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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2: 한국 네오고딕 성당의 기원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175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1-09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 · 2] 한국 네오고딕 성당의 기원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

 

 

유년 시절과 19세기 유럽 도시의 성당이 있는 풍경

 

으젠느 장 조르주 코스트(Eugène-Jean-Georges Coste, 高宜善) 신부는 1842년 4월 프랑스 에로(Hérault) 지방의 몽타르노(Montarnaud)에 있는 오래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옛 성이 보이는 경치 좋은 아름다운 마을1)에 자리 잡은 코스트 가족은 따뜻하고 우애가 깊었다. 특히 코스트 신부는 선교사들의 편지 혹은 뮈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온 가족의 신뢰를 받는 가장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곧잘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등2) ‘소박한’ 예술성을 보여주었던 코스트 신부는 한국에 막 도착해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사람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려 노력했으며, 동료들은 그의 겸손과 미덕을 칭찬하였다. 반면 그가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의 뒤를 이을 제8대 조선대목구장 후보로 추천되었을 때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신부는 선교 경험 부족과 좋지 못한 건강, 특정 임무만 맡아 했기 때문에 한국 선교지 최전선에서 발생하는 세세한 문제들을 잘 모르는 등의 대표직 자질 문제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예술적 기질과 열린 마음 덕분에 협동이 중요한 건축에 주로 종사했기에 코스트 신부는 일반 대표직보다는 경리계의 건축 담당직에 무척 어울렸다.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예술적 영감이 환경 및 교육에 바탕을 두었던 것처럼, 사제 교육 외에 다른 특별한 예술 경험이 없던 코스트 신부도 이 시절의 기억이 이후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벨몽(Belmont) 소신학교와 몽펠리에(Montpellier)에 있는 대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866년 12월 10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몽펠리에 대성당은 19세기에 이르러 확장되었고, 1855~1875년에는 종탑이 다시 만들어졌다. 이 성당의 구조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말레이시아 믈라카(Malacca)에 세운 성 프랑수아 자비에(St. François Xavier) 성당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866~1869년에는 몽펠리에의 성 안느 성당3)이 당시 유행하던 네오고딕 양식으로 재건되고 있던 때였다. 이 성당은 양식이나 구조, 규모 면에서 약현의 성 요셉 성당, 종현(현 명동) 대성당과 비교해 볼 만한 자료를 제공한다.

 

 

 

프랑스의 작은 교회들은 네오로만(néo-roman) 양식이 적절하게 적용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대성당과 같은 규모 있는 성당 건축은 금속 등의 새로운 건축 자재들이 사용되어 이 시기에 이르러 고딕 예술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딕 양식은 중세 후반에서 16세기 중반, 혹은 일부 국가에서는 17세기까지 발전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역사주의와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고딕 예술은 네오고딕(néogothique)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는데, 이때는 고전의 전통과 근대성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즉 형식과 논리는 옛 것을 따르되 철과 유리, 벽돌이라는 새로운 근대 건축 재료가 고딕 예술을 재현하게 된 것이다. 규모나 경제적인 이유로 절충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지역별 전통이 가미된 형태나 다색채(polychromie) 등의 기법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성당 건축은 한 가지 양식으로 뭉뚱그려 설명하기보다는 개별 건물마다 분석할 필요가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재평가될 가치도 충분하다.

 

이 시기의 유럽 중소도시에 신축되는 성당들이 네오고딕 즉 신(新)고딕 양식의 성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는 도시와 시골 마을의 현대화에 따른 건축 붐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학교, 공공기관 그리고 종교 건축물들이 신축 혹은 개축 공사를 계획했으며, 종교 건축물들은 정교 협약(Concordat) 이후 간소화된 종교 의식 및 반종교적·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개·보수 요청이 많아졌다. 즉 짧은 시간 내에 새 건축 계획을 세우고 제한된 예산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어느 정도 표준화된 일종의 모델이 필요했으며, 건축가들은 고딕 건축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장 밥티스트 라쉬(Jean-Baptiste Lassus, 1807~1857)는 양쪽에 대칭되는 첨탑을 세우거나 중앙에 종탑을 세우고 위에 매우 날카로운 첨탑을 왕관처럼 씌우는 방식으로 한 가지 유형을 만들었다. 반면 비올레 르 뒥(Eugène Viollet le-Duc, 1814~1879)의 경우는 중세 시대의 그림문자 등에서 영감을 얻어 수목이 떠받치고 있는 듯한 형태로 각 기둥보 사이와 부축벽4의 균형을 건축 언어로 발전시켰다. 고딕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인 넓고 높은 궁륭식(穹窿式) 천장과 내부 공간에 빛을 만드는 높은 창을 만들기에 이와 같은 부축벽이 적절한 구조였던 것이다. 두 개의 대칭적인 첨탑이 있는 파사드(façade) 또는 날카로운 첨탑으로 장식된 중앙 종탑이 있는 네오고딕 성당의 정형적인 모습은 경제적인 실용 건축5)이 필요한 시대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여정 중에 만난 성당들

 

코스트 신부는 오주프(Pierre Marie Osouf, 1829~1906) 신부가 대표로 있는 홍콩에서 부대표로 처음 일을 시작하였다. 1870년 12월 말부터 약 1년 반 동안은 요양소 건설에 종사하게 된 파트리아(C.E. Patriat, 1828~1887) 신부를 대신해 싱가포르 대표가 되었다. 1872년부터는 코스트 신부가 홍콩으로 다시 돌아와 베타니(Bethany) 요양소 건축 현장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건축 예술적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된다.

 

“1873년 6월에 오주프 신부는 르베디오스 씨에게서 그들이 얘기한 대지를 샀다. […] 보좌 신부였던 코스트 신부의 도움으로 오주프 신부는 즉시 새로운 (베타니) 요양소와 부속 성당의 설계도를 그렸다. (건축) 계획은 아주 열정적이었는데 홍콩과 극동 아시아 지역 최초의 요양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시절에는 영국 식민지에서 건축 시공에 관한 어떤 특별한 규범이 없었다. 오주프 신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특히 공용 건물과 부속 성당의 설계는 그의 역량으로 가능해 보였으므로 결국 스스로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6)

 

코스트 신부는 1874년부터 1885년까지 상하이, 만주, 요코하마(橫濱), 나가사키(長崎)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네오고딕 양식의 예술을 접하였다.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단계적으로 조선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고, 1885년에 마침내 조선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성 후베르토 성당의 서양식 주교관을 방문하기도 하고, 리델(F.C. Ridel, 李福明) 신부 등 동료들과 ‘첨두아치가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地殿, la cathédrale Notre-Dame des Neignes)에 임시 거처를 두기도 했다.7) 상하이와 만주에서 잠시 머문 것 외에도 베이징(北京) · 우한(武漢) · 광둥(廣東) · 텐진(天津) 등 중국의 대도시나 외국 무역에 개방된 중요한 항구에서 머물렀는데, 특히 베이징에서는 19세기 말 선교사들이 지은 성당을 방문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회계 장부에 기록된 체푸(芝罘)8)에서 온 노동자들이 한국 성당 건축 현장에 참여해 주로 벽돌 건물을 짓는 공사를 지휘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요코하마의 성심 성당(la cathédrale du SacréCœur)은 1862년에 완공되어 문을 열었으며, 1898년에 중앙 홀을 높이는 등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06년에는 신자들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 두 개의 탑이 있는 벽돌로 된 새 성당을 지었는데,9)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재건되었다. 1881년경 코스트 신부는 나가사키에서 한국에 대한 조달 업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떠나기 전 나가사키에 있는 26위 순교자의 교회인 오우라(大浦, l’église Oura) 성당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898년 2월 20일 이 성당을 방문한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6시 반경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 아침 식사를 하고는 분느(Boune) 신부와 같이 1897년 9월 8일에 낙성된 26위 순교자 새 성당을 방문하러 갔다. 전체적인 형태는 우리 대성당과 거의 같았는데, 좀 작았다. 회중석에는 벽돌 기둥이 아니고 원주(圓柱)뿐이고, 또 그 위는 벽토로 되어 있었다. 아주 넓은 내진(內陣) 주위에는 회랑이 있는데, 좌우에는 없었다. 그러나 양편에 나무 제대로 된 세 개의 소성당이 있었다. 중앙 제대 역시 목재인데, 대단히 컸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매괴 15단의 신비와 그리자이유 화법에 의한 장식 유리창이 번갈아 가며 그려져 있었고, 넓은 회중석의 목재 유리창은 밑에 색유리로 되어 있었다. 종탑은 보통 정도였다. 이 성당은 일본인 거리 안에 있으므로 아직은 선교사들의 거처로 쓸 수 없다. 일본인 신부가 관리하고 있다.”10)

 

이 성당은 초기에는 작고 소박한 고딕 양식의 목조 구조였으나, 1879년에 증축되어 흰색 치장 벽돌로 지어진 5개의 본당과 아치형 천장, 팔각형 종탑이 있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바뀌었다. 나가사키에서 한국 선교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은 코스트 신부는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 정기적으로 이곳 미사에 참여하면서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가 나중에 지은 한국 성당의 배치는 일본에서의 이와 같은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윗글에서 뮈텔 주교는 이 성당을 서울의 명동 성당과 비교했는데, 실제는 내부 구조와 크기에서 약현의 성 요셉 성당과 비슷하다. 또한 늑골이 있는 둥근 아치 천장과 트리포리움(triforium),11)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높은 창문 등 고딕 성당의 대표적 특징을 상세히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푸레(L. Furet) 신부와 프티장(B.T. Petitjean) 신부가 일본에 올 때 벨기에에서 가져온 평면도를 바탕으로 팔각 종탑이 있는 유럽식 오사카(大阪) 성당을 건축했고, 이 설계 도면은 1876년 오우라 성당 증축 때에도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2) 이 벨기에 성당 도면은 1931년에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쓰와노(津和野) 성당(l’église de Tsuwano) 건축 때에도 참고하였다. 도면의 입수 과정과 어떤 벨기에 성당 도면이 모델이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에 매우 전형적인 일반 도면이 공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 도면들로 당시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맞게 선교지마다 조금씩 다르게 변형해 미래의 성당 건축에 활용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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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와넬 신부는 “몽타르노 마을은 몽펠리에에서 약 12km 떨어진 경치 좋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심어진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언덕 위 높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성이 마을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 성의 내부에 19세기 초까지 교구 성당으로 사용되던 카스텔란(Castellanes)이라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부속 성당이 있었는데, 19세기 말에 종탑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2) “사람들이 그에게서 두려워한 것은 그의 끔찍한 연필뿐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캐리커처의 희생자들은 그의 장난에 대해 불평했습니다”(프와넬 신부의 「코스트 신부 약전」 중에서).

 

3) 몽펠리에의 성 안느 성당은 1562년 종교전쟁으로 절반 정도가 파손되어 17세기에 복원되었다. 이후 성당 확장을 위해 1866년에 재건축을 시작하여 1869년에 완공되었다. 전형적인 네오고딕 성당으로, 69m에 이르는 중앙 종탑이 특징이다.

 

4)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이다.

 

5) “당시 건물 소유주들은 경제성과 기능성을 이유로 네오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선호했다. 이 양식은 창의성에 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적인 측면에서 더 유리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DE MAEYER Jan, COOMANS Thomas, Weyns Eva, Le néogothique à Bruxelles. Un foisonnement de concepts et de pratiques, Brussels erfgoed ; Bruxelles Patrimoines (19-20), 2016, pp. 52~65).

 

6) Alain Le Pichon, Béthanie & Nazareth : Les Pères des Missions Etrangères à Hong Kong, Hong Kong: The Hong Kong Academy for Performing Arts, 2008, p. 39.

 

7) 『코스트 요한 신부 서한집』,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pp. 58~59.

 

8) 체푸(Chefoo, Tchefou)는 중국 산동성 옌타이(煙臺, Yantai) 해안 마을의 옛 이름이다.

 

9) 「요코하마에 있는 성심 성당」, Compte Rendu(파리외방전교회 보고서), 1938, pp. 153~157.

 

10) 『뮈텔 주교 일기』 II,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 267.

 

11) 고딕식 성당 측량 상부의 창 밑에 위치한 장식 아케이드(arcade).

 

12) «Two hundred years later, in 1819, the pope named the French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to replace Spanish and Portuguese missions in northeast Asia, but it was not until 1863 that two French priers […] a single octagonal tower, but in any case, it can hardly be considered a Japanese creation, for the design is completely European, probably a Belgian plan used by catholic missionaries for an early church, now gone, in Osaka.» «[…] Osaka in early Meiji. There, in Kawaguchi, he built a large European-style church, probably the lost model used in enlarging Oura Cathedral in Nagasaki in 1876.»(FINN Dallas, Meiji revisited : The Sites of Victorian Japan, Publisher, Weatherhill, 1995, p. 13)

 

[교회와 역사, 2024년 6월호, 글 김나래 비비아나(예술사학 박사, 전 프랑스 르 아브르 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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