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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한무숙 소설가

92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6-04-17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한무숙 소설가 (상)


인간 구원 주제로 꾸준히 ‘역사소설’ 창작

 

 

연필로 쓴 장편소설

 

작가 한무숙은 191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두 살 때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그림 전시회에서 입상을 했으니 그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부산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에는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40년 결혼을 한 후에는 남편이 지금의 서울상대 전신인 서울고상 출신으로 경기도 광주 곤지암의 금융조합이사에 부임하게 되어, 그곳 조합 사택에서 신혼기를 보냈다. 이때 한무숙은 완고한 시가 가풍과 여의치 못한 생활여건 속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달리 택한 예술적 작업이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혼자 조용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소설을 실제로 쓰기 시작한 계기는, 어떤 지면에서 장편소설 모집 광고를 우연히 발견한 데에 있었다. 그는 서울로 출장을 가는 남편에게 원고지를 사다 달라고 했다. 소녀 시절에 신병으로 입원을 하기도 했을 만큼 허약한 건강 탓에 한무숙은 누운 채로 글을 썼다. 이렇게 글을 쓰는 데엔 연필이 제격이었다.

 

그는 누워서 벽에다 원고지를 대고 소설을 썼다. 이렇게 하여 1942년에 잡지 ‘신시대’의 장편소설 모집에 투고했다. 「등불 드는 여인」이란 제목의 장편소설로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라는 시기는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때였고, 대동아전쟁이 막판으로 다가가면서 문학예술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던 때였다.

한무숙 소설작업의 본격적인 재개는 1948년 국제신문의 장편소설 모집에서 「역사는 흐른다」로 다시 당선이 된 것이다. 이 장편소설도 한무숙은 연필로 썼다.

 

 

평화를 위한 언어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는 한무숙 소설에서 실제적으로는 첫 번째 작품이다. 194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 대해 1970년대 작가인 이문구가 새삼 놀라워하고 부끄러워하는 평을 썼다. 그것은 우선, 이 소설이 다른 어느 작가의 소설에 비할 수 없게 풍요한 민족어의 곳간이라는 것이다.

 

“홍명희의 「임거정」에서 사대부와 불한당의 면면을 통해 양극에 치우친 민족어와 풍속을 발견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 양극에다 폭넓은 중간 계층을 더하여 보다 평균적인 민족문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의 전통 문장을 가늠하는 전거를 민족어의 구사력에 두고 본다.”

 

젊은 작가이지만 민족의 토착어 문장 구사에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 이문구가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를 대하고 한 말이다. 이 평에서 그는 한무숙의 소설이, 한국 현대 소설에서 민족적 체취와 숨결이 배제되고 다국적 번역 문체가 풍미하는 시국 문학과는 차원이 다른, 격조 높은 민중문학이라고도 했다.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는 조선조 말엽 민족의 수난과 격동 속에 전개되는 조씨 가문 3대에 걸친 영욕의 생활사와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 학병들이 중국에서 광복군에 들어가는 과정까지 다루었다.

 

“난 탈주할 거야. 광복군에 몸을 던져 놈들을 무찔러서 독립의 초석이 될 거야.”

 

한 조선인 학병의 말이다. 그리고 소설은 해방 직후 분단 현실의 갈등까지도 다루었다. 

 

작가 한무숙도 자신이 소설 「역사는 흐른다」에 대해 한 말이 있다.

 

“나는 3대에 걸쳐 어느 집안사람들 이야기를 썼던 것이지만, 어떤 개인이든 집안이든 간에 아무리 눈과 마음의 문을 닫고 역사의 변천과 사회의 생활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인습과 아집에 고착되어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존재하는 당대 사회의 여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안의 사연들은 어쩔 수 없이 ‘역사’와 동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이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소설을 민중문학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역사소설이 이러하면서도 다채로운 단편들 속에서 돋보이는 민족전통언어의 짙은 질감은 문화의 자산으로, 그는 인간 구원을 주제로 꾸준히 창작 작업을 추진했다.

 

1978년에 발표한 「이사종의 아내」와 1981년에 발표한 「생인손」이 특히 전통 언어의 밀도 짙은 구사를 담고 있다.

 

“당치 않은 호강은 그대로 깔고 앉은 바늘방석의 바늘 수만 늘려가게 하와요. 천주님, 신부님, 쇤네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오. 불쌍히 여겨 주옵시오.” 마리아 할머니는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신부는 노파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주의 평화가 그대와 함께. 고해 신부가 주는 평화, ‘평화’가 구원이다.”(「생인손」)

 

* 구중서(문학평론가) -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펼치고 민족·민중문학을 연구하면서,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왔다. 문예지 창간에 이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가톨릭 잡지 「창조」도 창간했으며, 수원대 국문과 교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가톨릭신문사 편집장,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7일, 구중서(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한무숙 소설가 (중)

 

허무 극복… “모든 존재는 귀하고 좋은 것”

 

 

- 한무숙 소설가의 집필실. 생전에 사용했던 책상과 필기구, 문학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출처 서울미래유산.

 

 

진리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다

 

소설 「생인손」은 한무숙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계층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쇤네는 사직골 정 참판댁 누대 종의 딸년으로 태어나 언년이라구 불렸사와요.” 이 언년이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는 표 마리아 노파이다.

 

가톨릭 신자인 한무숙의 소설에서는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생인손」을 비롯해 「월운(月暈)」 「어둠에 갇힌 불꽃들」이 그러하다.

 

세계문학사에서 가톨릭문학으로 지칭되는 범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교적(護敎的) 성격이라든가 도식적 원리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신자 문학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면서, 문학예술로 작품성을 성취하면 가톨릭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원래 엘리트주의 성향이 아니다. 예수는 부자와 율법학자들이 아닌 갈릴래아 호수의 가난한 어부들을 사도로 삼았다.

 

한무숙의 소설 「월운」은 셋방살이하는 새댁의 아기 낳는 날 이야기이다. 뒷방 색시가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고 문간방 아낙이 조산원 역할을 하는데, 평소에 어려워하며 모시던 집주인 홍 여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소외되고 기가 죽은 집주인은 느닷없이 여름 하루살이 떼를 생각한다. 단 하루 짝짓기를 하고 수놈들은 땅에 떨어져 죽고 암놈들은 알을 낳고 역시 죽는다는 하루살이. 주인 홍 여사는 셋방 해산날에 휘둘리면서 엄숙한 생명의 제전에 정화수를 떠놓고 축수하는 마음이 된다.

 

- 한무숙의 소설 「감정이 있는 심연」 「월운」 「생인손」.(왼쪽부터)

 

 

빛을 향하여

 

「어둠에 갇힌 불꽃들」은 불행한 맹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고아원 앞길에서 큰 싸움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싸우는 사람들은 서로 한치의 양보가 없었다. 험한 말을 구정물처럼 퍼부어 가며 마구 치고 때리고 차고 밀었다. 눈먼 고아들은 공포로 떨며 그 모양을 듣고 있었다.

 

안나가 오돌도돌 떨면서 병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 왜 싸워요?

 

글쎄, 생각을 잘못하는 사람들 같군.

 

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생님, 저 사람들 눈뜬 사람이에요? 못 보는 사람이에요?

 

병호는 어리둥절하며

 

보는 사람이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왜 싸워요? 앞을 볼 수 있어도 불평이 있어요? 무슨 불평이 있어요. 앞을 볼 수 있는데.

 

맑고 고운 눈에 눈물이 피잉 돌았다.(안나는 소위 청맹으로서, 앞을 보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병호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며, 소유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본다는 것은 밝은 빛을 향하는 것이다.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말했다. “진리도 빛을 향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빛을 향해 다가가는 데에 구원이 있다. 한무숙의 이 소설은 불편하고 불행한 맹인사회 삶의 온갖 구체적 여건을 최대한 충실하게 밝혀 보임으로써, 작가로서의 장인의식까지 드러낸다. 그 불편 속에서도 상상하는 존재 인식을 긍정하게 한다.

 

작가 한무숙은 섬세하고 세련된 감수성도 지니고 있다. 「감정이 있는 심연」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는 6·25 전쟁 후의 상처 깊은 상황에서도 남녀의 사랑과 그 의미를 성찰했다. “그런데 다아 지나가 버리고 마는 거지요” 하는 체념과 달관 같은 것까지 풀어낸다.

 

그러나 한무숙은 결코 허무로 끝내지도 않는다. 이것이 가톨릭 작가로서의 그의 본색이다. 「우리 사이 모든 것이」가 그 작품이다. 체험의 기록인 점도 있어 그 의미의 진정성도 더 짙다.

 

착하고 성실한 청년, 사랑하는 아들이 먼 이국에서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차라리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존재는 귀하고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다. 너 까닭에 이 괴로움, 이 아픔을 갖지만 너는 태어나야 했고 많은 추억을 남겨 주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아픔도 남겨야 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요제프 라칭거)은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말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優勢)인 것이다. 다른 인간 안에 계속 머무름으로써만 존속이 가능하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구중서(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한무숙 소설가 (하)

 

교우들 ‘일관된 신앙’ 돋보인 소설 「만남」

 

 

- 다산 정약용의 생가를 찾은 한무숙 소설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소재는 정약용 일가

 

가톨릭 작가 한무숙은 생애의 만년에 장편소설 「만남」을 발표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조카 정하상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다산은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남인 실학파 안에서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을 계승한 것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廣州) 지역에 살았다.

 

정하상은 다산의 바로 손위 형이며 조선 천주교 초기교회의 평신도 회장 정약종의 아들이다. 정하상은 아직 성직자가 없던 조선의 자생적 교회에서 중국을 통해 신부를 영입하는 운동을 추진해 조선교구가 설정되게 한 공로자이다. 그리고 정약종과 정하상의 가족은 모두 순교를 했다. 다산 정약용은 초시 합격 후 「진리본원」 「성세추요」를 비롯한 천주교 신심서들을 연구하느라고 6년 동안 대과 급제를 미룬 일이 있다.

 

다산은 그의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서 나라의 신앙 박해 정책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순교는 면하고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형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병이 들어 선종했다. 이들은 모두 신앙에 대한 박해 아래서 가시밭길을 걷는 삶을 살았다.

 

다산은 강진 유배에서 돌아온 후 마재 고향 집에서 노년기를 보내고 선종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의 정신적 편력은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서 가장 폭넓고 심오한 사상의 경지를 이루었다.

 

소설 「만남」의 서두는 다산의 유배지 강진에서부터 시작된다. 강진의 다산 초당에 인접한 고을인 해남 대둔산의 대흥사 혜장 스님의 입적 다비식이 첫 장면이다.

 

선승(禪僧)인 혜장은 유교에도 밝았는데 음주 육식 여색에도 구애 없는 무애사상의 분방한 수행자였다. 이러한 설정은 작가 한무숙의 역사소설 「만남」이 결코 어떤 교조적 정신 틀에 갇히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소설에는 무당 굿판의 무가 부분들도 보인다. 이 나라 토착문화의 원천에서부터 이야기를 열어 가는 것이다.

 

하물며 다산 일가에 얹혀있는 천주교 신앙은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듯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그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헤아려질 수 있는가.

 

- 한무숙 장편소설 「만남」(상).

 

 

민족문화의 중심

 

다산은 동양의 학자로서 유교의 후기 철학인 성리학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의 관념에 치우치는 데에 대립하는 실학의 지성인이니 문제는 더욱 벅차기만 하다.

 

천주교는 서양 신부들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신앙 교리를 한문으로 써서 발행한 책들을 중국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이 구해서 가지고 와 민간에 알려지게 된다. 천주교 서적으로 대표적인 것이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서학서들이 한글로 번역도 되면서 대중 속에 전파되어 갔다.

 

천주실의에서는 원래 동양에 있는 ‘상제(上帝)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같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식물과 짐승에게는 없는 ‘영혼’이 있고,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대로 태어나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 땅의 백성들이 내세에라도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 박식한 다산은 원래 성리학에서 ‘태극’(太極)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하는 이론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에 소통하지 않는 태극이 어떻게 세상을 섭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비판은 성리학에 의거하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혁명과 같은 충격이었다.

 

다산은 성리학 대신으로 동양의 고대 ‘상제’가 인간과 소통하면서 나라의 임금보다도 상위에 있는 섭리자 하느님이라고 인식했다. 다만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 데 대해서는 다산이 반대했다. 제사 금지는 교회 쪽의 오류였고 1939년에 금지 방침을 해제했다.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과 영원에 진입하는 영혼을 믿은 순교의 행렬은 그것대로 장엄한 역사였다.

 

소설 「만남」 안에서는 정하상의 일가와 교우들의 일관된 신앙이 돋보인다. 다른 인간상으로는 권진사댁 종인 승낙종의 악행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작가는 죄의 동기에 연민의 정을 베풀어 놓았다.

 

다산도 한때 떠나 있던 신앙에 돌아와 유방제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한다. 다산은 학자요 시인이고 민족문화 정체성의 중심으로서, 한무숙의 소설 「만남」 안에서 온갖 가치의 총화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일, 구중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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