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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22: 비오 12세 교황 - 십자가로 받아들인 교황직, 80만 명의 유다인 생명 구출

69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2-11-11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22) 비오 12세 교황(제260대, 1876. 3. 2~1958. 10. 9)


십자가로 받아들인 교황직… 80만 명의 유다인 생명 구출

 

 

- 가경자 비오 12세 교황.

 

 

안녕하세요? ‘부온 프란조’를 연재하는 고영심 모니카입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 제가 여러분들을 ‘친구’라고 호칭해도 괜찮은지요? 그동안 저는 친구들과 16회에 걸쳐 여섯 분의 교황을 만나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부터 1960년대 성 요한 23세 교황까지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같은 존재로만 알던 교황이라는 존재가 친구들에겐 가까이에 계신 할아버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 앞에 펼쳐진 시대가 평온했을 것 같지만, 교황님마다 맞닥뜨리는 현실은 어쩌면 그리 질풍노도였을까요? 그들은 자신에게 처한 고난을 운명처럼 온몸으로 안고 걸어나갔던 분들이었습니다.

 

 

1939년 3월 2일 제260대 교황으로 선출

 

제가 이번 호에 친구들에게 꼭 알려드리고 싶은 분은 비오 12세 교황입니다. 이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한 성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마무리한 성 바오로 6세 교황과 연결이 되는 분입니다. 이분처럼 힘들게 교회를 이끌어 나간 분이 또 있을까 싶네요. 왜냐하면, 그분은 가공할 ‘제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교황입니다. 혹자는 ‘전쟁 속의 교황’이라고 하였습니다. 19년 221일 동안 교황직에 있으면서 5년여의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했던 고뇌와 고심으로 체중이 50㎏ 중반까지 내려간 적도 있답니다. 항간에는 학살당하는 유다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비오 12세의 침묵(Silenzio di Pio XII)’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임 비오 11세 교황께서 나치의 반(反) 그리스도교 성향에 대응하기 위해 1937년 독일어로 쓴 회칙 「극도의 슬픔으로(Mit bennender Sorge)」도 실은 국무원장 시절의 파첼리도 회칙 작성에 참여하여 독일 가톨릭 신자와 사제들에게 이 회칙을 비밀리에 각 성당으로 퍼뜨렸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고통받는 유다인들과 나치 치하에서 탄압받는 독일 가톨릭 신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분이 바로 비오 12세 교황이었습니다.

 

세수(歲壽) 63세, 자신의 생일인 1939년 3월 2일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는 콘클라베 중 가장 짧은 시간에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260대 교황으로, 1670년 이후 로마 출신 교황으로는 마지막으로요. 부제급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됨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물으면 “한마디로 ‘받아들이겠습니다(Accepto)’”라고 통상적으로 답을 합니다. 그런데 파첼리는 좀 충격적이고 예언적인 수락을 합니다. 마치 그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로 받아들이겠습니다(Accipio in Crucem)!”

 

그의 십자가 중, 가슴 아픈 사건은 1943년 7월 11일 더운 월요일 오후 2시께 로마에 떨어진 미국의 엄청난 폭탄 투하였습니다. 그 지역 사망자만도 15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교황청에 있는 돈과 구호물자를 모아달라 하고, 오후 4시께 경호도 없이 개인비서인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 바오로 6세 교황) 몬시뇰과 함께 쑥대밭이 된 그곳으로 달려가 가족과 친지를 잃은 로마인들의 울부짖음을 위로하고 두 손 벌려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하였습니다. 저녁 8시에 바티칸에 돌아온 그의 흰 수단의 피범벅을 보고 놀라는 이들에게 “놀라지 마세요. 제 피는 아니니까요. 이 피는 ‘로마의 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1943년 7월 11일, 비오 12세 교황이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로마 시내 산 조반니 라테라노성당 인근에 모인 군인들과 난민들을 만나 강복하고 있다.

 

 

미군 폭격 현장 달려가 로마 시민들 위로

 

전쟁 중 그는 아주 적게 먹고 자신의 방도 따뜻하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걸 아껴쓰며 고통받는 유다인들에게 하루 10만 그릇 이상의 따뜻한 수프를 나눠주며 그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다고 합니다. 바티칸과 로마 시내 수도원, 교황 휴양지 가스텔 간돌포,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 아시시 등 유럽 전역(요한 23세 론칼리는 터키에서)에서 나치의 수배자와 유다인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시종일관 피를 말리며 애쓰셨습니다. 교황의 여름 휴양지 가스텔 간돌포에는 1만 5000여 명의 유다인이 피신했는데, 만삭의 유다 여성의 출산을 위해 교황은 기꺼이 자신의 침대를 제공했다는 일화도 들었습니다. 독일군의 퇴각이 시작되자, ‘교황청 복지 재단(Pontificia Opera Assistenza)’이란 이름을 단 버스로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전쟁 상처를 보듬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방송됐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의 전신과도 같이 전쟁 중 실종된 가족을 찾아주는 바티칸 방송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유럽 전역 어디에서도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지요.

 

2005년으로 기억됩니다. 로마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저는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사라예보에서 온 친구였지요. 1992년에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을 청소년 시기에 겪은 그녀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던 아비규환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내 가족은 너무 배고팠어. 먹을 것이 하나도 없던 그때, 본당 신부님께서 조금만 기다려라. 서방 국가(나라 이름은 안 밝히겠음)에서 곧 구호물자가 도착한단다. 그러니 조금만 참자. 아, 그 시기가 성탄 시기였으니,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며 춥고 배고픔을 꾹꾹 눌러가며 참았지. 곧 안겨질 빵과 우유, 햄, 비스킷을 생각하며 말이야. 모니카, 근사한 구호물자 수송차에서 안겨진 그 구호물자를 받아들고는 우리 모두는 환성을 지르며 얼마나 행복했는 줄 아니?…” 사라예보 친구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모니카, 내가 받아든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아니?…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그건 그토록 기다리던 빵도 아니고, 비스킷도 아닌, 플라스틱의 예쁜 구유였어, 구유…. 우린 구유보다 빵을 기다렸는데…. 너무 속상하고 서러워서 구유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단다.”

 

친구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 지구 상에 벌어지는 전쟁에 혹 우리도 따뜻한 마음이 담긴 수프보다, 체면치레에 급급해서 또 다른 ‘구유’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요. 당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침묵은 무엇이었고, 보스니아 내전 때 강대국들의 침묵은 무엇이었는지요? 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비오 12세 교황, 그분은 80만 명에 가까운 유다인의 생명을 따뜻한 수프와 함께 구출했습니다. 답이요? 따뜻한 수프가 바로 ‘답’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UN 총회 승인 전폭적 지지

 

추신 : 교황 비오 12세는 한국의 제사가 가톨릭 교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유교 문화권의 민속이라는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이 UN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받는 데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도움을 청하였다. 같은 해 1950년 세계 성체대회를 로마에서 개최하였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공간인 성 베드로 광장에서 150만 명이 모여 전쟁으로 상처 난 마음을 보듬고 신앙의 일치를 꾀하고자 하였다. 2009년 12월 19일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 가경자(venerabile)로 선포되었다. 비오 12세의 시복과 시성은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다. 6ㆍ25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을 한반도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신 그분께 아직 평화로운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분의 기도와 함께 남ㆍ북한이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통일을 이룬다면, 그게 ‘기적’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 기적을 통해 그분이 ‘성 비오 12세’가 되기를 간절히 빈다.

 

오늘의 레시피는 마늘과 양파 스파게티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파스타이지요. 1950년 6월 24일, ‘20세기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인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 1890∼1902)를 시성한 분도 비오 12세 교황인데, 성녀가 고향 앙코나, 이사해서 살았던 팔리아노, 라티나ㆍ네투노 등지에서 해먹었던 것도 바로 가난한 이들의 파스타였습니다.

 

 

레시피 : 마늘과 양파 스파게티(Spaghetti all’aglio e cipolle, 가난한 이들의 파스타)

 

▲ 준비물 : 스파게티 80g(1인분), 마늘 1쪽, 적양파 반쪽,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두 큰술, 소금, 후추, 빵가루 2큰술.

 

→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스파게티를 넣는다. 약간 약한 불에 올리브유를 팬에 넣고, 편으로 썬 마늘과 양파를 황금색이 나도록 익힌다. 면수를 조금 넣고 5분 정도 마늘과 양파를 익힌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 다른 팬에 올리브유를 조금 넣고, 빵가루를 노랗게 볶고 식힌다.

→ 알덴테(al dente, 치아로 씹었을 때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로 설익게)로 익은 스파게티를 마늘과 양파의 팬에 넣고 센 불로 볶는다. 면수를 넣어가며 익히는 동안 계속 동그랗게 저어가며 크림화하는 게 중요하다. 불을 끄고 빵가루를 반 정도 넣고 골고루 섞이도록 저은 다음, 접시에 돌려 담는다. 남은 빵가루를 완성된 스파게티에 살짝 뿌린다.

 

▲ 모니카의 팁

 

전후 로마는 모두 가난했다. 밭에서 금방 얻을 수 있는 간단한 재료로 만들어 먹던 가난한 이들의 파스타에 비싼 치즈를 뿌려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엄마는 먹다 남은 자투리 빵을 갈아 가루를 만들어 황금색으로 구운 다음, 치즈인 양 살살 뿌려 어린 자녀들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이 ‘가난한 이들의 파스타’를 아직도 사랑하는 이탈리아인들이 많다. 물론 재료에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1월 6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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