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사회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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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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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사회교리
반갑습니다. 호남선 종점인 목포까지 먼 거리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목포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고 ‘한국레지오마리애’가 처음 출발했던 곳이고 한국 전쟁 때 교구장님과 두 분 주임신부님, 보좌신부님이 계셨는데 아마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미국에서는 부산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미리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난 새벽에 미국에서는 전보를 보내어 빨리 피난하라는 소식이 전해졌었는데, 그때 교구장님과 주임신부님, 보좌신부님이 양들을 놔두고 우리만 살자고 피할 수 없다고 하고 남아 계시다가 납북되시는 과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 분을 순교자로서 교황청에 시복해주시도록 청원 서류를 보내드렸고 지금 작업 중입니다. 그래서 산정동 성당은 그런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회의를, 연수를 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하고 환영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제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 박사학위 논문을 썼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저서에 의한 사회교리>입니다. 그때 당시 이분이 사회 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또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특히 재산 문제, 재물 문제, 부 문제, 재물의 사회적 기능, 공적 기능 이러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또 정의와 공평에 대해서, 노예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정리해서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은 원래 세례명은 요한이었는데, 워낙 강론을 잘하고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강론으로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에 금으로 만든 입이라고 하였고,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말이 ‘금구(金ㅁ)’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세례명을 딴 분들을 금구라고 지었습니다. 원래 이분이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셨고, 높은 직위도 부모들이 다 가지고 있었고 주교가 되지 않았으면 높은 관직에 있었을 텐데 본인이 그것을 사양하고 사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교품을 받을 때도 그분은 영혼이 맑고 순수해서 어떤 관직도 직책도 맡지 않으려는 그러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장상은 이분에게 어디서 만나자고 하여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주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복음의 말씀에 충실해서 잘못하는 황제나 황후에게도 과감하게 질타하면서 그러한 황제가 미사 하러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강직함으로 유배를 세 번이나 가셨고 마지막에는 유배 길에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아주 강직하신 분이셨습니다. 먼저 이분이 사셨던 문화적인 배경으로는 그리스문화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스 세계에서 정의의 개념, 정의의 기원에 대해서 피타고라스는 어떻게 이야기했고, 소피스트는 어떻게 이야기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했는가에 대해서, 실제로 그리스 세계에서 법과 법을 적용하는 실천 문제에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 책에 저술하였습니다. 요즘 검찰청이나 법원에 가 보면 정의의 여신상이 있는데, 볼 때마다 헷갈립니다. 어떤 정의의 여신상은 두 눈을 가리고 있고 어떤 여신상은 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때에 따라서 선택적 공정을 실천한다는 이야기인지 선택적 정의를 실천하자는 이야기인지 헷갈립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법 집행을 보자면 자유의 여신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제가 쓴 논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집행되고 있는 법이라든지 정의라든지 공정이라는 것은 본래의 정신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법과 정의로서의 기원, 희랍 세계와 로마 세계, 그리스도교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또 법의 성체로서의 의로움, 정의는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에 있어서는 사회정의 실천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애덕활동이라든지, 노예 문제 등이나 재물의 사회적 기능, 공적인 기능 그러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애덕실천의 의미에서 크리소스토무스는 모든 정의, 실천, 법과 정의에 앞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 이전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에로스라는 에라토가 있고 필레인, 필리아, 아가파오 즉 아가페가 있습니다. 에라오나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 타오르는 사랑과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는 욕구와 아주 흔히 성적 형태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존재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게 소유한 대상을 전제할 만큼 격렬한 욕구를 동반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에로스라는 단어는 악마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즐거움이나 만족을 목적으로 한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세계에서 신들이 인간들을 향해서 기울이는 자상한 애정 인간적인 모든 것을 끌어안는 필레인, 필리아는 애덕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랑과 애덕 이렇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애덕이라고 윤리시간이나 철학 시간에 배우셨을 겁니다. 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마 다 알고 계시겠지만 신학생 때 배우는 것으로 덕은 선행의 습관이다. 누가 보거나 안보거나 선행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그대로 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볼 때만 하고 안볼 때는 안하고, 그것은 덕이 아닙니다. 안하면 뭔가 꺼림칙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나오는 것이 덕이다. 그래서 덕은 꾸며서 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애덕이라고 하면 사랑의 실천을 습관적으로 하는, 몸에 배여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그것이 애덕입니다. 그래서 아가파오에서 유래하는 아가페는 애정으로 맞아들임을 의미하면서, 라틴어로 ‘아모르 까리따스 딜렉티오 엘레에모쉬나(amor caritas dilectio eleemosyna)’로 옮겨집니다. ‘엘레에모쉬나’는 라틴어로 자선이라는 말, 애긍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사랑과 자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러분이 지루해할 것 같아서 대충 뛰어넘겠습니다.
아가페의 크리소스토무스적 개념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 용어와 일치하지만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작품들에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정의를 찾아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분은 어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서 설명을 하고 거기에 구체적인 답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실제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이렇게 삽시다. 이건 이렇게 하지 맙시다.’ 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성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면서 그분을 가난한 사람들 및 억눌린 사람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태오 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때에 하느님이 심판의 기준을,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병들었을 때 찾아주었느냐? 감옥에 있을 때 찾아주었느냐? 하는 그런 말씀으로서 병들거나 가난하거나 굶주리거나 헐벗거나 감옥에 갇힌 소위 소외계층과 예수님께서는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돌봐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질책하시면서 그들이 법을 잘 안 지켜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보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는 더 잘 지켰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질책을 받은 것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과시용 자신이나 헌금을 했기 때문에 질책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주위에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 눈먼 사람, 어려운 사람,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사 때 고백의 기도를 바칠 때, 내가 지은 죄를 반성하기에 앞서서 “내가 어려운 사람을 발견하고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외면했습니다. 귀찮아서 외면했습니다. 불편해서 외면했습니다. 찾아보면 찾아볼 수 있는데 어려운 사람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왜? 내 이기심 때문에 불편해서, 귀찮아서, 그 사람들은 목숨과 관련된 순간순간들인데 나는 귀찮아서 불편해서 아까워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는 반성을 먼저 하는 것이 나의 도덕적인, 윤리적인 실수에 대한 반성보다 앞서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체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비교할 정도로까지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본다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항상 가장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라는 것입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소원이 장애를 가진 자녀가 자기보다 하루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저 아이는 누가 돌봐줄 것이냐 그리고 혹여 자기 자녀들의 친구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 자녀를 무시하거나 때리거나 하면 그것을 본 부모의 가슴에는 대못을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이러한 의미에서도 하느님께서도 정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받고 못 배우고 그래서 무시당하고 하면 하느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소외계층, 어려운 분, 덜 배운 분, 덜 가진 분,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구체적인 자선을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자선을 함에 있어서 공적으로 자선하는 어떤 기관을 통해서 자선을 하는 것도 필요하고 좋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개인적인 애덕활동의 실천이 없다면 그 역시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개인이 발품 팔아서 찾아보고, 함께해주는 그것을 많이 권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의미에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은 애덕활동에 있어서 사적 애덕활동과 공적 애덕활동에 대해서도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사적 애덕활동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사적으로 애덕실천을 하는 것, 이웃 사랑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적 애덕활동은 공적기관에 하는 것인데,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공적 애덕활동을 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장거리로 성지순례 가는 사람들이 도중에 지치거나 병들거나 탈진하거나 하는 분들이 쉬어서 갈 수 있도록 집을 군데군데 만들어놓고 그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병간호를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피난소를 만들었고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내서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적 애덕활동도 하였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시대 당시 로마. 그리스 사회에서의 노예는 동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법률용어로 종(從)이 salves입니다. del은 혹은, animal하면 동물, 법률 재산을 처리하는 법적인 용어에서 salves del anima 종과 동물은 재산을 이러 이러하게 처리한다. 이건 동물과 노예를 동격으로 본 겁니다. 그만큼 노예는 인격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노예들끼리의 결혼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도 보장받지 못했고, 노예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에 대한 친권은 부모에게 전혀 없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으면 그 소유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인에게 있는 것처럼 로마 제국에서도 노예의 인권은 전혀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동물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노예를 겁탈하거나 해도 전혀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때린 것은 괜찮은데, 죽을 정도로 때리면 벌을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로마 제국 사회에서 노예는 동물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그리스도교는 한마디로 복음의 정신을 설명하면 ‘사랑’입니다. 그러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했느냐, 제가 본 관점에서 저는 두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평등입니다. 사랑이 진실하게 발전, 성장하기 위해서 사람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평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평등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수평적인 사랑만이 오래 갑니다. 수평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수평적인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은 수평적 관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과 똑같이 되셨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사랑의 실천 중 하나가 평등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놓고 필요한대로 나눠썼다.”(사도 4,35)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예는 동물처럼 취급받는 상황에서 노예출신인 칼리스투스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이건 로마제국 사회에서 있을 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에서 노예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구나 똑같다는 의미에서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이고 로마의 카타콤바 지하묘지에는 주인과 종과의 차별 없는 무덤이 조성되어 있으며 평등을 사랑의 전제조건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노예를 데리고 있다면 해방시켜 주고, 자활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돈을 주어서 내보내라고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의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나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직원을 다수 고용해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상생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그리스도교적인 경제관에 입각한 운영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 수녀님들이 중국에서 사도직을 하는데, 공산당 간부 몇 명을 초대해서 광주수녀원에 머물다 갔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들이 아직 하지 못한 공산당 이념을 수녀님들이 제대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하고 갔답니다. 공산당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이념처럼 서로 가진 것을 내놓고 서로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쓰자는 것인데 실제로 공산당 간부들은 귀족들이죠. “수녀님들을 보니 옷도 똑같이 입고 명품을 쓰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방에서 자고, 돈도 본당이나 기관에서 받은 것이 있으면 다 내놓고 버스비도 다 타다 쓰고 하니, 우리보다 공산당 이념을 잘 실천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은 재산의 공유문제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재산이라는 것은 재물과 부의 개념을 독점적 점유물이 아니고 우리는 관리인이다. 우리가 필요한 만큼 쓰고, 또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어 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이지 우리가 독점적으로 배타적 점유를 하기 위한 재물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부라는 것은 넘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본래 ‘사용’이라는 어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성인은 재물은 사용해야지 쌓아두는 것은 본 성격에 맞지 않으며 선의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고 하며 재물 자체를 악하거나 선하거나로 이야기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의 쓰임새에 따라서 악해질 수도 선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강도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흉기가 될 수 있지만, 의사나 부엌의 어머니 손에 들려 있는 칼은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고 수술 칼이 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선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서에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고 하셨는데, 뱀처럼 슬기롭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뱀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옆가지로 나가는 말인데 동남아시아 어디에서 여행객에서 뱀을 목에 감아주었는데 시원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태리 아주머니 목에 감에 주었는데 뱀이 죽어버렸어요. 화상을 입고 죽어버렸답니다. 뱀은 냉혈동물인데 그 아주머니는 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뱀이 죽어버려 돈을 좀 물어주었다고 합니다. 뱀처럼 슬기롭다는 말은, 뱀은 공격을 받으면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합니다. 무엇이겠어요? 머리입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머지를 다 포기할 줄 안다고 합니다. 끊어지더라도 머리만 살아있으면 도망간답니다. 이 말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식별해라. 그것이 슬기이다. 자기에게 쓸데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요긴한 것을 잃어버리면 그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도 조금 언급이 되겠지만 그것이 뱀처럼 슬기로운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의 사업에서도 왕왕 그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카네기는 사업이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것들을 리스트 업 하라고 합니다. 그 문제들의 제목을 전부 적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적어서 순서대로 다시 적고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체크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 중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처리해나가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뱀처럼 슬기롭게 되어라’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그것이 뱀처럼 슬기로운 것이며, 비둘기처럼 순박하다는 말은 - 본래 희랍어에서 순박하다는 것은 ‘섞이지 않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 복음에서 율법과 하느님 말씀을 헷갈리게 하지 말라, 섞어서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 뜻, 하느님 정신 그대로 믿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경제인으로서, 신앙 경제인으로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식별할 수 있는 지혜, 하느님의 지혜는 어디에서 발견되느냐, 대부분 교부들의 공통된 말씀 중 하나는 하느님의 지혜는 선에 깃들어 있다. 선한 마음, 맑은 영혼에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자신의 삶을 선하게 하고 영혼을 맑게 하고, 깊이 침잠해서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지혜, 즉 식별력을 갖게 될 것이다. 다급하게 허둥지둥 대다가는 분별력이 떨어질 것이다. 성체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침묵하며 침잠하여 기도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영혼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맑게 좀 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 삶도 정리할 수 있고, 또 나의 사업에 대해서도 내가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어야 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은, 성당에 장식하는 것을 금하거나 나쁘다고 하지 않으나 제대를 금으로 장식하고 옷을 금옷으로 입으면서 성당 밖에서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추위에 벌벌 떨며 굶주리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맞는 말이냐 그 정도로까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경제 활동하면서도 항상 여러분 직원 가운데 가장 말단직원, 가장 어렵게 사는 직원이 누구인지 보아가며 다른 직원에게 드러나지 않게, 그 직원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정말 품위 있게 도와주는 방법을 생각해서 챙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조카에게, 군대 간부였는데, 조카 부인에게 당신이 챙겨야 될 사람은 승진에 도움이 되는 소위 상관의 사모님들이 아니고 하사관 부인들에게 잘해라 사실 여자로서 자존심 상할 것이 아니냐. 같은 여자로서 남편 잘 만나서 누구는 대령 부인이고 장성 사모님이고 누구는 하사 부인이고 중사 부인이고 같이 모이면 자존심 상할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성당 안에서는 차별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사관 부인들에게 더 깍듯이 잘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끔 이야기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세종로 본당에 매번 주일미사를 나가셨는데, 꼭 명절 때, 성탄, 부활 대축일 때는 미화원 직원과 사무장 사무원에게 직접 봉투 하나씩을 주셔서 사람들이 굉장히 감동받았다고 합니다. 사모님이나 회장님이 몰래 불러서 격려해주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하면 막다른 선택을 할 만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그 힘은 이론적인 설득이 아니고 감동인 것 같습니다. 감동은 꾸민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치를 따져서 설명해주는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너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원하는 것, 아빠가 원하는 것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것 중에서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먼저 열게 한 다음에 이론이 통하지,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론은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란체스코 교황님이나 사회적 존경을 받는 어른들을 보면, 감동을 주는 분들이며 그분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진솔한 행동으로써 감동을 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직원을 위하는 마음을 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래도 남들보다는 좀 더 큰 그릇을 받았습니다. 큰 그릇을 받았다는 것은 그 그릇을 채우라는 것이지 넘치게 놔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홉짜리 받은 분도 있고 한 말 짜리 그릇을 받은 분도 있고, 그러나 그것을 다 채워야 합니다. 한 말 짜리 그릇을 받은 사람이 다섯 되만 채우고 하느님께 간다면 오십 점 밖에 못받습니다. 한 홉 짜리 그릇을 받은 사람이 한 홉을 다 채우고 가면 100점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능력, 재력,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사회에 봉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내 능력과 재능을 봉사하겠다, 헌신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시고 열심히 하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는데 있어서 정말 맑은 영혼,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자주 바치시면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받을 것입니다. 선한 마음에 깃드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서 여러분들께서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 이란에 갔을 때 이란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왜 천주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합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신을 세 분이나 섬기냐? 아버지 신이 있고 아들 신이 있고, 영의 신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결혼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부모님께는 누구요?”
“아들입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당신 부인에 대해서 당신은 누구요?”
“남편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세 사람이요?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 우리도 비단은 하나인데 이름이 세 개가 있습니다.”
하면서 그대로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으면 삼위일체 교리도 연관이 있는 하나의 비유이지만, 여러분들이 결혼해 살면서 삼위일체적인 가정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또 딸로서의 그 삼위일체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교리적인 이야기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불타는 나무에 나타나신 하느님을 보고 “당신을 누구라고 이야기할까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하느님께서는 무어라 답하셨나요? “나는 있는 자 그로다.” 그 말뜻이 무엇일까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래서 저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님을 부를 때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영원한 현재이신 주님, 이렇게 부르고 기도합니다. 천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현재나 천년 후에나 만년 후에나 하느님은 영원한 찰나의 현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으나, 하느님께는 오직 현재일 뿐입니다. 그것도 찰나의 현재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약발이 좀 들겠지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한번만 더 해야지 하고는 그래도 안들어지면 이제까지 한 기도가 있으니 삼십 번은 해야지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간 안에서 바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교황님은 “때는 시간보다 위대하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예수님이 기적을 보이시니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지요. 그래서 피해가십니다. 어떨 때는 이러한 기적을 해달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아직 하느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우리 동양 말에도 ‘성사제천이요’ 사람은 계획을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이 하느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기도는 해야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주님의 뜻에 맞추어서 이루어주십시오. 그리고 기다려야 됩니다. 지금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며 지금 이루어진다면 나에게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예방주사를 맞히려고 하면 무서우니 안 맞으려고 하는데, 너는 네가 우니까 감기에 걸리든지 말든지 천연두 걸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러고 내버려둡니까? 안 그렇죠. 예방주사 맞추지요? 애들이 방바닥에 기어 다니며 뭐가 있으면 손에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데, 먹고 싶다고 그대로 놔둡니까? 결코 못 먹게 하지요.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이 나에게는 좋게 보이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안 좋을 수 있고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이 나에게는 땅이 솟아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이것이 예방주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하느님의 때가 이르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우리가 사업할 때 어떤 때는 파도타기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은 잠들면서도 꺼지지 않는 꿈이라고 합니다. 희망은 실패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데서 끝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업하면서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시지 말고 주님을 끝까지 믿으면서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기도하십시오. 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내가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는 과정에서 나의 기도를 정화시키고 나의 기도가 올바른지 식별하게 하고 나의 기도가 이기적이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출 수 있도록 정화해나가는 하나의 과정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치시되 포기하지 않고, 그 기도가 들어주었던지 안 들어주었던지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제활동, 신앙 활동을 하시면서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한 마음으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를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넣지 말고 되도록 많은 분들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부해집니다. 내 두 손에 쥐고 있으면 쥐고 있는 것만 내 것이지만 두 손을 펴고 두 팔을 펴면 세상이 내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하시되 우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챙기십시오. 가정이 안정이 되어야 사업도 안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최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여러분을 도와서 일하는 직원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게 사는 직원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직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면서 여러분의 사랑의 전파가 번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또 사업체에서 되도록 긍정적이고 격려해주는 말로 직원들을 격려해주고 집안 식구들에게도 힘을 보태주시고 그러면서 물질적인 축복이 영적인 축복으로 더욱 성장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3년 가을호(Vol. 33),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천주교 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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