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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달리타스, 성령께서 바라시는 교회를 꿈꾸기 위하여

96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1-05

[구역반장 월례연수] 시노달리타스, 성령께서 바라시는 교회를 꿈꾸기 위하여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제16차 세계 주교시노드가 개최되었습니다. 2021년 말부터 전 세계 각 본당, 단체 등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경청의 과정을 거쳤고, 여기에서 나온 의견들이 2023-2024년 두 번의 회기 안에서 다룰 의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4년 10월에 최종문헌이 발표되었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최근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일 것입니다.

 

적당한 한국어가 없어서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는 신자들에게 발음부터 쉽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노달리타스를 3천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교회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어 ‘쉬노도스’에서 온 단어로서, 쉬노도스는 ‘함께 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에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 곧 교황님, 주교님, 사제와 부제, 수도자, 평신도들 모두가 함께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함께 교회의 충만한 완성을 향해 걸어간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교회는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회중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한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2 2023, 6항)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고,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누리는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되었으며, 하느님을 거룩하게 섬기면서 동시에 세상 사람들도 이 친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은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받은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씀하신 것처럼(신학대전 3부 71문 4절 답3), 이 사명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이 삶과 사명에 모두가 참여한다는 것을 골자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것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가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특히 ‘관계’의 측면이 그러한데, 성직자와 평신도, 수도자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성직자들 사이, 평신도들 사이, 수도자들 사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간의 관계에서 우리가 서로를 ‘함께 가는 동반자’로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고 다른 이들도 그 몫을 하도록 도우면서 우리가 공통으로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데 협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저마다의 몫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구체적이고 기초적인 태도가 바로 대화와 소통입니다.

 

시노달리타스 방식의 과정은 ‘대화-성찰-식별-결정실행’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참으로 시노달리타스 방식이기 위해서는 이 과정들이 순환적이어야 합니다. 먼저 대화의 과정부터 보겠습니다. 대화와 소통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우리 사이에 어떤 ‘합의’를 끌어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교회, 이 공동체에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살게 하시는 이도, 일치시키는 이도,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수행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흡사해 보이는 시노달리타스지만 그것과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가진 품위의 인정과 능동적 참여라는 점에서는 민주주의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다수결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식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누구에게든 활동하십니다. 여기에 서로 경청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경청하는 교회이고, 경청이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교회입니다. 바로 상호 경청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백성, 주교단, 로마 주교, 그 각자는 다른 이들을 경청하고, 모든 이는 성령, 곧 “진리의 영”(요한 14,17)을 경청하여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을 알게 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주교대의원회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2015.10.7.)

 

그러므로 경청이란, 단순히 평신도의 말만을 듣는 것도, 성직자의 말만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함께 식별하고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자유롭고 질서있게’ 살고, 활동하고, 걸어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 바로 교계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는 교계제도의 역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감의 여정 안에서 그 역할을 ‘새롭게’ 이해할 것을 요청합니다. 단순히 신자들의 의견에 끌려가는 것도, 그렇다고 신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독단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신자들이 자신의 몫을 잘할 수 있도록 돌보면서 이 여정을 책임있게 이끌어갈 것이 요청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상호 호혜적 관계 속에서 저마다의 몫을 하며 함께 하느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것과 복음선포라는 공통의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는, 일하는, 걸어가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와 세상 안에서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표징들을 함께 읽어야 하고, 우리의 활동 내용과 방식을 결정해야 하며, 결정한 것에 저마다의 몫으로 기여하고 함께 협력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통해 항상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해 나갑니다. 이런 면에서 시노달리타스 과정은 일련의 순환과정입니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5년 11월호, 최현순 데레사 교수(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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