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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동료 선교사제들의 평판

193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2-30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동료 선교사제들의 평판

 

 

1. 머리말

2. 사제 시기와 전교 의지에 대한 평판

3. 조선 입국 여정 시기와 사목 활동에 대한 평판

4. 선종 이후 신앙·생애와 사목에 대한 회고와 평판

5. 맺음말



국문 초록

 

이 글은 동료 선교사제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평판을 정리한 것이다. 동료 지인의 약전과 송별기를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신학교 시절부터 해외 전교를 갈망하면서 선교사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교는 소년 시기부터 고집이 셌는데 나중에 견고한 의지와 용덕을 갖춘 선교사제로 성장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반기지 않던 조선 신자들은 주교의 조선 입국 의지를 확인하고 주교의 지시에 순명했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을 통해 신자들이 주교의 전교 열정과 신자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 감동했음을 알 수 있다.

 

페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교수였던 샤스탕 신부는 같이 플로피낭[페낭]에 체류하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교 열정과 그 성과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주교의 권유로 순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선 선교사제의 길을 갔다고 말했다.

 

모방 신부는 복건 지역과 내몽골 서만자 지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신앙과 전교 열정을 지켜보았다. 주교는 혹독한 여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잃었지만, 매일 고행과 기도에 매진했으며 깊은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방 신부 서한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앞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는 주교에게 부여된 역할은 마치 ‘모세’처럼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열고 그 자신을 따랐던 선교사제들을 대신 입국시키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에 대한 찬송과 더불어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주교가 요청한 만주 선교지의 분리 문제와 북경교구장 서리 겸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 대한 주교의 인식 문제가 그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시대에 살면서 주교의 조선 입국 여정에 참여했거나 인연을 맺은 조선 신자, 동료 선교사제들의 평판은 주교의 명성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주교의 삶과 활동, 인품과 업적을 고찰할 때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헌이 다시 소환되었고, 만주 마가자에 있던 그의 유해를 조선 땅으로 이장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교회 언론 기사나 이장기(移葬記)를 통해 주교의 신심과 활동이 재조명되고, 그의 명성이 퍼져나갔다.

 

조선대목구 설정 150주년(1981년)과 180주년(2011년)에도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2004년 마가자에서 주교의 원 묘소 자리를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개포동성당을 중심으로 주교에 대한 현양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 현양 사업은 서울대교구 차원으로 확산되었으며, 2024년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 수속 과정에 있다.

 

[교회사 연구 제65집, 2024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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