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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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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유익한 심리학: 용서에 대한 심리 산책

116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5-02

[유익한 심리학] 용서에 대한 심리 산책 (1)

 

 

용서는 어떤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내면은 어떤 부정적인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에 빠진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 내면은 억울함이나 서러움 등의 부정적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등으로 상처를 받는다. 평화로웠던 내면은 혼란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겪은 일이 클수록 그에 대한 우리의 내면은 더 큰 혼란과 고통에 빠진다. 어떤 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무너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잠을 못 이루고 분노에 짓눌려 가까운 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은 ‘나’인데 그 부정적인 영향으로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나’인 셈이다.

 

용서할 일이 많은 사람의 내면은 어떨까?

 

늘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사람, 매일매일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일이 일어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이 고역이요,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의 마음은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니고 누더기 옷을 걸친 것처럼 산뜻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날도 기쁜 일이 있어도 순간순간 그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이 불쑥불쑥 일어나 그의 마음은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억울함에 속상하고 부당함에 밉고 나만 이러한 일을 당하나 싶어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더욱 용서하기 어려워지고 미움과 증오와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 가면서 마음은 더욱 무너져 내린다.

 

“일곱 번”(마태 18,21) 용서하면 될까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성경의 용서는 제한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놀라곤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쩌라는 거야?’ 하며 부당한 요구를 받은 양 불편하다. 그런데 용서와 관련된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니 성경의 가르침이 이해된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부당한 일로 너의 마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누군가의 잘못으로 너의 성심을 상하게 하지 마라!’, ‘용서함으로써 너의 평화와 성심을 회복하여라!’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으로 주님께서 주신 평화와 우리의 내면이 무너지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악’을 방치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용서의 덕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원죄로 인한 세상의 부당함,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은 더는 ‘에덴동산’이 아니다. 오래전에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 하느님의 부재라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겪는 온갖 부당함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고 온갖 부정적인 느낌, 감정 그리고 생각들로부터 견디어 내고 이겨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에덴인 하늘나라를 회복해야 한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용서는 덕(德)이라기보다 더 큰 은총에로의 초대인 신앙이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유익한 심리학] 용서에 대한 심리 산책 (2)

 

 

금년 전례력에는 흔치 않은 연중 10주일이 있었다. 제1독서(창세 3,9-15 참조)에서 아담은 알몸인 것이 두려워 숨었다고 고백한다. 어찌 알몸이 두려운 일일까?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릴케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만약에 내가 나를 만난다면 나는 거기에서 도망치고 말거야!”라고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일까? 뱀은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라며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은 “먹음직하고 …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에덴에서 쫓겨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거듭해서 상처를 준다. 착하게 살아도 복이 오지 않더라. 악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억울하고 서럽고 슬프다.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대부분은 차라리 죄악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하고 짙은 어둠에 빠진다.

 

아무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며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싶지만, 세상을 통해 비추어진 자기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고 비참하다. 세상은 돈과 권력, 학벌과 지위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이를 무시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길이다. 이때 용서란, 삶의 기술 중의 하나다. 세상의 관점과 평가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자신의 결단이다. 물론 이 결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알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세상이 얼마나 두려울까? 세상이 무서운 것이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의 내적 부끄러움이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용서란, 자기 수용에서 출발하는 삶의 기술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자기를 수용하는 데서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타인의 내적 부끄러움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상 의미 없으며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자기 존재성보다 세상의 비교평가와 판단에 의한 것을 자기 존재인 양 믿고 사는가? 결과적으로 인간은 세상이 두려워 세상의 기준과 가치평가에 자신을 맞추어 살게 된다. 우리의 내면은 생존 문제를 비롯하여 출세, 성공, 재물과 재산, 학벌과 능력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재구성된다. 인간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신의 내면세계를 잃어버린 셈이다. 자기를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자기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수치심이라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세상의 논리로는 점점 갈등과 불화에 빠져들 뿐이다. 사람 사이에서의 용서는 화해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지만,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는 자기 가치의 회복에 관한 일이다. 용서는 덕(德)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초대인 신앙에 가깝다. [2024년 6월 23일(나해) 연중 제1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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