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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교의신학 안에서의 환대: 성사적 환대

226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4-15

[교의신학 안에서의 환대] 하느님과 나, 나와 이웃이 만나는 성사적 환대 (1)

 

 

환대는 단순히 당위적 명령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간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환대의 실현을 위해서 우선 우리 존재 안에 자리한 ‘타자’인 이웃, 그리고 ‘궁극적 타자’인 하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환대의 개념을 이해하는 작업은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나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심연의 신비적 차원을 정초(定礎)하는 일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포용하고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역동적 관계와 긴밀한 통교를 밝히는 것은 초대교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학과 영성이 지향해 온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이 말씀으로부터 현대 신학자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타자를 환대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수용 조건과 사랑의 구조를 마련하신 점을 누누이 상기시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현세의 삶에서 우리가 서로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환대에 어렴풋이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은 하느님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1코린 13,12) 것이며, 비로소 하느님께 온전히 환대받는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환대의 주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구원과 은총으로 인도됨으로써 우리는 환대의 객체로 초대받고, 오묘하게도 지상에서 하느님의 환대에 참여하는 우리 자신이 ‘환대받는 객체’에서 ‘환대하는 주체’로 변모하여 하늘과 땅을 품어 안습니다. 이렇듯 종말의 완성까지 우리는 주체와 객체, 천상과 지상이 교차하는 ‘교환의 신비’를 끊임없이 일으켜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형제애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으로 은유되는 ‘신을 향한 환대(theoxenia)’가 이웃 사랑을 가리키는 ‘인간을 향한 환대(philoxenia)’와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환대를 통해 나와 이웃, 즉 지상 교회 안에서 모두가 연결되고, 또한 나와 하느님, 곧 지상과 천상이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환대는 성사 개념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의 성사는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가시적 표징”(아우구스티누스), “은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도구”(토마스 아퀴나스) 등으로 정의됩니다. 이러한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자칫 하느님께서 구원과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위로부터의 하향성’에 매몰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열매 맺은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소통적 신비에 침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천상과 지상이 교제를 이루고, 하강과 상승의 움직임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신비로운 역동 안에서 성사의 꽃을 피워냅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성사적 존재로서 하느님과 나를 묶는 ‘종선’을 긋고, 나와 이웃을 엮는 ‘횡선’을 그으며, 그 중심에 방점을 찍는 삶입니다.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교차하듯, 우리 삶의 도화지에 종선과 횡선으로 무한한 십자가를 그려내며 하느님과 내가 일치되어 지상과 천상을 오르락내리락할 때, 지상에서 이웃과 내가 하나 될 때, 우리 자신은 환대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성사적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대를 살아내는 길, 이제 신비롭게 엮어내고 묶어내는 ‘성사적 환대’를 이어가는 것은 우리의 차례입니다. [2026년 4월 12일(가해)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인천주보 2면, 김용 미카엘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교의신학 안에서의 환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신비 안에서 이루는 성사적 환대 (2)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신비는 우리네 성스러운 환대를 풀어낼 유일한 토대가 됩니다. 환대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바로 ‘나와 다른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숭고하면서도 무거운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기 고유한 위격을 지니시면서도(다양성), 한 분 하느님으로서 완전한 친교(단일성)를 이루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적 환대의 원형입니다.

 

‘하나가 곧 셋’이라는, 논리적으로 양립하기 어렵고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불가해한 교의가 체계적이고 사변적인 논증을 거쳐 정립되기 이전에, 그 본질에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노래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부들과 초기 교회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법’(lex credendi)을 규정하는 논리가 앞섰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도와 찬미’(lex orandi)가 우선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의 정립은 차가운 지성을 통해 체계화되고 정립된 산물이기 이전에, 그 신비가 품은 본질인 ‘사랑’에 매료된 인간이 하늘을 향해 올린 찬양이었으며, 이웃 앞에서 드린 공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사랑의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타자를 환대하게 만드는 진정한 동력이 됩니다.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흘러 역사 안으로 진입하신 ‘계시 사건’, 곧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드러내시어 ‘원성사(Ursakrament)’라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러한 환대가 가능함을 희망적으로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상호 환대’의 기준이 세워집니다. 세상에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의 유한함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뇌, 불안, 그리고 그 유한성의 정점인 죽음까지도 기꺼이 수용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인간 존재 전체를 당신 안으로 환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환대에 인간은 반응하며, 마리아처럼 “당신의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라고 겸손되이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 세상으로 환대하며 품게 됩니다.

 

이렇듯 환대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며 환대의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교차해 나감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신비로운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8)라는 말씀처럼, 인간과 ‘타자’, 그리고 인간과 ‘궁극적 타자’이신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던 높은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느님과 인간, 신성과 인성, 초자연과 자연, 거룩함과 속됨을 가르던 장벽이 제거되었고, 이로써 두 주체는 자리를 바꿔 가며 환대하고, 환대받는 이가 되어 역동적인 환대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인간적이며 신적인 환대를 가능케 하는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경과 성전이라는 두 샘에서 길어 올린 생수인 교의들은 어렵고 난해하며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결코 다가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의는 우리를 사랑으로 향하게 하고(Lex orandi), 그 사랑을 고백하도록 이끌며(Lex credendi), 마침내 그 사랑을 뜨겁게 살아내도록(Lex vivendi) 촉구합니다. 환대는 곧 우리가 믿는 교의를 생생히 실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응답이며, 삶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2026년 4월 19일(가해) 부활 제3주일 인천주보 2면, 김용 미카엘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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