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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3: 동정자 성 이광렬과 복자 이국승

223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6-04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 (3) 동정자 성 이광렬과 복자 이국승

 

 

조선 시대, 양반가 출신으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렸음에도 천주교에 입교해 순탄치 않은 삶을 자초한 성 이광렬(요한·1795~1839)과 복자 이국승(바오로·1772~1801). 이들은 입교한 뒤 동정을 지키며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다 체포돼 순교에 이른다.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택했던 성인과 복자의 삶을 살펴본다.

 

- 성 이광렬 요한

 

 

명망 있는 양반가 출신

 

성 이광렬은 경기도 광주 이씨 가문 양반의 후예이다. 성인은 22세 즈음에 형 성 이광헌(아우구스티노·1787~1839)과 함께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 신앙을 키우기 시작했다.

 

천주교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북경 왕래의 중요한 사명을 맡은 지도자들 중에 끼게 됐다. 북경의 선교사를 무사히 영접하는 중요한 일에 참여한 그는 두 차례 북경을 왕복하며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 이광렬은 1836년 1월 성 조신철(가롤로·1796~1839), 성 정하상(바오로·1795~1839) 등과 더불어 국경지방의 책문으로 가 성 모방 신부(1803~1839)를 모셔 서울로 인도했고 그해 12월 말에 성 샤스탕 신부(1803~1839)를 입국시켰다.

 

복자 이국승은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장성한 뒤 충주 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들은 그는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 경기도 양근에 살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42~1791)을 방문했다.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복자 이국승은 즉시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 복자 이국승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스승은 천주교에 빠진 복자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금욕 생활을 결심하다

 

성 이광렬과 복자 이국승은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기로 결심했다.

 

성 이광렬은 북경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온 후 고기를 입에 대는 일이 없었으며, 그때까지도 미혼이었으나 결혼할 생각을 일체 끊어버려 독신으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때부터 주님을 위해 순교하기로 다짐했다.

 

복자 이국승은 부모가 혼인을 시키려고 하자, 가족이 생기면 신앙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해 혼인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했다. 그럼에도 부모들의 재촉이 계속되자 그는 이를 피하려고 한양으로 이주했다.

 

복자 이국승은 한양에서 훈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했다. 그는 복자 최창현(요한·1759~1801),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 등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으며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또한 복자 주문모 신부(야고보·1752~1801)에게 성사를 받았다.

 

- 복자 이국승 바오로

 

 

하느님께 통한 그들의 절개

 

기해박해와 신유박해가 시작되며 체포당한 성 이광렬과 복자 이국승은 굳건한 절개로 순교에 이르렀다.

 

1839년 기해년 4월 8일 밤 포청에 압송된 후 성 이광렬은 형과 문초를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형 성 이광헌과 더불어 굳셈이 한결같았다. 그는 곤장을 맞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있다가 다시 법정에 불려 나가 태형 등을 당했다. 하지만 성인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굳세게 지켰다.

 

옥중에 있는 5개월 동안 그는 열성과 인내로 함께 갇혀있는 모든 이들을 감화시켰다. 그러던 중 그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돼 순교했으며 그때 나이는 45세였다.

 

복자 이국승은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포도청으로 압송되면서도 복자 이국승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옥에 이르렀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1801)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자, 그는 고광성에게 관장 앞에 나가 신앙을 증거하도록 권면했다. 이에 고광성은 힘을 얻어 순교했다. 그러나 복자 이국승 자신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고광성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형조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같이 되었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됐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음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됐지만, 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복자 이국승은 1801년 7월 2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며칠 후 그는 29세 나이로 충청도 공주로 이송돼 순교했다.

 

-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열두 개의 빛돌.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황새바위 순교성지

 

충남 공주시 왕릉로 118에 있는 대전교구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조선 천주교회 박해 역사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다. 공주는 조선 시대에 충청 감영이 있던 중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충청도 전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이나 다른 지역의 신자들도 배교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공주에서 문초와 고문을 당하다가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는 337위이며 무명 순교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성지에서 최초로 순교한 신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외조부 이존창(루도비코·1759~1801)이다.

 

‘황새바위’라는 말은 예로부터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해 붙여졌다. 또한 ‘항쇄바위’라고도 불렸으며 그 이유는 ‘사학(천주학)죄인’이 사형 선고를 받으면 죄인들의 목에 항쇄(목에 씌우는 칼)를 차야만 했는데, 사학죄인은 항쇄를 차고 바위에서 공개 참수를 당했기에 이곳을 ‘항쇄바위’라고도 불렀다.

 

충청남도 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된 성지 안에는 성당, 예수성심상, 순교탑, 무덤경당, 성모동산, 십자가의 길, 12개의 빛돌 등이 있다. 성지는 공주 천주교 순례길을 이루는 6개의 순례터 중 첫 번째 장소이다. 순례길은 교수처형지인 향옥터(환옥터), 공개처형지인 장깃대나루, 고문과 취조가 이루어진 우진영터, 최종 사형판결을 내리던 충청감영 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6·25전쟁 중 총살의 현장인 공주중동성당이 있다.

 

[가톨릭신문, 2024년 6월 2일,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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