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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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척 보면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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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5-11 ㅣ No.807

[레지오 영성] 척 보면 알지요

 

 

센스쟁이

 

“참 센스 있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센스 있는 사람은 사고방식에서도, 말과 행동에서도 그 사람만의 멋이 묻어나 저절로 시선이 갑니다. ‘센스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겉치레나 처신을 잘한다’는 좁은 의미의 칭찬이 아니라 그 사람 인격의 깊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감각이나 판단력이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지나치는 작은 것들도 놓치지 않고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아채는 감각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금실 좋은 부부는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하지요. 오랜 세월 함께 하며 사랑하고, 갈등하고, 포기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듯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시간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마음이 영글고, 깊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 4,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알아들을 귀’, 바로 영적 센스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지난 호에서 ‘신앙의 기본기’는 영적인 숨쉬기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영적인 숨쉬기는 숨쉬듯 하느님을 갈망하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신앙의 자세는 영적인 감각을 일깨워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그 말씀 안에 자신이 추구하며 따라가야 할 생명의 길이 있음을 깨닫는 은총과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눈이 보배다

 

우리 속담에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일일이 배우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필요하고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이 없는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지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알아듣도록 여러 가지 표징과 말씀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보고 들었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지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 ;8,21)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왜 못 알아듣는 것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신비를 알아듣는 센스, 말하자면 영적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맛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먹어봐야 맛을 알듯이 신앙의 맛을 알아야 신앙의 축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아무런 감흥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귀찮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남아있다면 신앙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을 나누는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몸(육신)과 혼(정신)과 영(영신)에 따른 감각이 있습니다. 육신(몸)이 지닌 다섯 가지의 감각을 오감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감각은 본능적이고 즉각적이어서 누구나 비슷하게 느끼고 반응합니다. 정신(혼)이 지닌 감각은 감정을 통해 작용합니다. 감정은 공감과 감응이라는 형태로 반응하지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자신도 모르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영신(영)의 감각은 인간만이 지닌 감각입니다. 영적인 것을 알아듣고 깨닫는 감각이 ‘영적 감각(spiritual sesne)’입니다.

 

모든 감각은 자주 사용할수록 발달하여 ‘감수성’이 깊어집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하지요. 정신적인 감각도 쓰면 쓸수록 더욱 섬세해지고 예민해집니다. 음악이나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차원의 공감 능력을 발휘합니다. 감수성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감각도 자주 사용할 때에 영적인 감수성도 깊어지고 섬세해집니다.

 

 

신앙 감각

 

감각이 항상 정확한 것을 느끼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감각은 착오를 만들고, 정신의 감각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기도 하고, 잘못된 정보에 의해 확증된 편향을 지니게 되면 사실과는 다른 것을 사실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릇된 영적 감각은 신앙의 대상과 내용을 제멋대로 만들어 신앙의 이름으로 내세우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신앙 역시 올바른 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살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신앙 감각’(sensus fidei)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감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신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원천입니다. 올바른 신앙 감각이 있어야 신앙의 축복을 누릴 수 있고 그 축복을 이웃과 세상에 나누어 주는 길이 생깁니다.

 

신앙 감각은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세 가지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감각이고,

둘째는 신앙의 내용과 표징에 대하여 생각하고 식별하는 능력이며,

셋째는 신앙의 성장을 위해 영적 감각으로 살아가는 성덕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태도는 ‘신앙 감각’이 올바른 신앙으로 표현될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앙 감각이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영적 통찰력을 키워주고 지탱해주는 건전하고 보편적인 신앙으로 표현될 때 신심(信心)이 됩니다. 또한 신앙 감각은 자신이 믿는 신앙의 대상을 진리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올바른 해석과 식별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신학(神學)입니다. 그리고 신앙 감각은 자신이 믿는 대상을 향한 열정과 믿을 내용을 삶으로 수용하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영적 지향성을 지속시켜 주는데 이를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성화를 위한 도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참된 신앙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우리의 시선은 정작 바라봐야 할 ‘달’은 바라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도구인 ‘손가락’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빗댄 말입니다. 신앙인도 올바른 신앙 감각을 상실하면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늘 깨어 성화 소명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감각을 일깨워 올바른 신앙 감각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5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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