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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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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간음으로 돌을 맞을 여성 앞에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116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6-22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간음으로 돌을 맞을 여성 앞에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예수께서 불륜으로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몰릴 여성을 율법의 굴레와 상관없이 구하고 인도해 주시는 장면은 신자가 아닌 이들도 많이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른바 명예 살인을 하려는 것인지, 사람들은 간음을 했다고 고발된 어떤 여성을 잡아다 죽이려 합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 하며 소란스럽게 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이들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들 그 명제 앞에 떳떳할까요. 그런데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예수님은 땅에다 말없이 무엇인가를 쓰십니다.(요한 8,1-11 참조) 당연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겠지요. 요한 복음의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 그들 각 개인의 죄들을 쓰셨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 지리이다.”라는 예레미아서 17장 13절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쩌면 예수님 조상으로 언급되는 네 여성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전혀 검증이 안된 저 혼자만의 추측이지만요. 간음을 한 여성을 야단치는 대신 오히려 돌팔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그 마음에는 신산한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치 않았던 이스라엘의 여성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요.

 

마태오 복음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평범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 후세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가부장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족보란 특별한 함의를 갖지 않습니까. 2000년 전 중동 역시 동양 못지않은 가부장제적 사회라 예수님이 다윗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는 속세의 윤리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부끄러운 이름들이 예수님의 조상으로 버젓이 언급됩니다. 또 남자 영웅으로 가득한 구약에도 이 여성들의 삶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율법과 도그마로 박제가 되어 가는 유다교 안에서도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사고의 시발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은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 이방인, 병자, 세리, 창녀, 자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밀었던 따뜻한 손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이 중요할까요. 제도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랑이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통 약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찰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와중에도 제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차분하게 앉아 글로 무언가를 쓰는 대목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쓰시는 장면은 유일하게 이곳뿐입니다. 항상 가르침을 말로 해 주셨지 책을 쓰거나 글을 썼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필이면 돌 맞을 처지에 있는 여성을 구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땅에다 무언가를 쓰셨다는 대목에 전율을 느낍니다.

 

왜 하필 죄 많은 여성 앞에서 허공에 흩어지는 말 대신 땅에 글을 남기셨을까요. 비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만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하는 그때의 민중들에게 혹시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어떤 당황스런 상황에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차가운 이성으로 이해해 보아야 한다는 주문처럼 느껴집니다. 특히나 이성과 학문 논리 같은 것에는 근처도 못 가고 오로지 자식 낳고 살림하고 노동만 하는 여성, 그 중에서도 죄를 지은 여성을 죽이려는 남성 군중들 앞에서 차분하게 한번 더 생각하고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 시키라고 말이지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즉각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반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쯤 머리로 추측하고 성찰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폭력이나 윤리와 관련된 사건 앞에서는 말이지요. 우리의 이성은 “논리”나 “합리” 혹은 “효율” 등의 명목으로 실은 자신의 파괴적인 감성, 비논리, 비효율을 감추고 포장합니다. 무엇이 옳다고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주관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 아마 살면서 많이 보고 체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격정의 와중에 자신이건, 타자이건, 직접 삶을 대면하고 말을 할 때와는 좀 다르게 글로 옮기고 성찰할 때 우리의 자기와 타자에 대한 이해는 넓고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쓰셨을 “문자” 혹은 “상(想: image)”이 갖고 있는 추상성(the abstract)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는 심적 기능입니다. 쉽게 말해 손가락이나 몸으로 보내는 사인, 언어, 그림으로 만든 기호 등등을 짐승은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짐승도 막연하게 죽음이나 탄생 사랑과 관련된 인지나 감정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인간처럼 미리 상상하고 그 사실을 기호로 재배열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죄지은 여성에 대한 저급한 혐오나 분노 대신 그 본능을 초월하는 큰 자비를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수천 년 동안 남성에 비해 많은 것을 참고 견뎌 내야 했을 여성에 대한 따뜻한 자비와 차가운 성찰의 마음을 함께 읽어 내게 됩니다.

 

[월간 빛, 2024년 6월호, 이나미 리드비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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