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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7: 하인 성 조신철과 복자 김천애

225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7-30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 (7) 하인 성 조신철과 복자 김천애


신분 뛰어넘은 인격적 관계에서 힘 얻어 교회 봉사에 전념

 

 

조선시대 신분상 ‘하인’으로 분류되는 성 조신철(가롤로·1796~1839)과 복자 김천애(안드레아·1760~1801)는 각각 마부와 노비 신분이었다. 이들은 비천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 준 주인 혹은 상관에 의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교회를 위해 발 벗고 뛰었다. 결국 순교의 영광에까지 이르러 지위를 막론하고 교우들의 모범이 된 성인과 복자를 소개한다.

 

- 성 조신철 가롤로(김태 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조선 하층민으로 살던 성인 · 복자

 

성 조신철은 강원도 화양에 살던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얼마 안 되는 가산은 아버지가 탕진해 앞길이 막막했던 소년 조신철은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들과 같이 몇 해를 지냈다. 그 후 환속하여 서소문 밖에서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23세 때 매년 동짓달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절단(동지사)의 종인 마부(馬夫)로 일하기 시작했다.

 

복자 김천애는 그 출신과 고향에 대해서 정확한 사료가 전해지진 않는다. 직업이 노비인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평범한 노비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1756-1801) 집 노비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각각 성인 · 복자에게서 하느님을 배우다

 

성인과 복자가 신앙을 받아들인 과정은 흥미롭다. 성 조신철은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1791~1839)에게서, 복자 김천애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복자 유항검에게서 신앙을 배웠다. 자신에게 신앙을 전해준 이들처럼 성인, 복자가 된 것이다.

 

성 조신철은 마부로 일하며 정직하고 용감해 동료들로부터 호감을 샀다고 전해진다. 동료들로부터 “사신의 종복(從僕)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판도 들었다. 그런 와중에 함께 사신을 따라다니던 역관(譯官) 성 유진길의 눈에 띄었다. 성인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장차 조선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고자 입교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것. 성 조신철은 그와 동행하며 세례와 견진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배움의 초기에는 쉽게 풀어주는 교리조차 알아듣지 못했으나 거듭된 과정 끝에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게 됐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하느님을 믿게 된 기쁨에 넘쳐 신입 교우들을 자기 힘닿는 데까지 도우며 봉사했다. 또 아내에게 신앙을 권유해 입교시켰다. 성인은 조선 사회의 비천한 지위였음에도 오히려 그 지위를 사용해 조선 교회에 공헌했다. 동지사 마부로서 북경 천주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 영입 운동 등에 깊게 관여한 것이다. 특히 모방 신부의 통역관이 되어 지방 전교 사업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복자 김천애는 평범한 노비로 살아갈 뻔했으나 다행히도 빈부와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았던 자신의 주인인 복자 유항검에게 사람답게 존중받으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복자 유항검에게서 신앙을 전수 받아 1784년 세례를 받고 ‘안드레아’라는 세례명까지 얻으며 자신의 주인과 평등한 관계인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제대로 된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던 조선 노비로서는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신앙인이 된 복자는 노복, 마름, 소작인 등 당시 조선에서 대우가 그다지 좋지 않던 하층민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했다. 또 십계명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등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제공

 

 

흔들리지 않은 신앙, 그리고 순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성 조신철의 꿈에 예수님이 베드로, 바오로 사도를 거느리고 나와 “올해 너에게 나의 영광을 위해 피를 흘리는 특별한 은혜를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꿈 속 말씀대로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성인은 일단 처가로 피신했다. 음력 5월, 포졸들이 처가를 습격해 그의 가족들을 결박하고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자, 성인은 포도청으로 달려가 자수했다. 포도청·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신문을 받는 도중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이 집에서 발견된 데다가 서양인 신부들의 은신처를 알려는 관헌들에 의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어떤 형벌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성인은 1839년 9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와중에 성인은 옥리에게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인데, 내 가족에게 용기를 내어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복자 김천애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주인인 유항검을 이어 그의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함께 체포돼 전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감영은 복자에게 모진 문초와 형벌을 가하며 배교와 밀고를 강요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양으로 압송된 후 형조에서도 그의 신앙은 굳건했다. 그를 천한 신분으로 여겨 무시하던 이들 앞에서 그가 최후로 한 진술이 전해 내려온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쳤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 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할 따름이다.”

 

전주로 다시 압송된 복자는 41세의 나이로 참수당했다. 복자의 최후 진술과 용감한 순교는 교우들은 물론이고 복자를 무시하고 천대하던 이들에게도 큰 감명과 놀라움을 줬다.

 

전주 숲정이 성지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전주숲정이성지

 

복자 김천애가 순교한 전주숲정이성지는 현재 전북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아파트와 초등학교, 주택가에 둘러싸인 작은 부지지만 과거엔 숲이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군사훈련장이었는데 근처에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어 사형장으로도 사용됐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 일부와 그의 동료 복자 김천애가 순교한 이후로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다.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도 많은 이가 참수형 받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성인 이명서(베드로)의 후손이 숲정이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방치된 것을 보고 직접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고, 이후 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현재 전주숲정이성지는 전라북도가 지정한 기념물 제71호다.

 

[가톨릭신문, 2024년 7월 28일, 이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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