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콘산책38: 성화상 옹호한 교황, 반대한 황제와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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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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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8 · 끝) 성화상 옹호한 교황, 반대한 황제와 대립
제2차 니케아 공의회서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 인정
- (작품 1) 성화상 축일 이콘의 한부분: 157.9 x 90.5cm, 16세기 초, 러시아, 레클링하우젠 이콘 박물관, 독일.
성화상 논쟁과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시기 : 하드리아노 1세 교황(772~795) 787. 9.24~10.23
성화상 반대하는 황제와 옹호하는 교황 대립
성화상 반대 견해는 왕권 중심으로 항상 있었다. 726년 레오 3세 황제는 성화상을 금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이에 그레고리우스 2세 교황이 반대하였고, 뒤를 이은 그레고리우스 3세 교황은 성화상을 경멸하는 자를 파문한다.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콘 공경을 우상 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박해를 가한다. 황제 서거 후 콘스탄티누스 6세가 어린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자 모후 이레네가 섭정을 맡아 동로마를 통치하게 된다. 그녀는 성화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제안한다.
과정
787년 5월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제1차 회기는 787년 9월 24일 열리고, 여러 번의 회기를 거듭한 후 마지막 회기는 10월 23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여러 번의 회기에서 성화상의 정당성과 성인 전구의 정당성에 대해 중요한 선언이 있었다. 제7회기에서 공의회의 결정을 낭독하였다. 제8회기에서 22개 조의 규정에 대한 교부들의 승인이 있었고, 황후와 황제는 교부들이 작성한 결정문에 서명하였다. (작품 1)
결과 및 의의 :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 인정
공의회는 동·서방 교회가 함께한 공의회로서 성화상 공경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선언하고, 레오 3세 황제 이래로 성화상 파괴주의자들로부터 박해받고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 결의로 박탈당한 성화상 공경을 회복하였다.
이 공의회는 흠숭과 공경을 구별하여 흠숭은 하느님께만, 공경은 피조물에도(성인이나 천사) 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성화상 공경의 교의적 바탕을 뚜렷이하여 공경의 남용을 경계하고, 우상이나 미신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배척하였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이 성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것, 즉 본체를 향하게 했다. 따라서 부적처럼 성상 자체에서 어떤 영험스러운 힘이 나온다고 믿으면 이것이 바로 미신이고 우상임을 주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화상 공경은 그것이 표현하는 매체를 통해 본체에 더 가깝게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였다.
이단론과 이콘에서 성모 표현의 합리성
아리우스(Arius: 256~336)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 의해 발생한 종속설 가설이 아리우스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의 시발점이 된다.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이며 사제이고 안티오키아에서 공부했다. 그는 ‘하느님은 시작 없이 존재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라는 걸 전제로 ‘성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구세주는 거룩한 분이지만,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을 쓰는 것도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존재나 지위를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이해로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중재자가 필요하며, 이 중재자가 바로 ‘로고스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로고스는 제2위의 신일 뿐이라는 성자의 성부 종속설을 주장했다. 첫 피조물인 말씀의 위력은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며 성령도 성자의 첫 피조물로서 성자보다 낮은 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의 신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육화와 신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말씀이 친히 사람이 되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이 사라졌으며⋯. 그분의 부활로 인간은 불사불멸을 되찾게 되었다.”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성을 지니지 못한 자, 즉 인간인 자가 과연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느냐는 오류에 직면할 수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가 아리우스를 단죄함으로써 시작된 분쟁이 전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통해 제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는 꿈이 있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막고자 교회사 최초의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니, 이것이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제시한 신경을 기초로 한 신경(니케아 또는 아타나시오 신경)을 325년 6월 19일 정통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 신경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즉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지닌 성자라는 뜻으로 표현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결정 사항을 통해 성자는 ‘성부로부터,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외아들’로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똑같은 본질(homoousios)이시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아리우스의 교설을 반박하였다.
- (작품 2) 이집트로 피난, 템페라, 15 x 15cm, 곱트 이콘, 개인 소장.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0~450?)
그리스도의 본성(nature)과 위격(Person)에 대한 견해 때문에 431년 제3차 에페소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주교로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그의 전속 사제로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은 11월 22일 설교하던 중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을 잉태한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이 명칭은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격분했다. (작품 2)
네스토리우스는 전속 사제의 편을 들어 성탄절에 마리아가 왜 아닌지 주장하는 설교를 했고, 이런 내용의 설교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계속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따랐는데, 그것은 그의 스승이 아리우스와 연관된 교육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닌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설교 내용을 놓고 수도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루스는 429년 부활절 직후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공격하는 회람을 발행했다.
그가 보기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를 거절한 것은 하느님이자 사람인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부인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알려진 대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를 인간과 신, 2개의 위격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배척했다.
실제로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것은 ‘프로소폰’(prosopon) 방식의 결합이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은 다른 대상들을 수단으로 사용해 자신을 확장하는 한 개인의 자기현시를 뜻한다. 예를 들면 붓은 화가에게 프로소폰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人性)을 사용하여 자신을 현시하였다. 그러므로 인성은 그의 프로소폰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현시의 유일한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13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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