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의신학ㅣ교부학

[신학] 신학서원3: 세상을 읽는 신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2-02 ㅣ No.606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 세상을 읽는 신학


세상 속에서 하는 신학, 어떻게 살지 질문 · 성찰 · 탐구하는 일

 

 

“세상을 읽는 신학이란”

 

신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학은 우리가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신앙을 성숙시키는 데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신학은 오늘의 현실 교회 안에서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가? 신학은 교회 공동체의 형성에,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떤 모습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신학은 신앙인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있을까?

 

학문적 이야기는 자칫 딱딱하고 살짝 지겨울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의 경계가 늘 뚜렷하지는 않다. 둘은 자주 겹쳐진다. 그래도 가능한 한 신앙적 사유와 성찰로서의 신학이라는 관점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다. 의도와 실제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신앙을 탐구하는 신학

 

전통적으로 신학의 과제는 신앙의 기원과 내용을 탐구하는 일이다. 신앙의 내용을 명제적으로 설명하는 교리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리의 전통 속에 담긴 진리와 그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 일이다. 신학은 언제나 신앙과 교리와 긴밀히 연결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톨릭적 방식으로 믿는다. 하느님을 신앙하지만, 그 신앙의 방식이 가톨릭적 방식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하는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탐구하는 일이 신학의 과제였다. 계시와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하느님의 창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 죄와 은총 속의 인간이 무슨 의미인지, 왜 가톨릭은 칠성사를 수행하는지, 종말론적 완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학은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가 조직신학의 기본 틀이다. 조직신학의 이 전통적인 프레임은 여전히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문제는 기존의 조직신학이 탐구해왔던 내용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과연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솔직히 말해, 많은 신학책들을 읽어 보지만, 신앙의 내용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하나의 신학적 진술이 어떤 구체적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직한 고민 없이 그저 추상적인 개념과 명제를 남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 명제를 진술할 때, 과연 무슨 생각과 상상을 하는 것일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저 하느님에 대한 교리적 명제를 내가 수용하고 동의한다는 뜻일까?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이 믿는다는 뜻일까?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구원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구원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하나의 신학적 진술은 정직한 질문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

 

신학한다는 것은 신앙 내용에 대한 질문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자신의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신학은 시작된다. 신앙의 내용에 대한 나의 관심과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되고 있는가? 신앙의 내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때, 우리의 신학은 좀 더 살아있는 신학이 된다.

 

 

교회를 성찰하는 신학

 

신학은 자기성찰적이다. 성찰은 언제나 자기반성적이다. 신학은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궁전으로서 교회는 가시적 실재를 넘어서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교계제도와 다양한 기관으로 구성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 현실 교회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의 여정 속에 있다. 현실 교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신학의 과제와 사명이기도 하다. 오늘의 교회 현실이 정말 복음적인 모습인지, 교회 안의 많은 규범과 제도들이 복음과 신앙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교회 안에서 평신도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규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며 새로운 현실 교회의 모습을 찾아가는 일이 신학의 과제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신학

 

하느님은 세상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사회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학은 당연히 세상 속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일상생활이 복음적인지, 가족과 이웃과 직장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동과 태도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인지, 오늘의 사회적 현상들과 현실이 복음과 신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일상적 삶과 사회적 삶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성찰하고 탐구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신학하는 일이다. 신학적 탐구의 대상은 이성적 사유와 교회의 영역에만 매몰될 수 없다. 세상을 복음과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 역시 신학의 과제이며 사명이다.

 

신앙과 교회는 세상을 넘어 초월을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과 교회는 언제나 세상 속에 있다. 세상을 읽는 신학이란 신앙을 탐구하는 신학, 교회를 성찰하는 신학, 시대의 징표를 읽는 신학, 그 모두를 말한다. 신학은 탐구와 성찰과 읽기를 포함한다. 탐구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이고, 성찰한다는 것은 반성한다는 것이고, 읽는다는 것은 해석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신앙하는지, 그리고 그 실제적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일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 교회의 모습이 복음적인지 식별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고 고백되고 실천되고 수행되는지 곰곰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31일, 정희완 신부(가톨릭 문화와 신학 연구소 소장)]



1,9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