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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나 예언서

91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2-30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나 예언서

 

 

내용상 시대와 저작 시대의 괴리감 

 

요나 예언서는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소명을 받은 요나가 하느님이 보낸 곳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면서 시작되는 흥미로운 이야기, 바다에 빠졌는데도 죽지 않고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 요나의 짧은 심판 신탁에 아시리아의 모든 백성이 단숨에 회개하여 화를 면하고 구원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며 많은 사람에게 재미를 유발하며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의 독특함 중 하나는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여느 예언서들과 달리 요나서는 한 예언자에 관한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보면 니네베를 수도로 삼은 아시리아 제국이 번성했던 시기로 설정되어 있지요. 그래서 요나 예언서의 내용에서 설정된 시대 배경은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기 전인 기원전 8세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가 가지고 있는 문학 양식, 강조하는 신학적 가르침은 훨씬 후대의 작품임을 짐작게 해줍니다. 실제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라는 한 구절의 말로 대제국 아시리아의 임금부터 짐승까지 회개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또 가로지르는 데 사흘이 걸릴 정도로 크게 설정된 도시의 규모는 과장된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나 예언서를 기원전 5세기 이후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된 예언형식의 문학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5세기에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삼고, 예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저자가 전하려고 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폐쇄적이고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 고발

 

기원전 5세기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하며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복구하며,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기를 다짐하던 때입니다. 특히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유다인이 아닌 사람과 상종하지 말고, 만약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다면 이혼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도성에서 내보내라고 명령하며 종교적, 민족적 분리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요나서의 저자는 폐쇄적이고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져있던 당시의 종교와 사회지도자들의 모습을 주인공 요나로 풀어냅니다.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1,9)라며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한 사람입니다. 또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라고 할 만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고, 배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숨었으며, 풍랑을 만났을 때 신들에게 비는 뱃사람들과 달리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가 구원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과 권능을 알면서도 거부한 사람입니다. 기원전 5세기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며 종교와 사회 개혁에 동참한 유다 지도자들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믿었지만 그 자비가 남들에게 확장되는 것은 싫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원수들에게 펼쳐질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싫어 도망친 요나는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삼 일을 지낸 다음에야 니네베로 향했고,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단숨에 회개하여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은 내리기로 했던 재앙을 거두셨고, 이를 알게 된 요나는 화가 나서 하느님께 따집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3) 그러자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4,4) 

 

이어 그늘을 만들어 주던 아주까리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는 요나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0-11) 이 마지막 하느님의 질문이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로써 저자는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며, 이방인뿐 아니라 원수와 적들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우리만 구원되기를 바라는 나?

 

우리는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라시는 분이기를 바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자비와 자애와 너그러움이 내가 아닌 타인, 특히 내가 미워하는 원수, 나에게 상처를 준 적에게 향할 때는 어떻습니까? 만약 화가 나고 기분이 언짢다면, 이런 우리에게 요나 예언서의 저자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라는 말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한 결속력과 공동체의 연대성입니다. 이 결속력과 연대감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나’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면 또 다른 특성은 ‘우리 밖’을 향한 배타성과 ‘우리만’을 위한 폐쇄성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성당” “우리 꾸리아” “우리 쁘레시디움” …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면, 자칫 ‘우리’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힘만 발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애에 의지하는 우리는 세상과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펼쳐질 하느님 자비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 에필로그

2025년 한 해 동안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에 원고를 쓰며 예언서의 심도 있는 메시지와 예언자의 묵직한 삶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부족한 글로 만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2월호, 여한준 롯젤로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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