니다.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장기현은 정약용이 이미 유배와 있는 곳이다. 둘을 같이 두면 그곳 사람들에게 사학을 전파해서 물들이게 될 염려가 크다. 붙여 두어 서로 몰래 소식을 통하면 큰 문제가 생길 테니, 윤석춘의 유배지를 바꿔 주기 바란다.” 《사학징의》에 나옵니다.
천주교 관련 유배 죄인들이 신유박해로 쏟아져 나오자, 형조에서는 이들을 전국에 중복되지 않게 배정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천주교인이 한 고을에 1명 이상 배정될 경우 그곳이 새로운 포교의 거점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월 말에 정약용이 이미 장기로 유배 온 상태에서 담당자의 실수로 다시 윤석춘을 그곳에 배정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었습니다.
닷새 뒤 형조에서는 중첩을 면하기가 어렵지만, 장기현은 재정자립도까지 약하니 윤석춘의 유배지를 기장(機張)으로 변경하겠다는 공문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 아래 〈발배관문식(發配關文式)〉이란 공문 양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배 죄인을 보낼 때 쓰는 공문의 형식인데, 첫대목은 이렇습니다. “사학과 관련되어 유배된 자는 다른 죄인과 다르다. 보수(保授)를 맡은 주인은 내력이 분명하고 신중한 사람을 가려 정해, 그로 하여금 별도의 한 장소에 두게 해야 한다. 가두어 둘 경우, 대문과 울타리 밖으로 한 걸음도 멋대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바깥사람과 통하게 해서도 안 된다. 집안 사람이라도 한가한 말로 얘기를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
죄수를 유배 보낼 때는 죄질에 따라 거리를 고려해 장소를 정했고, 동일한 사안의 죄인이 너무 많을 경우는 유배지에서 이들 간의 접촉을 차단할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글 속의 보수 주인이란 유배 죄인이 머물도록 지정된 집의 주인을 가리킵니다. 정해진 장소에만 두고, 외부 출입도 막아라, 집안 사람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안 된다는 등의 지침을 내렸습니다. 자칫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그곳이 새로운 천주교 신앙의 거점이 될까 봐 염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보통 지식수준이 낮았고, 유배 죄인은 학식과 교양이 대단한 데다 교리에 해박하였으며, 도덕적으로도 큰 모범을 보여 주변이 쉽게 감화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지침은 실제로는 지켜지기가 어려웠습니다. 황사영의 부인 정명련이 노비로 제주도에 갔지만 그곳 보수 주인집에서 그녀는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존경받았고, 그녀가 죽자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고 추자도에서 노비로 살고 있던 아들 황경한에게 부고까지 보낸 것만 보더라도 이 같은 정황이 짐작됩니다.
유배지가 자칫 교회의 새로운 거점이 되어, 처벌이 도리어 확산의 빌미가 될까 봐 노심초사했던 당시 정부의 고민이 위 지침에서 느껴집니다. 실제로 유배 죄인의 가르침과 덕행에 감화되어 해당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가 새롭게 발생하는 예는 옛 기록에 심심찮게 보입니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감화되어 신앙을 받아들인 포졸도 적지 않았습니다.
[2026년 5월 10일(가해) 부활 제6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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