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9) 1976년 3·1 명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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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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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9) 1976년 3·1 명동 사건
억압의 시대에 양심을 외치다… 사회 정의 지키라는 주님 말씀 따라
불의 앞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1975년 12월 8일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를 반포했습니다. 1975년 성년 폐막에 즈음해,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10주년을 기념해 반포된 이 권고는 교회와 사회 정의 활동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즉 교회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은 나자렛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곧 교회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권고는 1974년 이후 폭압적 정권과 극도의 긴장 관계 속에 있던 한국교회에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불의한 현실 앞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 1976년 명동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1차 공판이 열린 5월 7일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 앞에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유신 체제와 교회의 각성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유신체제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1974년 정부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명분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을 대거 연행했고, 고문과 조작 수사는 일상처럼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유례없는 천주교 고위 성직자의 연행과 구속은 교회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제들의 자발적 모임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어 이후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5년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긴급조치가 잇달아 선포되었고, 언론과 시민사회는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에 놓였습니다. 특히 1975년 4월 새벽 단행된 인혁당 관련자들의 전격적 사형 집행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정권의 폭압성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고문과 불법 구금은 마치 정권의 통치 기술처럼 반복되었습니다. 모든 집회는 원천 봉쇄되었고, 주요 인사를 격리하고 성직자를 ‘순화’시키라는 지시가 각 경찰서로 속속 전달되었습니다.
억압이 불러온 결의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오히려 사회 정의 실현과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한 교회의 결의를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사제단은 공개 성명을 통해 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성당의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자유를 정면으로 탄압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기도회는 이 땅에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침해받는 인간의 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서 교회 본연의 사업을 실천하는 종교 행사이며… 신앙 행위를 문제성 있는 집회라 하여 봉쇄하려 함은 하느님의 뜻과 양심의 소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도덕적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직접적인 종교 탄압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것이다….”(가톨릭시보 1975년 2월 9일자 1면)
정권의 폭압에 대한 국내외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는 결국 1975년 2월 17일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지학순 주교 등 일부 양심수를 석방했습니다.
명동 3·1선언, 유신독재에 대한 선명한 저항
1976년 한국 사회는 더욱 짙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반대 세력은 봉쇄되었고 재야 지도자들은 잇달아 구금되었습니다. 1974년 인혁당 사건의 문제를 제기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시노트 신부가 추방당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 사제들과 신앙인들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시대에 교회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곧 복음에 대한 배신이라는 자각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교단과 재야인사들이 뜻을 모아 마침내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재야인사와 개신교 목사들이 주도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적극 협조한 사건으로,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의지를 집결시킨, 유신 독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저항으로 평가됩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 집전하는 3·1절 기념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천주교 사제 7명과 문익환·김대중 등 개신교 성직자 및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시보 3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3·1절 기념미사가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약 7백 명의 남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20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가톨릭시보 1976년 3월 7일자 7면)
이 기사 자체는 매우 짧지만, 오히려 그 간략함이 사태의 심각성과 당시 언론의 제약을 짐작하게 합니다. 같은 해 가톨릭시보 3월 28일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 가톨릭시보 1976년 3월 28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성직자 3名을 구속 - 긴급조치 9호 위반, 4명은 불구속 입건 - 서울 지검은 10일 하오 서울대교구 응암동본당 주임 함세웅(35) 신부와 전주교구 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 문정현(36) 신부 및 원주교구 봉산동본당 주임 신현봉(46) 신부를 지난 1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 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에 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재야인사 8명과 함께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또한 서울대교구 신림동본당 주임 김승훈(36) 신부, 수색본당 주임 김택암(37) 신부, 동대문본당 주임 안충석(37) 신부, 영등포본당 주임 장덕필(36) 신부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가톨릭시보 1976년 3월 28일자 1면)
당국의 발표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긴 했지만 이 보도는 3·1절 기념미사와 선언이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에 못지않은 큰 파장을 불러올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명동성당에서는 매년 3월 1일마다 제2, 제3의 구국선언이 이어졌고, 명동성당은 자연스럽게 시국 기도회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라, 억압의 시대에 인간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시 길을 찾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74년부터 이어진 길고도 고통스러운 체험과 그 속에서 길러진 분노와 성찰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2월 7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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