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4: 전통 상장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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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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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 전통 상장례 (상)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 입은 상주,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
- <사진1> 노르베르트 베버, ‘상주’,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주자가례」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상장례
‘상장례(喪葬禮)’라는 말이 쓰인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다. 정확히 이 용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세종 10년 1428년이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부에서 백성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일상의 의례를 치렀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식 화장은 점차 사라지고 매장이 일반화됐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단속) 규칙’을 공포해 일제의 장묘법제를 시행,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등장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청계동과 함경남도 내평, 만주 땅 용정·팔도구 등지에서 한국의 전통 상장례 예식을 촬영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아플 때는 무당이, 임종 때는 미신이, 묏자리를 볼 때는 나침반을 든 지관이 제 몫을 한다고 소개했다.
죽음이 임박한 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면 임종을 지켜보던 이들이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안치실로 옮긴 다음 망자가 생전에 입던 저고리를 들고 북쪽을 향해 혼백을 소리쳐 부른다. 상주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곡을 하며 3일 동안 곡기를 끊는다. 그리고 관을 짜고 친척들에게 부고를 알린다. 여기까지 절차를 ‘초종의(初終儀)’라고 한다.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식솔들은 환자의 넋이 저승길에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넋이 떠나는 순간을 위해 밥 한 사발과 물 한 사발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임종이 시작되면 임종자를 반대 방향으로 눕혀 평소에 발을 두던 곳에 머리를 두게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는 세상과 소통할 일도 없으리라. 발밑에는 쌀을 두는 데 쓰는 네모 통을 놓아 발을 수직으로 올려 둔다. 그 사이 임종자의 가장 가까운 식솔, 상제(喪制)는 수의를 챙긴다. 임종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무당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아무개가 이제 정말 죽었구나.’ 이때는 다들 침묵을 지켜야 하며 절대 곡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무당이 망인을 세 번째 부르면, 상제는 옷을 지붕 위로 던져 망인의 넋이 편히 떠나시게 한다. 또한, 쌀을 지붕 위로 던지며 이렇게 빈다. ‘살아생전 거친 밥만 드셨지요. 이 밥이 끝 밥이니 드시고 가시오.’ 지붕 위로 물을 뿌리면서도 그리 말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2쪽)
- <사진2> 노르베르트 베버, ‘염하는 사람들’,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상주 모습 담아
베버 총아빠스는 고인을 애도하며 곡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 곡(哭)은 고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바로 행해진다. 곡에도 애통함을 드러내는 단계가 있다. 사실 곡은 슬픔이 북받쳐 오르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이지만 흐느껴선 안 된다. 「예기」 ‘잡기하(雜記下)’에 “증신(曾申)이 ‘부모의 상에 애곡할 때 일정한 소리가 있습니까?’ 물으니, 증자(曾子)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고 울 때 일정한 소리가 있더냐?”라고 되물었다. 그런데도 상장례 예법상으로는 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곡의 횟수가 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곡도 ‘무시곡(無時哭)’ ‘신혼곡(晨昏哭)’ ‘조석곡(朝夕哭)’ ‘삭망곡(朔望哭)’ ‘반곡(反哭)’으로 나뉘었다. 무시곡은 임종 직후부터 빈소를 차리기 전까지 남녀가 가슴을 치며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하는 곡이다. 신혼곡은 시묘살이를 하거나 묘소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절하며 하는 곡이고, 조석곡은 상중에 고인에게 아침저녁으로 술과 과일 등을 올리며 하는 곡, 삭망곡은 상중에 고인에게 다달이 초하루와 보름날 술과 과일·포 등을 올리며 하는 곡이다. 반곡은 장사를 지낸 뒤 혼백 혹은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면서 하는 곡이다.
“남녀 모두가 머리를 풀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을 가린다. 다들 흐느끼고 오열하고 통곡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다. 특히 여인들은 애절한 목소리로 ‘아이고’를 길게 끌며 반복한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망인에게 묻는다. ‘왜 가시었소? 한 세상 잘살아 놓고, 우리가 뭘 어쨌기에 그리 떠나시는 거요?’ 친족 가운데 상속권이 있는 사람만 곡을 함께할 수 있다. 곡하지 않고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은 상속인이 아니다. 호곡이 허용된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도 상속권을 인정받는 셈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3쪽)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상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사진1> 30~40대 장년인 그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 눈은 깊은 슬픔에 잠겨 초점을 잃은 채 카메라를 피하고 있다.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을 동여맸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 단정한 모습에서 기품이 배어난다. 베버 총아빠스는 부친상을 당한 상주는 2년, 모친상을 당한 상주는 1년간 상복을 입는다고 설명한다.
염습(殮襲)은 고인의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염포로 싸고 입관하는 절차다. 일반적으로 3일에 걸쳐 진행된다. 고인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로 갈아입히는 습은 고인이 운명한 날에 한다. 습을 마치면 고인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반함(飯含)을 한 후에 홑이불을 덮고 영위(靈位)를 올려놓는 영좌(靈座)를 설치한다. 다음날 고인을 베로 싸서 묶어 관에 넣을 수 있도록 염을 한다.
- <사진3> 노르베르트 베버, ‘발인 전 문상’,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함경남도 내평에서 염하는 장면 촬영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함경남도 내평성당 마당에서 염하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2> 습을 마친 고인은 탁 트인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놓여있다. 염포에 싸이고 있는 고인을 상주들과 친지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세로매로 고인의 발을 묶는 것으로 보아 염이 막 시작된 듯하다. 염포는 고인의 발, 머리, 왼쪽, 오른쪽 순서로 싼다. 수많은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데 모두 남자다.
“망인의 저승길에 먹을 쌀 몇 톨을 입에 물릴 때면 ‘100섬, 200섬’이라고 소리친다. 먼먼 저승길 가실 때에 몇 톨일지언정 100섬인 양 여기시고 넉넉히 드시라는 뜻이다. 가시다가 혹여 가시에 찔리실까 봐 머리와 손발은 검은 명주로 감싸드린다. 장정 둘이 망인의 머리와 온몸에 삼줄을 두르고 힘껏 잡아당겨 묶는다. 이렇게 12번을 묶은 뒤 관에 모셔 눕히고 관 뚜껑을 닫은 다음 대나무 못을 박는다. 염습은 유족의 몫이다. 친지나 타인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무당은 예외다. 승려도 안 된다. 승려는 한국의 전통 장례식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4쪽)
조문(弔問)은 상주를 위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다. 문상(問喪)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서양 예법에 따라 검은 옷을 입고 조문하는 이들이 많은데 원래 우리 예법은 흰옷을 입고 조문하도록 가르친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발인 전 조문 장면을 촬영했다.<사진3> 흰 두루마기를 입은 두 조문객이 짚신을 벗고 멍석 위에서 상주에게 큰절하며 조문한다. 상주는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을 하고 있다. 상주 뒤편에는 상투를 튼 노인들과 단발을 한 청년이 지켜보고 있다. 발인 직전인지 상여 옆에 상여꾼들이 자리하고 있다.
“상복을 온전히 갖추어 입은 상제가 집 앞 짚자리 위에 서 있으면 조문객들은 한 사람씩 다가와 상제 앞에 부복하며 이마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한다. ‘어른께서 이리 가시니 하늘이 무너집니다’라거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등으로 운을 떼면, 상제는 ‘예,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응답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7~328쪽)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1월 3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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