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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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08-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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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 특집]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 박해시대에 수난받는 신자들을 표현한 서소문 순교자기념탑 부조.
다가오는 2009년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는다.
그보다 한 해 앞선 2008년 순교자성월을 맞아 한국 천주교 4대 박해를 종합하고 당시 박해의 특징과 주요 순교자 등을 소개한다.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 12월 22일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돼 10월 참수됐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박해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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