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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4: 배론성지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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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23 ㅣ No.1958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4 · 끝) 배론성지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교우촌 찾아 밤새워 걷던 길 위에서 선종한 ‘땀의 순교자’

 

 

드론으로 찍은 배론성지 전경. 왼쪽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과 조각공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숲에 가려진 최양업 신부 묘소와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다. 배론성지 제공.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 맞는 삶을 산 목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지만, 최양업(토마스) 신부 또한 그 고백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늘 “하느님과 함께 있기가 소원”이라고 고백하던 최 신부와 시시때때로 옥죄어 오는 박해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 교우들의 만남은 11년 6개월에서 시간이 멈췄다. 새로운 조선인 사제가 탄생하기까지 그 뒤로 35년 10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느님 자비와 섭리 없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도 허사라는 걸 최양업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최 신부는 경상도 남동쪽 끝자락 죽림공소에 숨어 지낸다. 최 신부가 1860년 9월 3일 자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19번째 마지막 서한에는 이 같은 영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저희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닥친 박해 때문에 교우들이 모든 걸 잃고 이리저리 쫓기고 체포되는 상황을 최 신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가 천주교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최 신부는 시편 130장 3절의 구절을 인용하며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배론성지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부주임 성원경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은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돼 만 40세 젊은 나이로 선종하시기까지 자신이 원했던 삶보다는 ‘순명하는 삶’을 사셨다”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매년 7000리씩 걸어 신자들을 만나고 사랑을 주셨던 그 지극하신 사랑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묘소. 묘소 앞 오른쪽에 1942년 12월에 제천의 신자들이 세운 묘비가 있고, 왼쪽에는 최 신부의 시복시성 기도문이 새겨진 빗돌이 있다.

 

 

그렇지만 최 신부는 자기 죽음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선종하기 10개월 전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 끝 부분에 이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해오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하루에 80∼100리씩 걸어 교우촌을 찾아 신자들을 사목해야 했으니 지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기에 선교사들보다는 운신의 폭이 훨씬 자유로웠고, 일주일에 제대로 잠이 든 날이 며칠 되지 않을 정도로 사목 활동 반경이 넓었다. 밤새워가며 걷고 걷던 길목에서 결국 그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쓰러졌다.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를 되뇌던 그는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선종지는 문경 교우촌, 혹은 충청도 진천공소로 알려졌지만, 만 40세 젊은 나이에 이 땅의 유일한 조선인 목자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의 유해는 선종지에 임시 매장됐다가, 그해 11월 초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배론성지로 이장됐다.

 

1861년 9월 4일 자로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최 신부가 박해시기 조선 교회에 얼마나 귀한 사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굳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뒤 저에게 자기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 앞쪽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상.

 

 

최 신부가 묻힌 배론은 조선시대 때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불리던 마을로, 지금의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구학리)이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살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파괴됐다가 1840년대에 다시 교우촌이 형성됐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주기(요셉) 회장과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순교하면서 ‘순교자들의 요람’이 됐다.

 

계곡이 배(舟)의 밑창을 닮았다는 원주교구 배론성지는 이제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정원’으로 조성돼 있다. 오늘의 배론성지는 ‘세 가지 보물’로 유명하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유박해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이 1801년 2월부터 9월까지 머무르며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쓴 토굴이 첫 번째이고, 1855년에서 1866년까지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역할을 겸했던 성 요셉 신학당이 두 번째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세 번째다. 그중 장주기 회장의 집에 세워졌던 성 요셉 신학당과 묘소가 최 신부와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다. 최 신부는 1855년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배론 성 요셉 신학당에 들러 신학생들을 돌봤고, 1855년 10월 8일 자 11번째 서한을 배론에서 쓰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배론에 묻혔다. 이에 배론성지는 최 신부 탄생 200주년과 선종 160주년을 기념, ‘땀의 순교자, 길 위의 사도, 최양업 신부님의 길을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연중 주말 2박 3일 피정, 교구 피정과 연동해 1일 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무덤 지기’를 자처하는 배론성지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주임 배달하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께서 12년간 목자로 사목하셨던 시간은 지금의 코로나보다 더 즉각적이고 고통스러운 환란의 시대였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신부님은 당신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하늘나라에서 신부님을 만나기 전 이승에서 신부님을 제대로 만날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신부님의 삶을 읽고, 배우고, 듣고, 걷겠다”고 밝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2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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