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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32: 조선을 향한 여정 준비 마치다

174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10-01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32) 조선을 향한 여정 준비 마치다


1835년 10월 7일, 꿈에 그리던 조선을 향해 서만자에서 출발하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약속대로 중국 봉황성 변문에서 조선인 교우들과 만나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1835년 10월 7일 서만자를 출발하려 했다. 서만자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

 

 

조선 국경을 향해 서만자를 떠나기로 계획

 

요동으로 보냈던 연락원들이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이미 50일도 훨씬 전에 서만자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보호해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왕 요셉은 기력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습니다.

 

저는 1835년 10월 7일 수요일에 조선 국경을 향해 서만자를 떠나기로 계획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저는 7프랑을 주고 손수레와 비슷한 마차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또 140프랑을 주고 말 두 필을 샀습니다. 고맙게도 주인이 말 한 필을 그냥 주어 이번 여행에는 세 마리 말이 교대로 수레를 끌 예정입니다. 국경까지 함께 가기로 고용한 교우들은 완전무장을 할 예정입니다. 도적과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과 황야를 가로질러 800여㎞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약탈당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이 지역 도적들은 저항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살인하지 않습니다. 여행자의 물건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때때로 도적들은 여행자들의 옷까지 벗겨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탈은 잔인한 살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10월 이후 요동의 날씨는 혹독하게 춥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나가려는 고장은 서만자보다 훨씬 더 춥습니다.

 

조선 국경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저는 9월 28일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곧 조선 국경을 향해 떠날 것입니다. 내몽골과 만주 800여㎞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직 10월도 되지 않았지만 여기는 프랑스의 1월만큼이나 땅이 얼어붙었습니다. 저희 형편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동행인들을 데리고 황야와 산악 지대를 지나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강도와 맹수들이 출몰하곤 합니다. 동행인들은 온갖 무기로 무장했기에 마치 출정하러 가는 모양새이지만 전혀 용맹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희망을 겁니다. 제 희망은 헛되지 않을 겁니다. 저를 위해 선하신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또한, 가족 모두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조선대목구에 요동 재치권 부여 재차 요청

 

아울러 저는 10월 1일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추기경에게도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10월 7일 조선 국경으로 떠날 것입니다. 제게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새로운 어려움과 더 큰 위험을 예상합니다. 성공은 불확실하지만 한 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계절에 여정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만큼 위험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5월 13일에 저는 넉넉히 돈을 주어 저와 제 일행들을 위한 집을 준비하도록 요동으로 사람들을 보냈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중대한 방해가 없다면 적어도 한두 명은 40~50일 전에 돌아왔어야 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저는 요동 지방의 재치권을 재차 청합니다. 논쟁을 그만두고 무엇이든지 허락된 것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제게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선양에 속한 모든 고을이 파리외방전교회 관할로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교황님께서 당신 종의 소원을 받아들이신다면, 남경 주교가 모든 일을 확실히 알고 있듯이, 이미 진행된 일을 보상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그 지역구의 사제와 교우들에게 권고해 훗날 그들이 조선의 교황 대리 감목의 재치권에 순명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순명이나 분열의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포교성성 장관에게 요동의 재치권을 조선대목구에 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한 저는 다음날인 10월 2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랑글루아 신부에게도 편지를 작성해 보냈습니다.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조선 입국을 허락하신다면 저는 조선으로 들어가는 더욱 짧고도 쉬운 길을 신부님께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난 8월에 보낸 편지로 제가 포교성성에 제안한 바 있고 이 편지에서 더욱 자세히 피력하고 있는 계획을 신부님이 채택하지 않는다면 이번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나서 계속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제 요청을 지원해주십시오. 요동의 심양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달라고 요구하십시오. 조선에 이웃해 있는 이 지방은 모든 부속 지역과 함께 저희 사정에 꼭 맞을뿐더러 저희 계획의 온전한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북경 주교가 공석으로 있으니 이런 요구를 할 절호의 상황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 성 앵베르 주교

 

 

앵베르 신부, 조선 선교사로 적합한 인물

 

남경에서 온 한 연락원에 따르면 앵베르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선발된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정말 확실한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정 그런 선교사가 저희와 함께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면서 요동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그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임명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 지역의 교우들을 돌보고 심기일전시킬 것이며, 만주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교지에 마침내 신학교가 세워질 것입니다. 앵베르 신부만이 조선 신학교를 괜찮은 규모로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생들과 친교하는 재주가 없고 그들을 이끄는 재주는 더욱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조선 선교지를 모든 점에서 사천 선교지 수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기에 적합한 인물은 앵베르 신부뿐입니다. 조선에서 버텨낼 수 있으면 일본 입국도 가능하다는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선교지는 위에서 말씀드린 요동 지역을 얻지 못하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출발 전날인 10월 6일 마지막으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도 안부를 전했습니다. “왕 요셉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는 7개월 보름이나 걸린 여정 끝에 최악의 행색으로 서만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종기와 상처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의 용기는 그가 가진 힘을 능가합니다. 기어코 조선 국경까지 저와 동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를 출발하기 전 이미 혹독한 추위로 동상에 걸린 상태였다. 서만자 겨울 풍경.

 

 

서만자 출발 전 혹독한 추위로 동상에 걸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로 제 소망을 들어주시어 저를 안전하게 그 미로에서 구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조선 선교 임무는 요동에 있는 심양과 그에 속하는 모든 주와 모든 현을 조선대목구장 재치권에 두지 않으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내용으로 저는 이미 로마에 편지를 썼습니다. 이 지역의 교우수가 700~800명만 되면 즉각 제 요청에 힘을 실어주기 바랍니다.

 

저는 조선으로 갈 3명의 젊은 선교사가 10월 중에 마카오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앵베르 신부는 네 번째 선교사가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조선 선교를 나선 선교사들이 많군요. 이들 중 누구도 도중에 헤매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일이 사실이라면 신부님께 청하건대 젊은 선교사 3명이 중국어 공부를 하도록 해주십시오. 중국어 회화가 가능하면 그들은 더욱 짧고 더욱 쉬우며 위험이 덜하고 비용이 덜 드는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앵베르 신부가 온다는 것은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가 오면 요동에 배치되어 교우들을 보살필 것이고, 만주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하고 신학교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품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기까지 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 저는 동상에 걸려 있습니다. 이 지방은 오래전부터 날씨가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행정 일을 마무리한 다음 저는 꿈에서도 그리던 조선을 향해 1835년 10월 7일 서만자에서 출발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29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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