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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8: 칼 라너 (중)

33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3-07-0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8) 칼 라너 (중)

시대, 사회적 문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하고자 노력


- 칼 라너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사목과 교육, 연구활동 병행

라너는 1936년 12월 19일 「그리스도의 늑방으로부터」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잘츠부르크에서 '종교철학의 기초'를 주제로 강의했는데, 강의록은 1942년 「말씀의 청자」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라너는 1937년 가을 인스브루크대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첫 강의는 '은총론'이었다.

그러나 인스브루크 신학대는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하고 새로운 교육법을 제정하면서 해체됐다. 신학 교수들은 무기한 정직을 당했고 예수회 회원들은 추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학과는 스위스로 이전했다. 형 후고 라너는 스위스로 갔지만 동생 칼 라너는 비엔나로 가서 사목을 하며 영신수련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양성과 사제 평생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 기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사목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세상에서 어떠한 과제를 가졌는지 숙고했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강연했고, 교회 일치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개방적인 자세로 교회 고위 성직자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갈등은 그가 비오 19세 교황의 지지를 이끌어내 무마됐다.

전쟁이 끝나자 라너는 다시 인스브루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술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부지런한 성격 탓에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한 뒤 연구교육 활동을 했다고 한다. 강의 분야는 창조론, 원죄론, 고해성사론, 성품성사론, 병자성사론이었고, 라틴어로 강의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주일미사, 고해성사, 영신수련 동반, 본당공동체 지도 등 사목활동을 병행했다.


탁월한 학문적 업적

그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다양한 학회를 통해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의 관계를 연구하고 발표했다. 라너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1905~1988)과 함께 새로운 가톨릭 교의신학을 기획하기도 했다. 또 다양한 신학종합사전과 여러 총서 그리고 신학저널이 탄생하도록 힘썼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중요한 기초자료로는 「신학과 교회를 위한 사전」, 「세상의 성사」, 「신학 소사전」, 「논의제기」, 「사목신학편람」, 「구원의 신비」, 「공의회」, 「공의회 소문헌」 등이 있다. 개인논문 모음집으로는 16권에 이르는 「신학논총」이 있다.

라너는 시대 문제에 즉각 응답하기 위해 소논문을 주로 작성했다. 저술은 4000여 편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그중에는 체계적으로 작성된 방대한 분량의 저술도 찾아볼 수 있다. 철학박사 청구 논문인 「세계 내 정신」은 라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서양의 중세 사상과 근대주의를 현대적 차원에서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두 번째 대표작인 「말씀의 청자」는 철학 및 기초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에 대한 숙고다. 여기서 라너는 인간을 하느님 계시를 순종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라너는 영성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쓴 영성서적으로는 「침묵 속의 만남」, 「성시간과 수난묵상」, 「기도의 필요성과 축복」 등이 있다.

국내에 소개된 칼 라너 저서들.


그의 학문적 열의는 평생 그칠 줄 몰랐다. 1972년에는 「교회의 구조변경」을, 1976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을, 그리고 그가 사망하던 해인 1984년에는 「교회 일치-실질적인 가능성」을 출판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신학자문으로 참여해 큰 공헌을 했고,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개최된 독일 주교회의(1971~1975)에도 참가해 영향을 미쳤다.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 교황청과 충돌

신학자로서 삶이 성공과 명성으로만 치장되진 않았다. 그는 1950년대 교회와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라너는 기존 이해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고자 했다.

라너의 눈에 교회는 분명히 거룩한 것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행업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교회는 죄 있는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이후 파괴된 유럽 사회에서 새로운 교회상을 세우려 했다. 1947년 '죄인의 교회', 1954년 '현대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인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성령을 끄지 마시오!'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당시 주교들은 라너의 새로운 교회관에 거세게 반대했다.

라너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아론과 관계된 것이었다. 1950년 '마리아 몽소승천'(성모승천) 교리가 반포되자 라너는 여기에 반대 의견을 썼다. 마리아 교리를 반대한다기보다 '교리 반포' 행위에 대한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교리 반포는 교의 발전에 대한 정당성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중에서도 성경적 근거가 매우 중요한데 성경에는 성모승천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기 어려운데 교리를 반포하는 것은 가톨릭 지성인뿐만 아니라 타 교파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으로 이해

라너가 보기에 성모승천은 교리로 선포되지 않고도 단순히 교회의 믿을 내용으로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라너가 마리아론을 현대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라너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주목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십자가 위로 어둠이 덮치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증언하는데 이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옛 세상이 몰락했음을 뜻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그와 동시에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성경의 증언은 새로운 세상이 들어섰음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세상의 종말이자, 인간 영육의 완성이 이뤄지는 세상의 새로운 창조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그리스도론적ㆍ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였다. 그는 성모승천에 관한 믿음을 교리로 선포할 정도로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에 대해 393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논문 「오늘날 마리아론의 문제들」을 작성했다.

그러나 로마의 시각에선 라너의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독특한 구원적 위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를 통해 인간 부활이 이뤄진다는 라너의 인간학적ㆍ종말론적 숙고는 마리아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라너의 새로운 마리아론이 마리아만의 독특한 위치를 흔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라너의 저술은 출판 검열로 출판되지 못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그는 교회가 믿고 있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원죄론적 관점보다는 오히려 구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하느님을 받아들여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하느님 구원 은총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생물학적ㆍ육체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학적ㆍ구원론적 관점, 즉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긍정이라는 시각에서 고찰돼야 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라너의 이러한 주장에 교황청은 다시 한 번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율리우스 되프너(1913~1976) 추기경의 중재로 정직을 면했다.


미사 공동 집전 보편화에 기여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에도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제의 미사 공동 집전은 생소했다. 라너는 교부들의 저술을 역사적으로 탐구해 「다수의 미사와 하나의 희생」이라는 논문을 1951년 완성했다. 여기서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은 교회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공동 집전이 드물었던 이유는 다수의 사제가 한 미사 안에서 오직 한 성체성사를 거행하기에 하느님 은총이 적게 베풀어진다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이러한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라너에게 경고했지만 결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너의 주장을 받아들여 미사 공동 집전을 허용했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7일,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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