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9) 한국전쟁과 교회의 구호활동 ·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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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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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 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39) 한국전쟁과 교회의 구호활동 · 재건
전쟁의 상흔 딛고 한국 교계제도 설정… 1962년 독립된 교구 탄생
- 메러디스 빅토리호.
교황사절 번 주교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1948년 8월 15일)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는 북한정권(1948년 9월 9일)이 수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비슷한 시기에 독일도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정권이 수립됐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교회가 교육·출판·빈민 구제 등 분야별로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반면, 북한에서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탄압을 시작으로 이른바 ‘침묵의 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노기남 주교와 라리보 주교는 성년(聖年)을 맞이해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을 향해 사도좌 방문(Ad Limina)을 떠났다. 그 사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 26일 서울대목구는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어 △윤형중·김철규 신부의 피란 △시내 본당 신부들은 신자와 함께 머물 것 △신학교는 휴교 후 학생들을 귀가시킬 것 △특수 사목과 보좌 신부들은 자유로이 행동할 것을 결정했다. 명동대성당에서는 8월 6일까지 주일 미사가 봉헌되고 성사 집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빨랐고, 3일 만에 서울까지 들어왔다. 이들은 남한 땅에 들어오자마자 현지 성직자와 수도자·신자들을 체포해 사살하거나 각종 교회 물건을 징발하고 파괴하기도 했다. 교황사절인 패트릭 번(Byrne, 方溢恩, 1888~1950) 주교는 한국 교회의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당시 서울·대전·춘천교구장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에 남아있기로 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에 수용됐다가 7월 19일 신촌역에서 화물열차에 실려 평양으로 압송됐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게 됐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950년 12월 25일 거제항에 도착하자 피란민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흥남 철수작전 주역 라루 선장 수도회 입회
전쟁으로 인한 교회 손실은 매우 컸다. 성직자·수도자를 비롯한 인적 손실은 물론, 중요 시설도 징발되거나 파괴됐다. 명동대성당은 내부 곳곳이 파손됐다. 예수성심상은 파괴됐고, 베네딕토상은 무릎 아래가 절반쯤 파손됐다. 제의도 많이 찢겨나갔다. 성당 앞마당 성모상은 총탄에 맞아 부서졌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장금구 신부와 신자들이 성당을 복구해 나갔고, 10월과 11월에는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유엔군 환영 미사와 9명의 사제서품식도 거행됐다. 그러나 1·4 후퇴로 노기남 주교와 임시 신학교마저 부산을 향해 피란길에 나섰다. 당시 노 주교는 침탈된 명동대성당을 되찾게 되면 언젠가 꼭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것이 현재 명동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성모동굴이다.
전쟁 중 흥남 철수 과정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인명구출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부두에 집결한 군인과 피란민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화물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의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은 화물을 버리고 1만 4000명의 피란민을 태워 거제도까지 이송해줬다. 그 후 라루 선장은 뉴저지주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뉴튼 수도원에 입회해 평수사로 살았다. 뉴튼 수도원은 현재 한국 왜관 수도원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데, 라루 선장의 무덤도 그곳 수도원에 있다. 뉴튼 수도원은 과거에 덕원 수도원을 지원해줬는데, 함흥 철수로 그 덕원 수도원이 칠곡으로 내려가 왜관 수도원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왜관 수도원이 뉴튼 수도원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 성 베네딕도회 뉴튼 수도원에 입회해 마리너스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은 일단 그쳤으나, 3년간의 전쟁 후유증은 매우 컸다. 서울대목구의 구호활동은 미국 가톨릭 복지위원회(NCWC)의 원조하에 활발하게 이뤄졌다. 국제가톨릭복지위원회 산하 조직인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s, CRS)는 이미 1946년부터 명동에 사무실을 두고 한국 정부와 협조하면서 식량과 의복 등을 분배하며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구제회가 지원하는 물품은 서울 지역에 가장 많이 배부됐고, 명동본당은 구호물자의 통로이자 배부처가 되었다. 구제회는 물량 지원뿐 아니라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자립 프로그램을 시행했는데, 불모지를 경작지로 개간하거나 서해안을 따라 굴 양식장 조성·초 제작·강원도 농장 개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구제회 활동은 195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 교세 증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양대목구를 맡았던 메리놀외방전회의 선교활동이 어려워지자 노기남 주교는 교황청 인가를 얻어 1953년 9월 1일 충청북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한 후, 파디(J. Pardy, 巴智, 1893~1983)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했다. 파디 신부는 1958년 청주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이어서 임명받았다. 오늘날 청주교구가 대구관구에 속하게 된 것은 그때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독립하면서 메리놀회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울대목구 재정과 사제 수의 부족으로 인천 지역 사목을 메리놀회에 거듭 위탁했는데, 1958년 메리놀회가 이를 받아들여 맡게 됐다. 1961년 인천대목구가 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맥노튼(W. McNaughton, 羅吉模, 1926~2020) 주교가 임명됐다.
- 메리놀외방전교회 출신으로 초대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된 제임스 파디 주교.
- 메리놀외방전교회 출신으로 초대 인천교구장으로 임명된 나길모(맥노튼) 주교.
전쟁의 상흔 딛고 1962년 교계제도 설정
한국전쟁 이후인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고 한국 교계제도가 설정되기까지 서울 시내에는 총 13개 본당이 신설됐다. 또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신학교가 다시 혜화동으로 옮겨왔다. 교회 장래를 위한 유학도 많이 이뤄졌다. 노기남 주교는 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 편지를 보내고 순방하면서 한국 교회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쟁으로 활동이 중단됐던 의료기관도 정비하기 시작했다. 미국 원조로 무료 진료를 시작, 1954년 성 요셉 자선병원을 설립하고 성신대학 의학부 증설을 인가받으며 의과대학을 시작했다. 이어 간호학교 설립을 추진해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아울러 옛 성모병원을 ‘서울 가톨릭의료원’으로 개편하고 1961년 신축병원을 갖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명동 가톨릭회관 건물이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난 밑바탕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시기 때부터 물려받아 갖고 있던 신덕과 용덕이 있었다. 그 외에도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1953)·순교자현양회 활동 재개 등 평신도 활동의 힘이 있었다. 한국 교회는 그렇게 자체적으로 교회를 독립적으로 운용해나갈 힘을 갖기 시작했고, 1962년 마침내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명실공히 독립된 교구가 탄생하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13일,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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