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친교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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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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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친교의 재발견
교구 장기사목계획에 따라 ‘친교의 해’를 맞이하면서 쓰기 시작한 글을 마무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외롭고 삭막한 사회에서 친교를 살아가는 공동체인 교회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또 교회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이제 연재를 마치면서 남은 ‘친교의 해’를 더 잘 보내기 위해 한가지 말씀을 보태려고 합니다.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
몇 년 전 사이먼 시넥이라는 젊은 미국 작가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 못한다.”라는 인터넷 강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생각이 나니까 ‘하지 말라’ 보다는 ‘•••하라’는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비만 때문에 문제가 많으니 야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군살을 빼서 건강해진 모습을 떠올리며 노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지요.
이 강의는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히긴스는 인간의 동기가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접근 동기는 뭔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그러니까 얻고자 하는 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는 반면 회피 동기는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동기가 다르면 결과에 대한 반응도 달라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 사람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기쁨을 얻지만 안 좋은 일을 피하려고 한 사람은 안도감을 얻는 데 그칩니다. 실패했을 경우 접근 동기 때문에 노력한 사람은 슬픔을 느끼지만 회피 동기 때문에 노력한 사람은 불안감에 시달리지요. 기쁨과 슬픔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과 안도감과 불안의 차원에 사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지금껏 우리 사회가 치달아 온 모습을 보면 그 답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런 신세 된다.”, “열심히 벌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추하게 지낸다.” 여태 우리 사회는 이런 회피 동기 중심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최악의 출산율과 세계 최저 수준의 행복 지수, 매사에 돈 타령을 하는 저속함으로 돌아왔지요. 회피 동기가 아니라 접근 동기, 부정적 관점이 아니라 긍정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입니다.
교회는 다르겠지
교회의 친교도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인간관계의 마찰과 갈등을 겪다가 도피하듯 찾게 되는 것이 교회요 친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곧 한계에 부딪힙니다. 사람들한테 치이고 상처를 입으면서 ‘교회는 다르겠지’, ‘성당 사람들은 안 그러겠지’라는 기대를 하고 교회 단체에 이름을 올리는 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성당이라고 해서 무골호인들만 모인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내 편 들어주고 내 편리 봐주는 사람들만 모인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갈등과 마찰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니던 열두 사도도 누가 더 높은지 다투었다지요.(루카 9,46-48 참조) 이런 모습에 상처를 입고 쓸쓸히 공동체를 떠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세상 마지막 날까지 지상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인간에게 갈등과 상처가 없는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과 상처는 완덕에로 나아가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갈등과 상처라는 기회
2017년 6월, 미국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 초청을 받아 연설합니다. “저는 오늘로 이 학교를 졸업하는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나가며 때로는 부당한 일을 당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나는 여러분이 쓰라린 배신의 경험을 겪고 아파해 보기도 바랍니다. 그 속에서 충성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이따금 외로움도 느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 곁에 있어 주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또 때로는 여러분에게 운도 지긋지긋하게 따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기회라는 것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렷이 인식하고, 내 성공도, 남의 실패도 다 당연한 일이거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이 무시도 당해 봤으면 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자비가 무언지 확실히 배울 만큼의 고통도 겪어 보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내가 굳이 바라지 않아도 여러분들에게 분명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에서 여러분이 무언가를 얻고 못 얻고는, 여러분에게 닥친 그 불행 속에서 여러분 자신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 주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가운데 성령께서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증언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뿌리를 두고 있는 친교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친교로부터 시작되고 그 친교를 세상에 증거하는 교회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겪는 배신과 외로움과 무시 같은 십자가의 상처들을 통해 더 큰 의미를 읽어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세상의 모순과 갈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곳이 아니라 모순과 갈등 속에 더불어 살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향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이상과 꿈은 교회의 삶 속에서 이미 실현되어 왔고 지금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실현되고 있는 친교 공동체
교회가 이미 친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제가 만난 분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봉쇄 수녀원에 들렀습니다. 수녀님들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분들이지요. 화려하고 높은 곳을 향하는 대신 좁은 담장 안에 머물며 소박하고 단순한 삶 가운데 기도에 전념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터입니다. 더 많은 업적과 성과를 낼수록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세태 속에 세상과 교회를 위해 오로지 기도로 힘을 보태는 수녀님들, 그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북돋우며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기만 한 삶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며 하느님 사랑을 바라보게 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인정해 주는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수녀님들의 기도가 교회의 다른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며 모든 활동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준다는 것을 믿고 후원해 주는 교회 덕분에 수녀님들도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초기부터 ‘고아와 과부’로 대표 되는 약한 이들을 돕고, 이 약한 이들은 기도로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이른바 ‘거룩한 교환’이 오늘 우리 안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헐벗은 이’, ‘목마른 이’, ‘굶주린 이’를 돌보는 카리타스,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돕는 교정사목부, ‘병든 이들’ 옆에는 여러 병원과 병원사목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교육과 해외 선교를 담당하는 많은 분들도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소리 없이 떠받치는 164개의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안에서도 다른 신자들이 불편없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받는 이 친교의 흐름은 교회의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끊이지 않는 성령의 작용을 증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친교의 삶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친교를 재발견하고 감사하며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이 ‘친교의 해’를 사는 의미입니다.
모든 형제들의 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회교리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친교를 증거하는 교회에로 모두를 초대합니다. “꿈을 꾸게 하는, 우리 삶을 멋진 모험이 되게 하는 아름다운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아무도 혼자서는 삶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도와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앞을 바라보도록 서로 도움을 줍니다. 함께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 꿈이 백일몽이나 막연한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친교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 선포합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 그러니 ‘친교의 해’를 살면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으로 ‘친교의 해’를 아름답게 채워 갑시다.
* 그동안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 주신 박용욱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23년 12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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