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존중(종교간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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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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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존중(종교간 대화)
지난 여름, 안동 토계리에 위치한 도산서원을 방문했습니다. 서원을 거닐다가 잠시 도산서당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안내하시던 분이 다가와 설명을 마치신 후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조복’(造福)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인복, 자식복, 건강복, 장수복, 학복, 관복 등 다양한 복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복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이며, 이런 복을 구하는 것을 기복(祈福)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퇴계 이황 선생이 말한 ‘조복’은 조금 다릅니다. 조복은 단순히 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복을 뜻합니다. 남의 허물을 전하면 그 해가 결국 내게 돌아오듯, 반대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隱惡), 선행을 드러내 칭찬하면(揚善), 상대도 나를 좋게 여기게 됩니다. 그 덕에 관계가 깊어지고, 복은 돌고 돌아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지요. 이것이 바로 ‘복을 지어가는 삶’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보편 성화의 소명’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 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모두 자기 삶에서 완덕을 지향하며, 증거와 모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은 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헌신과 덕의 실천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지 않습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덕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은총에 협력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성화의 길로 계속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는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수양을 통해 이루는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은총에 협력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전통 모두 자기 수양과 성화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른 종교 전통 안에도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말씀의 씨앗’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의 좋은 가르침을 배척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히려 그것을 존중하며, 우리 삶 속에서 복음과 만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차이는 차별이 아니며, 다름은 다툼의 이유가 아니니까요.
오랜 인격 수양을 한 사상가의 ‘조복’이라는 두 글자는 신앙인의 삶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도 복을 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협력하여 복을 짓는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이의 선을 드러내고, 은총 안에서 성숙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방인을 존중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고, 참된 복을 짓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것입니다.
[2025년 9월 14일(다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서울주보 5면, 전인걸 요한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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