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해성사] 한국교회의 전통 판공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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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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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의 전통 ‘판공성사’
우리나라에만 있는 신앙 유산… 특별한 은총 누리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 고해성사 중인 신자의 모습.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 시기는 판공성사를 통해 자신의 허물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회개와 보속의 기간으로 보내는 사순 시기를 앞두고 신자들은 소속 본당에서 ‘판공성사표’를 받는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둔 대림 시기와 함께 사순 시기에도 판공성사를 보는 것을 교회 전통으로 여긴다.
판공성사는 한국교회에서 오랜 세월 형성된 독특한 문화이자 신자들에게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평소 고해성사에 부담을 갖고 있던 신자들도 사순 시기 판공성사 기간에는 소속 본당이나 상설고해소 등을 찾아 신자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판공성사란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국교회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판공성사’라는 말을 듣게 된다.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를 앞두고 본당 주보 공지나 미사 중 안내를 통해 “판공성사표를 받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판공성사는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과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받아야 하는 고해성사’로 정의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회만의 고유한 문화다.
판공성사는 한자로 ‘判功聖事’라고 적는데 ‘공로를 판별하는 성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바치는 고해성사를 판공성사라 부르는 이유도 ‘공로를 판별한다’는 의미처럼 다른 시기보다 특히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신자 스스로가 교회 앞에서 자기의 부족한 점과 허물을 깊이 성찰하라는 권고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사제 입장에서는 신자들이 세우거나 세우지 못한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신자들은 판공성사표를 받아 고해성사를 본 뒤 판공성사표를 본당에 제출하면 교회는 신자의 교적에 판공성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기입한다. 교적에 남는 판공성사 기록은 신자 스스로에게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척도가 되는 동시에 교회 차원에서도 신자들의 신앙생활 동향을 살피고 신자들을 어떻게 돌볼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교회법 제989조에는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라고 규정돼 있어 1년에 한 차례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박해 시기부터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던 신자들이 1년에 두 차례는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았던 전통을 형성해 왔다.
박해 시기에 사제는 신자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던 만큼 판공성사를 주기 전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면담과 가정 방문 등을 통해 자세히 살폈고 신자들 또한 판공성사를 보기에 앞서 자신의 신앙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국교회는 박해 시기부터 오랜 세월 뿌리내려 온 판공성사의 전통을 「한국천주교 사목 지침서」(이하 사목 지침서)에 명문화했다.
- 1910년대 건립 당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전주교구 수분공소 고해소의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목 지침서 제90조 1항은 “모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하여야 한다. 이 영성체는 원칙적으로 부활 시기에 이행되어야 한다.(교회법 제920, 989조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재의 수요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까지 연장하고 있으므로(교구 사제 특별 권한 제7조 참조) 이때에 맞추어 판공 고해성사도 집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2항에는 “부활 판공성사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위의 시기에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 판공 때나 다른 때에라도 받아야 한다”(교회법 제989조 참조)고 덧붙였다.
사목 지침서는 보편 교회법과는 구별되는 지역 교회법 역할을 하므로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교회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성격을 갖는다.
판공성사, 대림·사순 시기에만 드려야 하나
신자들은 칠성사 중 가장 부담스러운 성사는 고해성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기간이 정해져 있는 판공성사가 주는 부담감은 평소에 비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교회는 판공성사가 신자들에게 주는 부담감을 덜어 주기 위해 주교회의 2015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판공성사 기간 이후에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들도 판공성사를 한 것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판공성사 기간에 성사를 받지 못하더라도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유연성을 부여한 조치다.
이를 위해 판공성사표 양식을 바꿔 “판공성사 기간 내에 성사를 보기 어려우면 판공성사 기간 이후에라도 성사를 보고 성사표를 제출하면 된다”는 안내 문구를 넣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주교회의 2014년 춘계 정기총회에서도 “부활 판공성사 기간 내에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도 성탄이나 1년 중 어느 때에라도 고해성사를 받으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것은 고해성사가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기쁨과 은총을 주기 위한 성사임에도 신자들에게 의무와 부담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해소하려는 한국교회의 노력이었다.
판공성사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자신의 소속 본당에서 보는 경우가 많지만 판공성사 장소가 소속 본당으로 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판공성사는 교회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신앙생활 지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소속 본당이 아니어도 상황에 따라 타 본당이나 몇몇 교구에 설치된 상설고해소를 방문해 성사를 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판공성사표에 해당 본당이나 상설고해소의 도장 날인 혹은 서명 등을 받는 방법으로 판공성사를 본 사실을 확인받은 후 소속 본당에 제출하면 교적에 정상적으로 기입된다.
판공성사는 신자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고 사제로서는 신자들의 신앙을 파악하고 돌보는 방편이 되므로 판공성사를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판공성사의 은총을 풍성히 받으려면 성사 전 준비기도와 통회, 결심을 거쳐 고백과 보속 실천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판공성사를 3년 이상 거르면 냉담 교우로 분류되므로 판공성사에 성실히 임해야 하며 판공성사 기간에 가깝게 고해성사를 이미 보았거나 특별한 사유로 판공성사를 보기 힘든 경우에는 본당 사제와 미리 상의해 적절한 조치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법을 전공한 수원교구 안법고등학교 교장 최인각(바오로) 신부는 “교회법이나 규정에 앞서 판공성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교회만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신앙의 유산”이라며 “1년에 두 차례라는 횟수는 판공성사를 두 번만 보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최소한의 지침을 제시한 것이어서 자주 고해성사를 보며 풍요로운 신앙의 은총을 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24년 3월 10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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