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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13일 (수)연중 제32주간 수요일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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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13-14: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

136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24

[저를 보내주십시오] (13)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 (상)


“제게 오히려 위로 건넨 한센인들, 그 순수함에 흠뻑 빠져들었죠”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와 한국의 한센인들과 무려 44년을 동행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Louis M. Uribe). 한센인들의 안식처 경남 산청 성심원에서 만난 유 신부는 턱수염 풍성한 할아버지의 포근함을 지니고 있었다. 왜 하필 한국이라는 나라에, 또 한센인들과 오랜 기간 동행하게 된 걸까. 산청성심원 유의배 신부의 소박하고 따뜻한 선교 이야기를 소개한다.

 

 

- 10월 2일 경남 산청성심원에서 만난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형준 기자

 

 

환자 돌보는 일은 익숙했죠

 

유 신부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을 즈음, 수도회엔 나이 지긋한 수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간병 일을 배웠다. 그 덕에 환자와 동반하는 삶이 익숙해졌다. 적성에 맞았는지 수도회 사람들은 유 신부에게 “나중에 선교 나가도 환자를 돌보고 싶으냐”고 묻기도 했다.

 

고향 스페인에서 한센인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의학 발달로 한센병 전염성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럼에도 훗날 한국에서 한센인들과 생활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때였다. 유 신부는 고향에서 환자를 돌보고 한센인들에 대해 알게 된 걸 하느님의 이끄심이라고 확신했다.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꿈에도 몰랐지만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주신 거죠.”

 

- 고향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신학생 시절의 유의배 신부. 유의배 신부 제공

 

 

첫 선교지 볼리비아에서 한국에 오기까지

 

한국 선교에 대한 소망은 전부터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듣던 라디오에서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었는데 6·25전쟁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유의배 신부는 그 뒤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마음속에 간직해왔다.

 

수도회 입회 후 그는 한국 선교를 원했지만 관구장 신부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같은 스페인어를 쓰는 남아메리카 국가를 추천했고, 볼리비아에서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뗐다. 해발 4000미터 티티카카 호수 인근 마을에서 주민들과 2년간 살았다. 볼리비아 공용어 중 하나인 아이마라어도 열심히 배웠다.

 

2년 후 한국에 올 기회가 찾아왔는데, 막상 정든 볼리비아를 떠나는 결정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한다는 선교사로서 사명에 따라 1976년 한국에 왔다. 당시 한국 도시의 모습을 본 유 신부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한국의 모습은 유 신부 눈에 미국 뉴욕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난한 곳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던 유 신부는 “도대체 여기서 내 역할이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산청 성심원에서 한센인들과 더불어 살다

 

그러던 중 한센인이 모여 사는 성심원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하느님의 섭리를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스페인에서 배운 간병 경험과 한센인들에 대해 배운 기억이 떠오르며 비로소 자신이 왜 한국에 오게 됐는지 깨달은 것. 그렇게 산청 성심원으로 와서 지금까지 44년을 지내고 있다.

 

유 신부는 고향에서의 경험으로 한센병이 타인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견뎌왔지만, 타인의 사소한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는 여린 마음의 그들을 위한 배려이자 사랑이었다.

 

“나에게 음식을 같이 먹자며 쓰던 수저를 건네더라고요. 저는 두려움도 걱정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그들이 상처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전염이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눠 먹었죠.”

 

한국 사회는 한센인들을 배척했지만 오히려 한센인들은 순박하고 마음이 넓었다. 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는 자신을 돌보는 유 신부에게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할아버지의 선하고 반가운 웃음을 유 신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저보고 먼 타지에서 생활하시느라고 힘들지 않냐며 말을 건네시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죠. 제가 위로를 해 드리러 갔는데 역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심원엔 550명 정도가 생활했다. 유 신부가 그 많은 이들의 가족관계를 파악하게 된 건 어린이집 아이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유 신부에게 “저분은 우리 어머니고, 저분은 할아버지예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고 한다. 아이들 덕에 성심원 사람들의 가족관계를 거의 알게 됐다.

 

 

- 산청성심원에서 미사를 주례하는 유 신부. 유의배 신부 제공

 

 

한센인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성심원에서 지내던 유 신부는 한국 내 다른 선교지로 떠날 기회를 마다했다. 성심원에서 생활이 행복해 다른 곳으로 떠날 마음이 없었다. 볼리비아에서처럼 한센인들과 사랑에 빠졌다.

 

유 신부는 “한센인은 예수님 수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부끄럼 없이 보여주길 바랐다. 유 신부가 한센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뭘까.

 

유 신부는 “모든 사람은 언젠가 아프고 늙는다”며 “결국 인간은 모두가 육적인 고통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했다. 다만 한센인들은 그저 조금 이른 시점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일 뿐. 유 신부는 이어 한센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이 아름답게 살게 하려고 십자가 형벌을 당하신 예수님 모습을 손수 입은 이들이 당신들입니다. 자신을 세상에 자랑하며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 산청성심원에서 엄마와 아기와 함께. 유 신부는 성심원 식구들이 사랑스럽고 예쁘다며 연신 칭찬했다. 유의배 신부 제공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omrLJnuKwcE?si=s-x0z4Ic2v2_Z_22

 

[가톨릭신문, 2024년 10월 20일, 이형준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14) 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 (하)


프린치스코 성인처럼, 한센인 보듬으며 켜켜이 쌓은 사랑과 신앙

 

 

한센인들과 오랜 세월 함께한 유의배 신부. 최근엔 언론과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도 이름이 알려졌다. 대중이 보기에 유 신부는 이제 할아버지 같은 든든한 존재다. 하지만 그도 한국에 온 초창기엔 낯선 땅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적응해 나가던 젊은이였다. 한센인들의 동반자 유의배 신부의 한국 적응기는 어땠을까. 또 유 신부의 타지 생활 원동력이었던 신앙은 어떤 모습일지 알아보자.

 

- 유의배 신부가 10월 2일 산청성심원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형준 기자

 

 

유의배 신부의 한국어 정복기

 

“한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를 익혀 가면서 느낀 건 말 그대로 ‘한국 좋구나’였어요. 분위기도 좋고 한국 사람들도 좋고…. 그냥 마음에 들었어요.”

 

1976년 유의배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설날이었다. 덕분에 서울 정동에서 덕수궁 가는 길에 한복을 차려입은 많은 인파를 구경했다. 가족이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광경이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이었는데 그 모습이 예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한국이 좋아졌다.

 

한국어는 명도원(明道院)에서 배웠다. 명도원은 당시 한국에 선교사로 온 외국인 성직자·수도자들을 위한 ‘한국어 학교’로 1964년 문을 열었다.

 

“수녀님들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목사님까지 다양한 분들이 명도원에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10명이었는데 졸업은 2명만 했지요.”

 

유 신부는 “난 명도원 2년 과정을 모두 마쳤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는다고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한국어 ‘실전 훈련’은 따로 있었다. 서울의 한 신부님이 유 신부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 아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곤 유 신부에게 대전 갈마동에 작은 형제회가 운영하는 성심원 보육시설을 추천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아이들과 부대끼며 한국어가 좀 더 익숙해졌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거죠. 제가 말하다 틀리면 망설이지 않고 ‘한국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라며 교정해주는 겁니다. 어른들은 부끄러워해서 제가 뭔가를 틀려도 말을 잘 안 해주거든요.”

 

짧은 기간임에도 유 신부는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겁게 기억했다. 그 뒤로 산청 성심원에 오기 전까지 진주, 제주도 등을 돌며 다양한 한국 문화를 맛봤다.

 

- 한국어 공부시절 한 어린이와 함께. 유의배 신부 제공

 

 

프란치스코회 입회 후 서서히 깨달은 선교 사명

 

한국에 들어온 지 4년, 한국 문화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1980년 산청 성심원에 자리 잡아 지금까지 왔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부터 낯선 땅에서 언어를 익히고 한센인들의 안식처로 가기까지. 유 신부는 시종일관 즐겁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지만 타지에서의 삶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 신부가 행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성령에 이끄심에 몸을 맡긴 덕분이었다.

 

고향인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동네 성당에 가족을 따라 매주 나갔다. 성당은 집에서 겨우 5분 거리에 있었다. 삼촌이 프란치스코회 신부이기도 해 수도회 신부님들을 자주 접했다. 유 신부는 “신부님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분인지 잘 몰랐고, 처음엔 주변 말만 듣고 막연하게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릴 적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은 돈이 없어도 바닷가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도 ‘프란치스코회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삼촌 신부님을 따라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그때만 해도 사제 성소에 대해, 수도회 사명에 대해 전혀 몰랐다. 수도회의 각종 모임에 나가며 조금씩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사명을 마음에 새겼다. 선배 선교사들에게 아시아의 여러 국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린시절 라디오와 아버지에게서도 들었던 한국이었다.

 

- 경남 산청 성심원을 산책하는 유의배 신부. 이형준 기자

 

 

유의배 신부가 전하는 신앙

 

프란치스코 성인도 한센인들과의 만남 이후 완전히 새사람이 됐다. 유 신부에게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을 물었다. 유 신부는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피하려고 하다가 그들을 안아주고 삶이 바뀐 것처럼,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갖고 복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고방식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자신이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령을 보내 달라고 청해야 한다”고도 했다.

 

“천국이라는 좁은 길로 가기 위해선 정말 어린이처럼 돼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놀고, 마음이 가난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신 길이 바로 이거예요.”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유 신부도 편견 없이 한센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44년간 한센인들과 더불어 산 비결이었다. 성심원에서 만난 유 신부는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을 쏙 빼닮아 있었다. [가톨릭신문, 2024년 10월 27일, 이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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