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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13: 가르치고 배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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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28 ㅣ No.623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3) 가르치고 배우는 이야기


세상을 배우는 교회, 진정한 복음 선포는 그 길에 있다

 

 

- 6월 9일 프란치스코 교황(왼쪽 두 번째)이 교황청에서 열린 ‘디지털 시대의 신앙 커뮤니케이션’ 세미나에 참가한 신자들과 함께 세미나 주제와 관련해 이야기하고 있다. 교황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 경청하면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CNS 자료사진.

 

 

선생의 즐거움

 

신학교 선생으로 한 시절을 지냈다. 젊은 신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호흡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기성의 때가 아직 덜 묻은 청춘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나를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상호순환적이다. 신학교에서 학과목을 강의할 때, 시험을 치지 않았다. 늘 글쓰기 과제를 주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을 강조했다. 시험지 채점이 아니라, 신학생들의 글을 읽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직한 생각과 정직한 말과 정직한 글은, 내용의 인식적 수준과 관계없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하, 요즘 세대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어,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배움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자기 글쓰기가 어색하고 서툰 학생도 있지만, 몇 학기를 거치면서 점점 달라지는 글쓰기를 보는 일도 기쁘다. 자기의 생각과 말과 글을 벼려가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크다. 신학적 주제와 책과 영화에 대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읽어낸 글들에 감탄한 적이 많다. 솔직히 고백하면, 어떤 글들은 그 주제에 대한 내 시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통찰을 담고 있다. 신학생들의 글을 읽을 때 나는 선생이기보다는 학생이 된다. 그들에게 배운 게 더 많았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존재와 신분과 지위에 따르는 만남이 아니라, 이야기와 이야기의 만남이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가 만날 때, 관계와 친교의 넓이와 깊이가 심화된다. 진정한 만남이란, 이야기와 이야기의 만남, 살아온 역사, 사연, 솔직한 생각과 관점들, 마음의 무늬들 간의 평등한 만남이다. 인종, 성별, 나이, 선후배, 지식, 지위, 신분에 의한 차등적 만남이 아니다. 진정한 만남 안에는 가르침과 배움이 언제나 동시에 발생한다.

 

신학교 선생 시절, 세대를 넘나드는 만남의 즐거움을 누렸다. 물론 강의 시간에 말을 우선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기에, 자기 말에 취해 열정을 쏟은 기억도 많다. 일방적 강의와 가르침은 자기만족과 지적 권력 행사로 전락할 위험이 늘 있다. 선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에 있다는 것을 요즘 다시 깨닫는다.

 

 

내용보다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의 문제보다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과 어긋날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다. 참된 가르침과 배움은 강요와 주입의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열린 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 김영민은 강의 중에 자기 식대로 말하지 않고 학생들의 말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한다. “능동적이며 섬세한 말의 교환과 교차만이” 공부와 실력을 키우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김영민의 공부론』) 대화는 가르침과 배움이 동시에 발생하는 자리다.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지적, 정서적, 공동체적 분위기 역시 중요한 요소다. 탁월한 교육 행동가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교육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가 진리의 공동체로 변화되지 않는 한 깊고 만족스런 가르침과 배움을 가질 수 없다. 선생과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신뢰의 공동체가 형성될 때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이 발생한다. 열린 마음과 태도로 정직하게 묻고 답을 찾아간다면 진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신뢰가 형성되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다.(『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철학자 김영민 역시, 장소의 중요성에 대해 이와 비슷한 견해를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장소로 빚어 신을 내려오게 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머물게 하였다는 것이다.(『차마, 깨칠 뻔하였다』) 결국,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항상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교회, 경청하고 배우는 교회

 

‘교도권’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일반적인 교회의 이미지는 늘 가르치는 교회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르치는 교회뿐만 아니라 경청하고 배우는 교회를 강조한다. 현대 신학은 교도권에 관해 달라지고 확장된 이해를 제안한다. 교도권을 교리와 법을 규정하고 제정하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넓은 의미의 기능과 역할로 이해한다. 물론 교리와 법을 규정하고 제정하는 권한은 교황과 주교단에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기능과 역할은 주교들에게만 있는 것 아니라 신학자와 신자 모두에게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도권과 교의의 선교적이고 사목적인 지향성에 대해 강조한다. 교도권과 교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와 사목을 위해 존재한다. 교도권과 교의는 복음 선포를 지향하는 것이며 교회의 사목적 삶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교도권은 교의의 규범적 주장들과 신자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사목적 현실이 갖는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해소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가르침에 관한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선교와 사목을 지향하는 교의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의미한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경청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경청자이며 수용자이다. 교회가 세상과 사람의 삶과 사연을 경청하고 배우지 못하면, 교회의 선포는 그저 허공에서 맴돌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시인 이성복은 주장한다. 스승을 갖지 못한 자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선생은 늘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무엇보다 자신에게 먼저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좋은 선생은 언제나 더 큰 선생으로 인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선생은 언제나 매개자다. 선생은 잠시 맡은 자리일 뿐이다. 어느 시점에 주어진 배역으로서 선생일 뿐이라는 의미다.(『끝나지 않는 대화』) 존재로서 영원한 스승은 오직 주님뿐이다.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경청하고 배우는 자세와 태도가 더 큰 가르침이 된다. 선생은 자세와 태도로 기억된다. 돌아보면, 삶은 세세한 영역은 사라지고 큰 줄기만 남아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김소연의 시, ‘빛의 모퉁이에서’) 삶은 낱낱의 ‘표정’으로 있기보다는 대강의 윤곽이 보여주는 ‘자세’로 남는다. 선생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27일,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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